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 비추어 본 오늘] 우리의 역사관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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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 비추어 본 오늘 #1
 

우리의 역사관은 무엇일까?


오종록(중세2분과)

긍정사관의 속에 들어 있는 알맹이, ‘영웅사관’

   지난해 우리 사회는 소위 ‘긍정사관’이라는 것을 표방하고 제작하여 교과서로 채택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제출한 책자 때문에 뜻하지 않은 몸살을 앓은 바 있다. 책자의 내용도 문제이거니와, 여러 규정이나 일정 등에 비추어 볼 때 이미 검인정교과서로 채택할 수 없다는 것이 명약관화해진 뒤임에도 교육 당국과 집권 정당 및 언론의 일부 세력 등이 그 책을 검인정교과서로 채택하고자 여러 편법을 동원하여 밀어붙인 것이 그 몸살의 원인이었다. 그런데 이 ‘긍정사관’도 역사관이라 할 수 있을까?


[사진1]  2013년 9월 10일 교학사『한국사』교과서 검토 설명회 현장  ⓒ한국역사연구회

   소위 ‘긍정사관’이라는 것은 일본의 우익세력이 과거 일본제국주의가 저지른 잘못을 반성하는 내용을 담은 교과서의 역사관을 ‘자학사관’이라 이름 붙이고 비난하면서, 그 반대편의 관점을 내세워 제시한 ‘사관’의 이름이다. ‘자학사관’이라는 것도 제대로 된 역사관에 끼지 못한다. 그런 까닭에 ‘긍정사관’이라는 것 또한 역사관이라 하기에는 낯부끄러운 수준이다. ‘역사관’이란 역사가 어떻게 발전해 왔다고 보는가, 그 근본 동력은 무엇이라고 보는가를 중심으로 하는 역사에 대한 관점이다. 이에 비추어 볼 때, ‘자학사관’은 물론이고 ‘긍정사관’이라는 것 또한 학문적 수준을 갖춘 사관이 되기 어렵다는 것은 그 용어 자체에서 이미 드러나 있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서 위와 같은 일이 벌어지는 것을 역사적으로 사고한다고 할 때, 그때 가장 중요하게 여겨야 할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다른 것보다도 ‘왜 우리 사회에서 이러한 일이 벌어질 수 있을까’라는 측면이다. 역사학은 현재의 원인을 구명하는 것을 임무로 하는 학문이다. 그러므로 어떻게 말도 안 되는 ‘긍정사관’을 표방할 수 있는지, 그것을 담은 책을 어떻게 교육 당국이 교과서로 채택하려 할 수 있는지, 그리고 무엇보다도 대다수 국민들은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어도 그것이 대단이 중대한 일이라는 것을 모를 수 있는지 해명하는 것이 모두 역사학이 해야 할 일들이다. 다시 말해서 앞의 일들을 비난하는 것만으로는 원인을 제대로 밝힐 수 없고, 따라서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도 없다. 물론 위의 일들이 벌어지는 원인을 역사적으로 구명하는 일은 꽤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일이기도 하다.

   이 가운데 이 글에서는 왜 “대다수 국민들은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어도 그것이 대단히 중대한 일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할까?”와 관련된 것으로 소위 ‘긍정사관’이라는 것의 핵심 가운데 하나가 ‘영웅사관’이라는 점을 생각해 보기로 한다. ‘이승만 미화’니, ‘박정희 미화’니 하는 것들이 사실은 다 ‘영웅사관’에서 나온 것들이다. 그런데 이 ‘영웅사관’은 우리에게 너무나 친숙하고, 또 많은 사람들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데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갑골문자의 발견과 역사관

   갑골문자가 발견된 과정을 흥미롭게 묘사한 내용을 다음에 소개한다.

  1899년 어느 여름날, 작가이자 학자인 유악(劉鶚)이 북경(北京: 베이징)의 달인당(達仁堂)이라는 중국 약방에 학질(瘧疾)에 걸린 친구 왕의영(王懿榮)을 위해 약을 지으러 갔다. 그는 그곳에서 중국 사회가 오랜 동안 약재로 사용해온 용골(龍骨)의 뼈 위에 한자(漢字)로 추정되는 글자가 새겨져 있는 것을 보고 크게 놀랐다. 왕의영의 열이 조금 내리자 왕의영과 유악 두 사람은 북경 시내의 여러 중국 약방을 다니면서 용골을 하나하나 살피고 다녔다. 그 결과 두 사람은 모양이 기괴한 옛 문자 1,058개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당시 이 문자에 대해 아는 이는 전혀 없었다.

