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 곰방대와 말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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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방대와 말보로

하원호(근대사 1분과)

담배가 수입개방이 된 것은 1986년이다. 10년이 지난 지금은 외제, 특히 미국과 일본담배가 담배소비량의 10%를 훨씬 넘는다. 담배가 건강에 미치는 해로움은 말할 나위도 없건만 미국담배 광고를 보고 있을라치면 말보로의 서부적 낭만과 켄트의 물방울이 튀기는 것 같은 서양여자가 건강 따위는 잊게 한다. 게다가 그들의 물불을 가리지 않는 판촉행위는 ‘약간’의 품질개선과 ‘열렬한’ 애국심에 업혀 외국담배의 수요를 막으려는 전매청의 안이함을 비웃기까지 하는 것같다. 자본주의상품을 애국심에 호소해서 판매두절시킨 예는 그 어느 나라에도 없다. 물산장려운동식의 논리는 일시적 현상일 뿐 품질과 가격경쟁에서 이기지 못하는 한 끝까지 성공할 수 없다.

콜롬버스가 1492년 아메리카를 발견하고 인디언에게서 담배잎을 얻어 서양에 처음 전한 담배는 16세기에 필리핀, 일본을 거쳐 임진왜란을 전후한 16세기말 17세기 초 무렵 우리에게 전래되었다. 담배는 병든 사람에 좋다거나 술이 깨고 소화가 잘된다는 등 처음에는 약용으로 여겨져 보급되었지만 날이 갈수록 기호품화하여 소비가 급속히 증가했고 재배지역도 넓어져 갔다.

담배재배가 급속히 증가한 데에는 병자호란의 영향이라는 설도 있다. 우리나라에 쳐들어온 청국군대는 돌아가는 길에 수많은 조선사람을 포로로 데리고 갔다. 원래 수렵이나 유목생활에 길들여져 온 여진족으로서는 농경민족인 우리를 데려가 농경을 시키려는 게 주된 목적이었다. 부모 처자를 청나라에 빼앗긴 우리의 처지에서는 몸값이 얼마가 들든 다시 돌아오게 해야 했는데 그들의 요구액수가 엄청나 평생을 벌어도, 전답을 다 팔아도 값을 채우기 어려웠다. 그런데 여진족은 워낙 담배를 좋아했으나 재배가 어려워 담배 무게와 금덩어리 무게를 같이 칠 정도로 담배를 귀하게 여겼다. 뒤로 가면서 요구하는 담배의 양도 많아 졌지만 초기에는 담배 한 짐으로 사람 하나를 바꾸어 주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금방 돈이 될 수있는 담배를 많이 심게 되었다는 것이다.

담배란 놈은 원래 인이 박히면 끊기가 어려워 포로문제가 아니더라도 수요가 급증했다. 1614년에 지은 이수광의 {지봉유설}에는 “요즘 사람은 담배를 많이 심는다”고 했고, 17세기 후반 우리나라에 표류되었다가 탈출했던 하멜의 {표류기}에는 4, 5살에 담배를 배우기 시작한다고 적을 정도였다.

18세기에 들어오면 흡연관습은 보편화되고 담배재배로 이익을 남기는 농가도 많아졌다. 담배는 어떤 작물보다 수익이 높은 것으로 인식되었는데 실제로 최상급 토지인 상상전(上上田)에 벼를 심었을 때보다 10배의 이익이 남았다. 그러나 재배방법이 어려운 데다가 흉년이 들 경우 한해 농사를 완전히 망치기 때문에 빈농보다는 주로 부농의 부 축적의 수단이 되었다. 흡연과 금연에 대한 논쟁은 전래이후 몇백년 동안 중앙정부에서도 계속 되었으나 금연령을 내리지는 못한 채 “비옥한 땅에 담배를 경작마라”는 정도의 명령만 각지방 수령에게 내렸다.

손님이 와도 차나 술 대신에 담배를 내어 놓는 연다(煙茶), 연주(煙酒)의 관습이 생길 정도가 되자 생활문화로서의 흡연문화가 차츰 자리를 잡아 갔다. 원래 신분사회에서의 문화란 게 하나부터 열까지 신분차별을 드러내게 만들어진 것인데 양반들이 보편화하는 흡연습관을 그냥 보고 둘 리 없었고 규율을 만들기 시작했다. 어른 앞에서는 피우지 마라, 평민이나 천민이 양반 앞에서 피우지 마라, 여자는 남자 앞에서 피우지 마라 같은 것이 그것이다.

