[역사이야기] “영원한 제국”과 ‘몰락하는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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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제국>>과 ‘몰락하는 왕국’

하원호(근대사 1분과)

몇년전 많이 팔리는 책 중에 <<영원한 제국>>란 소설이 있었다. 그 작가인 이인화씨가 최근 박정희를 미화하는 소설을 써서 신문마다 광고가 한창이다. <<영원한 제국>>의 배경은 정조독살설이다. 원래 정조독살설은 1800년 정조가 죽은 이후 영남 남인계열의 유림(儒林)에서는 널리 유포되어 있었다.

정조의 죽음은 노론(老論)일당의 독재체제를 완전히 구축하는 계기가 되었고, 정조정권 아래에서 중앙정치세력으로 일부 명맥을 이어가던 남인(南人)의 중앙정권과의 단절을 가져왔다. 따라서 사실 여부와는 상관없이 노론에 의한 정조독살설을 남인쪽 인물들이 당연하게 여기게 되었고 공개적으로 표현하지는 못했지만 문하 제자를 통해, 또는 가문의 후손을 통해 은밀히 전해져 내려왔다. 필자도 출신이 이 쪽이라 어릴 때 들은 적이 있다. 이 설이 공개화된 것은 60-70년대 북한과 남한 일부 학자들이 실학을 연구하면서 저술에 담으면서부터였다.

<<영원한 제국>>은 이 설을 배경에 깔면서 에코의 소설에서 나오는 추리기법을 표절하여 성리학적 사유의 대립적 논점을 제기하고 있다. 이 성리학적 사유의 충돌이 규장각을 중심으로 한 살인사건을 일으킨다는 줄거리이다.

사실 독살이라고 생각할 개연성은 충분히 있다. 정조는 40대 초반의 한참 정정하던 나이에 정말 ‘어느날 갑자기’ 죽었다. 그리고 노론이 정조를 죽일만한 상황이기도 했다. 노론은 서인에서 갈라진 당쟁의 한 분파이다.

정조의 증조할아버지인 숙종은 후궁이던 장희빈의 소생을 왕자로 책봉했다. 이 왕자책봉은 남인세력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시키는 것이었다. 장희빈의 남동생이던 장희재가 당시 남인의 세력가와 직접 연루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에 집권세력이던 서인은 대책을 마련할 수 밖에 없었고, 서인의 우두머리격이던 83세의 노대신 송시열이 간곡한 어조로 왕비의 후손을 아직 보지 못한 시점에서 왕자를 정한다는 것은 이르다고 상소를 올렸다. 숙종은 이 상소를 보고 즉각 송시열을 삭탈관직하고, 몇달후 사약을 내려 버렸다. 그리고 중궁(中宮) 민비를 폐위하고 장희빈을 왕후로 맞아들였다. 이 과정은 바로 서인의 정치적 몰락을 의미했다.

숨을 죽이고 있던 노론, 소론 등 서인은 반격을 준비하게 된다. 남인의 집권으로 몰락한 서인의 정권탈환 기도는 사전에 발각되어 오히려 남인에게 호된 서리를 맞을 지경이 되지만, 숙종이 마음을 돌려 장희빈을 폐위하고 인현왕후 민씨를 복위시키는 바람에 오히려 남인이 몰락하고 말았다. 그리고 이 때 서인중에서도 장희빈의 처벌에 소극적이었던 소론은 그 뒤 장희빈의 민비 음해사실이 드러나면서 몰락하고 노론만이 정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복위된 민비는 끝내 소생이 없어 장희빈의 아들이 대를 잇게 되는데 경종이 바로 그다. 경종은 3년 정도 재위하다가 죽게 되고 영조가 뒤를 이었다. 영조는 서인 이 인현왕후를 복위시키는 과정에서 숙종의 마음을 되돌리기 위해 궁중에 심어둔 최무수리의 아들이다. 이 과정은 그동안 텔레비전에 {장희빈} 등으로 여러차례 방영되었고, 그것을 줄줄이 엮는 것은 이미 텔레비전을 열심히 보신 분들에게 새삼스러운 이야기가 아니어서 자세한 것은 생략한다.

영조의 탕평책은 당쟁을 극복하자는 목적이었다는 것이 교과서적인 상식이지만, 탕평책의 실제 내용은 노론 일당독재를 기본으로 하고 기타 남인이나 소론과 같은 당파에서 일부 인물을 중요하지 않는 자리에 앉혀 불만을 줄이는데 불과했다. 반면 정조의 경우는 다소 다르다. 정조는 남인계열의 인물을 중용했다. 채제공은 남인이면서도 영의정자리에 올랐고, 육주비전외의 시전의 금난전권(禁亂廛權)을 없애는 신해통공(辛亥通功)을 실시하는 등 혁신적 정치를 했던 인물이다.