북경의 여러 중국 약방에서 사용하는 용골의 출처는 하남성(河南省) 안양현(安陽縣)의 소둔촌(小屯村) 일대였다. 이곳은 은(殷)의 후반기 제 19대 왕인 반경(盤庚) 때부터 제 30대 왕인 주왕(紂王)까지 8세(世) 12왕 약 280년간의 왕도(王都)였던 곳으로, 이미 한대(漢代)부터 이곳을 은의 유허(遺墟)라는 의미로 은허(殷墟)라고 불렀었다. 은이 멸망한 기원전 1027년 이후 원수(洹水)의 강물이 범람하여 황토가 은허 위를 두텁게 뒤덮은 상태에서 3천년 가까운 시간이 흐른 뒤에야 이곳에 묻혀 있던 은 시대의 갑골문자(甲骨文字)가 비로소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서기 500년 무렵부터 소둔촌 지역의 주민들은 용골을 캐내서 여러 중국 약방에 내다 팔아 왔으나, 그 뼈 위에 새겨져 있는 것이 먼 옛날의 문자라는 사실을 깨닫기까지도 1천 400년이라는 긴 시간이 걸렸던 것이다.

금석문(金石文)에도 상당한 조예가 있는 학자로서 국자감(國子監)의 제주(祭酒) 직책을 맡고 있던 왕의영은 재산을 기울여 많은 용골을 사들여서 본격적인 갑골문 연구에 착수하였다. 그러나 그는 1900년 의화단운동(義和團運動)이 일어난 데 대한 책임 문제로 자살하였다. 이에 따라 그의 식객이던 유악이 왕의영의 유품을 인수하여 연구를 진행하여 자신의 갑골문자에 대한 저작을 1903년『철운장귀(鐵云藏龜)』라는 이름의 책으로 간행하였다. 이 책은 한자를 창힐(倉頡)이 창제한 것으로 굳게 믿고 있던 중국 천하를 놀라게 만들었다. 이어서 1928년 드디어 소둔촌의 발굴이 시작되었다. 이 발굴은 은 왕조의 여러 왕릉과 그 안에 묻혀 있던 유물들을 확인하는 성과로 이어져, 중국의 고고학계에서 이룬 성과 가운데 가장 의미가 큰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상 소개한 내용은 꽤 박진감이 있으나, 정확한 사실(史實)은 아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왜 잘못된 것일까? 우선 갑골문자가 19세기 말엽에 이르러서야 알려진 것은 옳으나, 1899년 비로소 알려졌다는 것은 사실과 다르다. 갑골문자는 1899년보다 앞서 농민들에 의해 소둔촌 농경지에서 발견되었고, 이와 함께 청동기, 옛날 돈, 옛날 거울 등이 출토되어 전문적인 골동품 상인들에 의해 비교적 고가로 팔리고 있었다. 둘째로, 19세기 말엽 당시 갑골문자에 대해 알고 있던 사람은 왕의영과 유악 두 사람에 국한되어 있지 않았다. 왕의영보다 앞서 갑골을 사들인 금석학자도 있었고, 왕의영 이후에도 북경과 천진(川津), 상해(上海) 등의 대도시에서 몇몇 금석학자가 갑골을 사들였으나, 북경에서 군사 지휘관 직책인 단련대신(團練大臣)을 맡고 있던 왕의영이 풍부한 자금력으로 비싼 값에 대량으로 갑골을 사들이자 그가 갑골문을 연구하는 대표적 금석학자로 유명해지고, 나아가서는 명성을 독점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셋째로, 유악이 왕의영의 유품을 인수하여 연구를 진행하여 자신의 갑골문자에 대한 저작을 1903년『철운장귀』라는 이름의 책으로 간행함으로써 비로소 한자를 창힐이 창제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나아가 1928년 드디어 소둔촌의 발굴이 시작되는 이유로 작용하였다는 것도 정확한 사실이 아니다. 다만 유악이 1903년『철운장귀』를 간행하였고, 이로써 갑골문 연구에 한 획이 그어지게 되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이미 오랜 금석학의 전통이 있었고, 그것을 바탕으로 여러 금석학자가 갑골문자에 관심을 가져 수집과 연구를 진행하였으며, 유악의 철운장귀 또한 그 위에서 나온 성과물이었다. 그러므로 대부분의 중국인은 이때까지 한자를 창힐이 창제하였다고 알고 있었더라도, 금석학자들은 이미 ‘창힐이 한자를 창제하였다’는 것은 사실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한편 은허 지역은 갑골문자와 여러 골동품이 출토되고 그 값이 비싸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농민과 지주, 골동품상들에 의해 대대적인 발굴이 이루어져 말 그대로 폐허가 되고 말았다. 그 결과 국민당 정권에 의한 1928년부터의 발굴은 뒷북을 치는 꼴이 되었다.

