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 갑신정변과 역사의 색맹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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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신정변과 역사의 색맹들

하원호(근대사 1분과)

1. 쿠데타와 변혁운동

우리 역사에서 군사력에 의한 정권 교체는 여러번 있었다. 고구려 연개소문의 군사반란, 고려 무신정권의 등장과정, 각 정치세력간의 연횡합종하는 양상이 너무나 요즘의 정치판과 닮아 인기 상종가를 누리는 [용의 눈물]의 이씨들의 반란, 그리고 현대 들어서는 박정희와 전두환의 쿠데타. 물론 백여년 전 1884년 김옥균의 갑신정변도 군사력을 동원했다는 측면에서는 이들의 군사반란과 닮았다. 전근대 사회의 군사반란은 지배계급내의 권력 교체다. 그 과정은 직접적으로 대중의 동의를 얻지 않았고, 실제로도 얻을 필요가 없었다는 점에서 근대사회로 진입한 이후의 쿠데타와는 질적으로 구별된다. 요즘처럼 YS가 죽을 쑤는 바람에 박정희의 유령이 돌아다니기 시작하고 또 그 예찬론자가 극성을 부리긴 하지만, 민주주의를 부정하면서 소수 군인집단의 권력독점을 위한 박정희나 전두환의 쿠데타가 전근대 봉건권력집단 내에서의 권력 이동과 같을 수는 없는 것이다.

갑신정변 역시 전근대사회의 군사변란이었다. 하지만 그 목적과 역사적 지향은 앞서의 반란과는 질적으로 다르고, 그래서 한국사에서의 수많은 군사변란 중 유일하게 변혁운동으로 규정되고 있다. 김옥균 등의 행위는 단순히 권력독점을 위한 욕망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당시 조선사회의 역사적 과제인 반봉건 반외세의 운동을 전개했다는 점에서 차원이 다르다.

2. 아래로부터의 길과 위로부터의 길

중고등학교의 교과서에도 실려있는 유명한 전봉준의 사진이 있다. 100년전의 흑백사진이라 선명하지는 못하지만 좌우로 호송하는 관리가 서있고 일종의 수레 같은 들 것에 앉아있는 그의 눈빛이 쏘는듯하다는 강렬한 느낌을 받는다. 이 사진은 체포되어서 서울로 압송되는 ‘서울로 가는 전봉준’으로 널리 알려져 왔으나 최근의 고증으로는 서울에서 재판을 받고 재판소에서 ‘감옥으로 가는 전봉준’을 일본인이 찍은 것으로 밝혀졌다.

전봉준은 김옥균과 함께 우리 근대사의 대표적 ‘혁명가’요, ‘풍운아’로 손꼽힌다. 그러나 이 두 거목은 출신성분이나 사회적 위치가 달랐고 따라서 그들이 주도한 변혁의 과정도 달랐다. 당시의 벌열가문 안동김씨 출신으로 고위관직에 있던 김옥균은 소수의 개화파를 이끌고 왕을 중심으로 한 중앙권력을 일거에 장악하려한 반면, 몰락한 시골양반 출신으로 훈장질로 겨우 끼니를 때우던 전봉준은 수많은 농민의 지지를 얻어 농민의 군대를 조직하고 끊임없는 싸움을 통해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려 했다. 요즘식으로 이야기하면 보다 대중적 지지를 받은 쪽은 전봉준인 셈인데 그래서 전해지는 설화나 민요에서 전봉준은 아직도 신화처럼 숨쉬고 변혁과정도 전봉준 쪽이 보다 드라마틱하다. 빛바랜 흑백사진 속에서 조그맣게 앉아있는 전봉준의 눈빛이 강렬하다는 인상은 이같은 역사적 사실이 사진의 뒷면에 그림자처럼 깔려 있는 탓이다.

그런데 전봉준 없는 농민전쟁은 어금니 두어개가 빠진듯 허전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그럭저럭 씹어 볼 수는 있는 가정이다. 실제로 인물로만 친다면 같은 농민군 안에서도 전봉준 보다 김개남이 더 낫다는 설도 있다. 전봉준 없는 농민전쟁이 가능한 이유는 이 사건이 우발적인 것이 아니라 당시의 사회에서 필연적으로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는 데서 연유한다. 세계가 변하고 사회가 변하는데도 여전히 지배계급은 수탈만 일삼고 피지배계급인 농민은 생존이 위협받는 상황에서 저항은 필연적이었다.