정조가 남인을 많이 쓴 데는 왕권강화의 의도가 있었다. 이미 영조대이후 노론이 정권을 주도하면서 권문화한 노론에 의해 왕권의 행사에 많은 제약이 따랐다. 이 시기 활발하게 나타나는 실학적 경향도 바로 이와 관련을 맺고 있었다. 실학을 흔히 근대적 학문이라고 하지만 실학자가 추구하는 이상향은 대개 중국 ‘삼대(三代)’로의 복귀이다. 중국 고대의 하, 은, 주 세 나라가 이상적 목표이고 그로 돌아가기 위해 권문에게 집중된 토지나 노비를 왕권, 곧 국가로 돌려야 한다는 것이 실학자의 이상이었던 것이다.

정조가 당시 심화되던 지주-소작제도의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전국의 선비에게서 토지개혁방안을 구한 것도 같은 의도에서였다. 토지개혁안을 제출한 학자들의 결론은 대부분 권문의 토지집중을 막고, 농민에게 땅을 고루 나눠 조세의 징수를 확보해 왕권과 국가권력을 강화하자는 쪽이었다. 이 토지개혁방안을 검토해서 정조에게 보고한 학자가 바로 다산 정약용이었고, 정약용의 실학사상의 싹은 이 과정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처럼 정조가 규장각을 중심으로 신진학자를 키우고 혁신정치를 시도하게 되자 그동안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노론으로서는 위기감을 느끼게 되었다. 하지만 정조가 나름대로 새롭고 학문적으로도 탄탄히 무장된 세력을 기반으로 개혁을 주도하는 데는 정면으로 반박할 여지도 없었다. 이 위태로운 국면을 극적으로 전환시키는 것이 바로 정조의 죽음이었다.

정조가 죽자 그동안의 남인세력은 급격한 몰락의 길을 걷게 되고, 정약용 등 실학자들도 유배를 당했다. 그리고 정조가 별다른 간섭을 하지 않던, 서학(西學) 곧 천주교를 믿는 쪽- 이들의 상당수는 실학자였다-에 대한 혹심한 탄압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노론 중심의 외척 정치, 소위 세도정치가 19세기 정치의 지배적 형태로 자리잡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정조독살설이 남인계열의 인물들에 의해 제기되었지만 정권이 노론에게 돌아간 이상 공개화될 성질의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영원한 제국>>은 이상의 정치적 상황을 성리학적 세계관의 충돌로 소설화시켰다. 그러나 정치논리가 반드시 그렇게 꿈결같은 세계관과 직결된다고 하기는 어렵지 않은가 싶다. 원래 조선시대의 지배계급은 성리학으로 무장된 양반이었고 당쟁을 할 당시에도 성리학에 대한 해석과 직접 관련을 맺는 논쟁도 있지만, 그것은 정권의 탈환과 몰락에 대한 반사이익을 얻기 위한 것에 불과하다.

주자가 만든 성리학을 흔히 신유학(新儒學)이라 하여 그 이전의 공자나 맹자가 만든 원시 유학과 다르게 본다. 성리학이 그 이전 유학과 다른 점은 많다. 하나의 정치 논리에 불과하던 원시유학을 철학으로 승화시킨 것도 이 때부터라 한다. 그러나 그 철학의 심오함과는 상관없이 주자가 만든 성리학은 현실적 목적이 있다. 주자가 살던 시대는 남송때였고, 남송때에는 중소지주가 사대부로서 관료로 많이 진출하던 시기였다. 이들 사대부의 정치적 입지를 세우기 위해 만든 것이 성리학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경우 고려때 사대부가 성리학을 도입해 권문세족의 불교에 대항하던 것과도 그대로 닮았다.

지배이데올로기는 그것의 철학적 깊이와 상관없이 현실적으로는 정치세력간의 권력다툼에서 나오는 부산물일 뿐이다. 소설 속의 철학적 <<영원한 제국>>은 현실적으로는 이미 부패 속에 무너져가는 조선왕조를 왕권을 중심으로 재건하려는 움직임과 이에 반대해 자신의 이익을 지키고 ‘몰락하는 왕국’으로 끌고 간 권문세력간의 권력투쟁에 불과한 것이었다. 현실의 역사는 결코 <<영원한 제국>>식의 관념론으로는 이해하기 불가능하다.

저자인 이인화씨는 박정희를 미화시키는 최근의 소설을 펴내기 전 어느 일간지에 세종을 찬양하면서 강력한 왕정이 혼란한 민주주의보다 낫다고 주장했다. 인류가 피눈물 나는 희생 끝에 얻은 민주주의를 부인하고 봉건시대의 왕을 오히려 동경하는 반역사적인 논리는 역사를 소설 팔아먹는 상품쯤으로 아는 싸구려 작가의 모습을 그대로 보인다.

와이에스가 죽을 쑤는 바람에 박정희가 부각되는 현세태를 놓치지 않고 이용하는 저자의 발빠른 움직임은 세종에 대한 찬양 역시 만원짜리 화폐의 세종대왕에 대한 탐욕스런 사랑에서 나온 것이 아닌가 의심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