   이처럼 갑골문자의 발견은 중국 사회가 장기간에 걸쳐 쌓은 문화적 역량을 바탕으로 여러 사람의 노력과 욕망이 작용하여 이룬 사회적 성과였다. 이것이 역사적 진실이다. 그럼에도 갑골문자의 발견을 우연의 작용 속에 한두 사람의 성과로 규정하는 것은 다름 아닌 영웅을 만들려는 의도적인 조작이다.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왕의영과 유악 두 사람만이 갑골문자와 그 가치를 처음 발견한 공로자인 것처럼 서술하고 있는 책이 적지 않다는 점이다. 그것에 더해 그 공을 세우는 과정이 드라마틱하게 서술되기까지 한다. 이처럼 영웅사관은 사회 전체가 이룬 공로를 몇몇 개인이 독차지하는 것을 합리화하는 관점이자 담론이다. 그리고 자본주의사회 특히 신자유주의의 지향과 궁합이 잘 맞는 사관이다.

 우리에게 너무나 친숙한 영웅사관

   영웅사관은 위대한 영웅이 역사의 전개를 좌우한다는 관점을 말한다. 이 관점은 근대 역사학이 정립한 이후로 ‘중세의 교훈적 역사 인식’을 계승하면서 ‘비역사적 인식’을 야기하는 심각한 문제점이 있는 것으로 비판되어 왔다. 예를 들어, 김부식은『삼국사기』의 ‘을지문덕’전에서 고구려가 수(隋)의 대군을 물리친 것은 오로지 을지문덕 개인의 힘이었다고 서술하였는데, 역사 속에서 그와 같은 일은 일어날 수 없다.


[사진2]  고구려 유적 백암성  한 사람의 영웅이 만들기에는 너무 커다란 성이 아닌가?  ⓒ한국역사연구회

   학자들은 을지문덕이 산성 중심의 고구려의 방어체제와 청야책, 수 군대의 군량 공급선이 멀어지게 만들고 거짓으로 패배하며 깊숙히 유인한 전술 등이 성공하여 승리를 거둔 것으로 판단한다. 이 가운데 고구려의 산성 중심 방어체제는 몇백 년에 걸쳐 많은 주요 요충지에 산성을 쌓아 이룬 것으로, 많은 군인과 백성의 피와 땀이 이룬 성과이다. 또 청야책은 적이 현지에서 양식을 얻을 수 없도록 들판을 깨끗이 치우고 모두 산성 안에 들여놓는 계책으로, 이를 위해서도 많은 사람의 노력이 필요하다. 그럼에도 김부식이 ‘오로지 을지문덕 개인의 힘’이라 하여 영웅사관의 관점에서 서술할 수 있었던 까닭은 ‘영웅적인 인물이 역사를 창조한다’는 생각이 전근대사회 당시에는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던 데 있다. 그러나 근대사회가 전개되는 과정에서 역사와 문화의 발전이 한 개인의 힘만으로는 불가능하고 사회 구성원 전반의 활동 결과가 역사라는 생각이 굳건해지면서, 역사학 내부에서는 영웅사관의 의미와 가치를 부정적으로 평가하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 사회의 현실에서는 역사학에서 전개된 것과는 전혀 다른 양상이 영웅사관과 관련하여 벌어지고 있다. 몇 명의 천재만 있으면 대한민국 국민 전체를 부유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할 것이며 누구누구가 그러한 사람일 것이라고 언론이 나서서 호들갑을 떨었던 것, 그것이 바로 영웅사관이다. 그 말을 그대로 믿고 사회 전체가 들떠 흥분하였던 것은 사회 전체가 영웅사관에 매몰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러한 일이 벌어졌던 때가 지금으로부터 그리 먼 옛날이 아니다.