하지만 김옥균 없는 갑신정변은 꿈꾸기 어렵다. 지배계급내의 소수 관료들이 일으킨 쿠데타는 주동인물의 정치적 영향력이나 개인적 능력이 직접적으로 좌우하기 때문이다. 민중에 뿌리 내린 아래로부터의 변혁운동의 주도세력은 대중의 정치적 요구를 그대로 반영하지만, 갑신정변과 같은 위로부터의 변혁은 김옥균 개인과 그를 둘러싼 소수집단의 정치력에 기반하고 있어 반드시 대중적 요구와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갑신정변의 한계는 바로 여기에 있었다.

3. 갑신정변의 역사적 지향

조선후기 이래 사회적 생산력의 발전에 종래의 봉건적 생산관계는 질곡으로 작용했다. 이에 따라 봉건지배체제의 질곡에서 벗어난 새로운 근대사회의 건설은 조선사회의 당면과제였다. 더구나 1876년의 개항이후 세계자본주의 체제에 편입되면서 반외세의 민족문제 해결도 조선사회의 당면한 과제가 되었지만 오히려 당시의 집권세력이던 민씨 일족은 봉건모순을 완화시키기는 커녕 외세와의 결탁으로 자신의 정치적 지위를 안정시키려 했다.

이 같은 상황에서 김옥균을 비롯
한 개화파는 제한적이나마 자본주의 국가의 근대적 정치체제를 수용하면서 생산력의 발전을 통한 부국강병을 추구했다.

개화파는 정치체제면에서 봉건지배체제를 근대적 제도를 바꾸려는 시도를 했다. 개화파가 펴낸 『한성순보』에 실린 서구의 입헌정체와 헌번, 의회 운영 방식에 대한 기사는 그러한 지향을 보여준다. 그러나 입헌정체로의 지향이 현실정치에서 그대로 나타날 수는 없었다. 민중의 지지에 기반하지 못한데다가 봉권 문벌이 지배체제를 강고히 장악하고 있는 이상 군주권의 일정한 비호 아래에서만 개혁이 가능했으므로 군주 전제권의 완전한 폐기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그래서 그들은 우선 봉권권력구조의 타파에 초점을 맞추어 14개조 정강에서도 문벌폐지를 주장했고, 대신과 참찬이 회의하여 정령을 결정하도록 하는 등 전제군주제를 제한함으로써 근대적 정치체제의 기초를 마련하고자 했다.

경제적 측면에서 이들의 개혁은 생산관계의 근본적 변화, 토지개혁을 통한 혁명적 방식의 근대사회 건설이 아니라 기왕의 봉건적 개혁론의 연장에서 세제와 국가재정의 개혁을 주장했다. 개화파의 경제개혁은 생산력 발전에 초점이 두어졌던 것이다. 그들의 경제개혁은 봉건적 수탈을 줄여 농민의 생활을 안정시키는 한편, 국가재정을 튼튼히 하여 생산력 발전을 통한 근대 자본주의사회의 건설을 목표로 삼고 있었던 것이다.

김옥균의 반외세는 곧 반청이었다. 갑신정변 단계에서의 직접적으로 우리에게 압박을 가해온 쪽은 일본이 아니라 청국이었다. 갑신정변 실패 이후 청국이 원세개를 보내어 10년 동안 고종보다 더한 권력을 휘두르게 한 것은 김옥균의 외세인식이 옳았음을 그대로 보여준다.

그러나 역사이래 전래가 없는 무인이 아닌 문인출신이 한 쿠데타여서 인지 김옥균의 쿠데타는 군사력의 준비에서 지극히 미약해 일본 공사관의 얼마 안되는 병력을 기간 병력으로 삼았고 그래서 물리적으로는 이미 실패가 예견된 것이었고 결국 3일 천하로 끝나고 말았다.

요즘 박정희의 유령을 뒤집어쓴 인물들은 “혼란한 민주주의보다는 안정된 왕정이 낫다”는 식의 논리로 인류가 피나는 희생 끝에 이룬 민주주의를 부정하면서까지 박정희를 미화시키려 한다. 전근대의 쿠데타와 민주주의 사회의 쿠데타를 구별하지 못하는 역사의 색맹들이 활개치는 세상의 앞날은 그리 밝은 것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