담뱃대의 길이에도 제한을 두어 양반은 긴 장죽을, 상민은 곰방대를 쓰게 했다. 우리의 현재 담배문화는 담뱃대 문제를 뺀다면 이 때 양반들이 만든 규율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담뱃대의 대통에 담아 물뿌리로 빠는 전통적 흡연관습이 변화가 온 것은 개항이후였다. 개항이후 외국상인들이 각연초(刻煙草), 권연초(卷煙草) 등의 수입연초가 들어오면서 담배의 종류도 다양해졌고 우리나라에서도 제조연초를 만드는 권연국(卷煙局) 같은 기관을 여럿 세워 담배제조방식을 개발하고 외국산 담배와 경쟁을 했다. 우리나라 사람은 대체로 전통적인 강렬한 맛을 좋아했기에 수입담배는 큰 기세를 떨치지 못했으나 1894년 갑오개혁때의 김홍집정권이 거리에서 담뱃대 사용을 금지하는 법령을 발표하자 권연초의 사용이 많아지고 담배수입량도 증대해 1894년 이후에는 총수입액의 1%가 되었다. 이때 잎으로 말은 엽권연초와 종이로 말은 지권연초도 들어왔다. 수입담배는 지권연초가 다수를 차지해갔고 주로 미국제와 일본제였다.

원래 제국주의는 먼저 식민지 국가의 유통과정을 장악한 후 생산에 직접 침투하는 방식으로 자본을 수출하고 식민지 이윤을 챙겨간다. 담배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어서 제조연초의 수요가 증가하자 1896년 이후 외국인이 직접 담배회사를 설립하기 시작했다. 조선인도 이에 대응해서 연초제조회사를 만들었지만, 영세한 자본으로 경쟁에서 이길 수 없었다.

1905년 한국을 보호국으로 만든 일본은 식민지 경영을 위한 재정확보의 측면에서 연초를 중시해 1909년 연초세법을 공포해 담배재배세와 판매세를 부과했다. 담배가 전매제로 된 것은 1921년 7월이다. 1919년의 3.1운동 이후 총독부의 재정지출이 확대되자 재원마련을 위한 정책의 하나로 연초전매제가 만들어졌다. 1920년대에 담배의 전매로 총독부가 거둬 들인 돈은 매년 세입액의 20%를 차지할 정도였다. 이는 오히려 지세수입보다 많은 액수였다.

연초전매령은 생산자체와 유통의 전과정을 통제하는 것이어서 생산농가의 저항도 만만치 않아 밀경작이 성행했고 중국과 만주에서 밀수입도 했지만, 단속에 걸리는 조선인이 매년 2만명이나 되고 전매령 위반자가 형사범의 1/3을 차지할 정도로 철저한 단속을 했다. 1930년에 들어 군국주의체제에 들어가면서 더욱 강력해진 단속으로 위반자가 줄어들었다. 따라서 전통적으로 조선인이 발전시켜온 담배제조와 유통은 완전히 일제의 손아귀에 들어가고 고유의 의미의 전매제가 확보되었다. 1945년 해방후 대한민국정부는 이를 그대로 계승하였다.

아직도 담배를 피우는 원시인이 있냐는 농담을 자주 듣는 요즘, 애연가들이 끽연의 즐거움을 즐길 장소도 점점 줄어든다. 예전에 담배에 대한 건강논쟁은 오히려 건강에 좋다는 것이었으나 지금은 온갖 질병의 원인으로 되었다. 우리의 전통 주거형태는 자연으로 열린 공간이어서 남이 피우는 담배냄새가 불쾌하기 보다 구수하게 느껴질 정도였고 지금보다 값이 상대적으로 비싸 건강을 해칠 만큼 막피워 댈 담배도 없었다. 그러나 요즘 서구식의 밀폐된 공간에서, 게다가 좁은 사무실에서 안그래도 텁텁한 공기를 먹고 지내야 하는 현대인에게 옆자리의 흡연은 고문이다.

직장생활을 하는 사람에게 금연이 흡연보다 승세를 굳혀가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우리의 담배 전체 소비량은 줄어들지 않는다. 청소년의 흡연이 급속히 증가하는 추세이기 때문이다. 가판대까지 만들어 청소년을 직접 공략하는 외제담배의 치열한 판매전은 지금이 아니라 내일을 보는 것이다. 인이 박힌 담배는 그 길들여진 기호때문에 담배종류를 쉽게 바꿀 수 없다. 무기상인과 함께 세계 2대 죽음의 상인인 담배상인은 우리의 미래를 노리고 있는 것이다. 초가집 대청마루의 곰방대 한 방은 상놈의 시름을 잠시라도 잊게 했지만, 닫힌 골방의 말보로는 우리 청소년의 몸과 마음을 시들게 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