   우리가 본격적으로 영웅사관에 접하기 시작한 것은 20세기 초엽부터이다. 대한제국이 외교권을 상실하고 일본이 설치한 통감부의 통제를 받는 상황에 들어가자 나라가 멸망할 것이라는 위기감이 사회를 압도하였다. 이러한 위기에서 벗어날 길을 찾으려는 절박함은 민중에게서나 지식인에게서나 큰 차이가 없었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영웅의 출현을 갈망하는 심리도 생겨났고, 그것이 역사 서술에 투영되어 을지문덕, 최영, 이순신 등 ‘민족을 위기에서 구한 영웅들’의 전기가 간행되었다.『이태리삼걸전』과 같은 해외의 영웅 전기도 이 시기에 소개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일들이 가능했던 것은 한편으로는 전근대의 역사인식을 극복하지 못하였던 때문인데, 어쨌든 이로부터 근대사회가 시작된 뒤에도 영웅사관이 여전히 대중 속에 이어져 올 수 있었다.

   사실 우리의 근대사회 초기에 뿌리를 내린 영웅사관은 그 사고방식 자체가 해외로부터 들어온 것이었다. 그렇지만 영웅사관의 내용은 당시 사람들에게 그다지 낯설지 않았다. 그 까닭은 기존의 왕조사회에서의 역사인식과 결이 거의 같았던 데에 있었다. 아마도 인류의 역사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영웅들의 활약상이 전개된 것은 고대사회가 형성될 무렵일 것이다. 그리스와 로마의 신화 속에 나타나는 반은 신이고 반은 사람이거나 아니면 신이 적극적으로 뒤를 받쳐주는 가운데 활약한 것으로 전해지는 영웅들의 모습은 우리에게도 잘 알려져 있다. 그런데 그러한 영웅들의 이야기 이면에는 고대 노예제 사회의 형성 과정이 자리를 잡고 있다는 사실도 잘 알아 둘 필요가 있다. 중요한 모든 일은 영웅들이 다 하였다고 생각하였으므로, 영웅적인 존재들이 지배하는 것도 당연한 일로 여겨졌다.

   우리의 고대사회 형성 시기의 역사에서는 영웅적인 모습을 주몽과 같은 존재에게서 찾을 수 있는데,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영웅들에 비하면 그 수가 매우 적다. 그러나 그 한편 우리의 고대 역사에서는 노예제가 잘 발달하지 못하였다는 사실도 마찬가지로 잘 알아 둘 필요가 있다. 고대사회의 신비스러운 능력을 발휘한 영웅의 이면에는 수많은 노예가 있었던 것이다.

   고대사회가 형성된 이후 고대 왕국에서 중세 왕국으로 발전하며 역사가 전개되는 가운데, 우리는 중국의 문화로부터 큰 영향을 받으며 우리의 문화를 형성하여 왔다. 특히 중국의 유교와 성리학은 나름대로 합리적인 판단을 요구하고 있었다. 그러나 새 왕조를 개창한 왕건이나 이성계와 같은 인물들에 대해서는 주몽에 비해 신비스러운 능력의 농도가 좀 옅어졌을 뿐 역시 부처님이나 하느님의 가호 아래 보통 사람은 할 수 없는 일을 해낸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그 후손들이 왕위를 계승하고, 또 공신들도 그 후손들이 공신의 지위를 계승하였다. 즉 왕조사회의 영웅사관은 특권과 세습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역사적 관점이었다. 이러한 영웅사관이 우리에게 너무나 친숙하다는 것 자체가 전근대적 특권과 세습신분제를 용납하지 않는 근대사회로 접어들었음에도 우리 사회에서 전근대적 특권과 사회경제적 지위의 세습이 용납되는 문화적 바탕이다.

여러 가지 역사 전쟁

   우리 사회에서 언제인가부터 ‘역사 전쟁’이라는 말이 등장하였다. 대체로 이웃 국가들과 벌어진 역사 소유권 분쟁을 ‘역사 전쟁’이라 한다. 이와 관련하여 주요 언론에 소개된 것들은 먼 옛날에 존재했던 국가의 역사가 현존하는 국가와 민족 중 누구의 소유물인가를 따지는 내용이 중심을 이루었다.

   과거 어느 지역에서 존재했던 역사를 어떤 사람들이 이루어냈는가를 밝히는 일은 매우 중요하고 의미 있는 작업이다. 그렇지만 그것과 그 역사가 현존하는 국가나 민족 중 누구의 것일까를 밝히는 일은 서로 관련은 있으나 동일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대부분의 사람들은 알지 못한다. 이 두 가지를 혼동하는 것도 문제이기는 하나, 문제가 심각한 것은 역사 소유권 다툼에 여론의 초점이 맞추어지다보니 많은 사람들이 역사를 누군가가 소유하는 것이 당연한 일인 양 생각하게 된다는 데에 있다.

   많은 사람들이 개인이나 소수가 역사를 소유할 수 있다는 생각은 그 유래가 대단히 길다. 우리 역사에서 보면, 고대국가가 수립된 이래로 왕권이 미치는 공간은 물론이고 시간도 국왕이 소유하여 지배하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따라서 역사도 당연히 국왕이 그 주인이었다. 다만 역사를 실제 서술하는 것은 관료들이었기에 지배층은 자신들이 역사의 사실상의 주인이라 자부할 수 있었다. 이러한 관념은 유교문화가 성숙해 가면서, 이어서 새로운 단계의 유교인 성리학이 수용되어 발달하면서 더욱 치밀하게 다듬어졌다. 그리고 우리 역사에서 이러한 관념이 지속된 기간이 대단히 길었던 까닭에 근대 역사학이 시작된 뒤에도 그 관념이 쉽게 불식될 수 없었다.

   세계는 지금 역사 전쟁을 겪고 있다. 이 역사 전쟁은 우리가 아는 역사 전쟁과 달리 역사관의 충돌에 의해 벌어지고 있다. 사회주의권이 붕괴된 마당에 무슨 역사관의 충돌이냐, 헛소리 하지 말라고 할 사람도 있겠지만, 뒤에서 보는 바와 같이 세계 최첨단의 자본주의사회인 미국에서도 이 전쟁은 벌어지고 있다.

   어느 시사 주간지에 실린 기사를 보면, 지난해 초 미국에서는 인터넷에서 대량으로 정보를 무료로 내려 받을 수 있는 기술을 개발하여 보급하는 ‘오픈액세스’운동을 주도해 유명해진 스워츠라는 천재 청년이 자살한 사건이 벌어져 사회적 이슈로 부각되었다. 해킹과 컴퓨터 사기 등의 혐의로 체포되어 유죄로 결정되면 최대 징역 35년에 벌금 100만 달러에 처해질 중범죄자로 검찰에 의해 기소되었다가 보석으로 풀려난 뒤 자살한 것이다. 그런데 피해 당사자로 지목된 학술 전문 데이터베이스 업체인 JSTOR이 이 청년에게 어떠한 민사상의 책임도 묻지 않겠다고 성명을 발표한 상태에서 검찰이 그를 기소하기 전에 그에게 유죄를 인정하면 징역 6개월 형의 혐의로 기소할 수 있다고 협상을 제안했다는 것이 알려져 사회적 논란이 증폭되었다는 것이다.

   논란의 핵심은 이 청년이 2010년에 일리노아주립대에서 강연한 내용으로부터 파악할 수 있다. “미국의 중요한 대학 학생이 된 덕분에 여러분 모두는 온갖 종류의 학술 정보에 손쉽게 접근할 수 있다. 미국의 주요 대학은 다  JSTOR같은 학술 전문 데이터베이스에 약정금을 내고 무제한으로 접근할 수 있는 권한을 확보해 두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를 들어 인도의 대학에 다니는 학생이라면 이런 정보를 쉽게 접할 수 없다. 인류의 유산이라 할 막대한 학술적 연구 성과에 대한 접근이 철저히 차단되는 셈이다. 인류 모두가 공유해야 할 소중한 정보가 기업의 이윤 추구 대상으로 전락해 버렸다. 이런 현실을 바꿔 누구나 정보에 접근할 수 있도록 하자는 운동이 ‘오픈액세스운동’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오픈액세스운동이 담고 있는 역사관과 미국 검찰이 지키고자 하는 역사관이 정면으로 충돌하였음을 볼 수 있다. 앞의 것이 현대 문명을 인류 공동의 노력에 의해 성취한 결과로 보고 따라서 그 공유를 주장하는 것인 데 반해, 뒤의 것은 소수의 유능한 인재들이 현대 문명을 일군 것으로 보고 따라서 그 성과를 소수가 사적으로 소유하는 것이 옳다고 보는 역사관인 셈이다. 그리고 앞의 역사관은 그 타당성에도 불구하고 법과 제도에 의해 통제를 받는 반면에, 뒤의 역사관은 그 부당성에도 불구하고 법과 제도에 의해 보호받는 것은 물론이고 나아가서는 그 운영자들에 의해 법과 제도가 정한 범위를 넘어서서 적극적으로 보호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일들이 더 심하게 벌어지고 있는 것이 우리 사회이다.

   우리의 시사 주간지에서 소개한 내용에서도 또 미국 현지에서의 상황 전개에서도 역사관의 심각한 대립과 충돌이 벌어졌다는 사실은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다가 마지막 결론에 이르면 어느덧 천재 청년의 죽음을 아쉬워하는 쪽으로 내용이 수렴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은 무엇을 나타내는 것일까? 나는 이것이 미국이나 우리나 사회의 분위기가 여전히 소위 신자유주의시대 동안 확산된 자본에 대해 초월적 특권을 부여하는 문화에 젖어들어 있는 데서 말미암는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문화에는 역사관으로서 영웅사관이 작동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눈치 채지 못하는 사이에 그들의 머리와 가슴 속에 스며든 영웅사관이 작동하고 있고, 그것이 많은 사람들의 정념을 다른 중요한 사실들보다도 ‘천재의 죽음’을 중요하게 여기도록 하는 쪽으로 몰아가고 있는 것이다.

왜 우리는 영웅사관에 둔감할까?

   이제까지 설명한 것처럼, 영웅사관은 우리만이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문제가 되어 있다. 다만 우리 사회에서 영웅사관이 일으키는 문제점이 다른 사회들보다 더 증폭되는 측면이 있을 뿐이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나, 역시 앞서 설명한 것과 같이 영웅사관이 전근대적 속성이 해소되지 않은 우리의 문화와 결합한 때문이다.

   사회 전반이 근대 자본제사회의 내용을 갖추었다고 해서 전근대사회의 속성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전근대적 속성의 사회적 관계는 근대적 관계의 힘에 눌려 사회 주변부에서 남모르게 작동하는 것이 정상일 것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서는 1997년의 외환위기를 겪은 이후로 전근대적 사회관계가 사회의 중심부에서조차 종종 작동하는 반동적 양상이 나타났다. 흔히 계약서에 ‘갑’과 ‘을’의 난에 서명하는 것을 가져다 써서 ‘갑을관계’라는 말로 포장을 하여 마치 모두가 근대적 계약관계인 것처럼 생각하게 만들지만, ‘갑을관계’의 내면에 전근대적 속성이 뚜렷한 경우가 적지 않은데, 이 ‘갑을관계’가 그 예에 해당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영웅사관이 작종하여 일으키는 여러 문제에 대해 너무나 둔감하다. 중요한 점은 바로 이것이 영웅사관이 지닌 힘이라는 사실이다. 누구나 영웅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가정하고 생각하면, 영웅사관은 대단히 매력적이다. 현실에서는 누구나 영웅이 될 수는 없으나, 가공의 세계에서는 누구나 영웅이 될 수 있다. 여러 영상매체가 발달한 요즘 세상에서는 누구나 영웅이 되는 가상의 경험을 심지어는 3D 영상을 통해서 생생하게 즐길 수 있다. 역사를 올바로 공부한 사람들이라면 이러한 영상매체 때문에 영웅사관에 젖어들지는 않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이 영웅사관과 무슨 관련이 있는 지도 모르고, 심지어는 영웅사관이라는 것이 있다는 사실조차도 모른다.


[사진3]  영화 “슈퍼맨 – 맨 오브 스틸(2013)”의 메인 포스터  미국 헐리우드가 탄생시킨 영웅 슈퍼맨. 영화 속 영웅 슈퍼맨은 지구 평화 수호에 언제나 바쁘시다던데…  ⓒDaum 영화 정보 제공 페이지

   소위 지식기반사회로 접어들면서 자본은 영웅사관의 필요성을 더 절실히 느끼고 있다. 정치권력이 영웅사관을 필요로 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러한 사정 속에서 영웅사관이라는 지배이데올로기의 한 부분은 사람들이 눈치 채지 못하게 숨어서 활동하고 있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교과서에 출현함으로써 이 글을 쓰게 만들고 말았다.

   노인들이 ‘경부고속도로는 박정희대통령이 만들었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을 젊은이들도 아마 들은 적이 있을 것이다. 사실 노인들은 그런 식 보다는 대개 ‘경부고속도로는 박정희가 만들었다’라는 식으로 말한다. 이것은 김부식이『삼국사기』에서 고구려가 수 나라가 침입하여 일어난 전쟁에 승리한 것이 오로지 을지문덕의 공이라 하였던 것과 별로 다르지 않다. 이러한 말 속에서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하다 죽은 노동자의 공헌도 사라지고, 공사가 가능하도록 세금을 냈던 국민들의 기여도 사라진다. 여기에서 우리가 얼마나 영웅사관 속에서 살고 있는지 다시금 알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