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박물관] 비행기는 추락했으나 나는 아직 추락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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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기는 추락했으나 나는 아직 추락하지 않았다
-자유로 상징되는 하늘의 의미를 안 사나이, 안창남-

박한용(근대사 2분과)

  도쿄 교외에 비행기가 추락해 있다. 진흙투성이로 뒤집혀진 비행기 사이로 한 사내가 보인다. 이 비행기를 조종한 사내, 바로 안창남이다. 1920년대 “떴다 보아라 안창남 비행기, 내려다 보아라 엄복동 자전거” 라는 유행가마저 등장시켰던 안창남이 도대체 무슨 사연으로 이렇게 추락한 것일까. 추락 비행기의 조종사로서 유달리 당당

해 보이는 그의 모습과 눈빛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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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출처 : 일본의  {역사사진} 1923년 8월호.

  오쿠리비행학교 시절의 안창남

   1923년 6월 22일은 일본의 정치가 호시 토오루(星亨)가 비명횡사한 지 23주기가 되는 날이었다. 호시 토오루는 일찍이 영국에 유학하고 와 일본 최초의 변호사가 된 인물이다. 그 후 자유당에 입당해 대의사(代議士)가 되었으며. 1892년 일본 중의원(衆議院) 2대 의장이 되었다가 뇌물수수 의혹으로 중의원에서 제명당하였다.

  토오루는 대한제국의 법률 고문 등을 맡아 우리와도 달갑잖은 인연이 있기도 하다. 나중에는 정적이었던 이토 히로부미가 주도한 내각과 입헌정우회(立憲政友會)에도 참가했고, 도쿄 시의회 의장 재직 중인 1901년 일본의 검도가에게 암살당했다.

   그런 호시가 죽은 지 23년이 되어 평소 그를 경모하던 일본의 정객들과 유지들이 모여 이날 오전 10시 그의 묘소에 참배하고 이케카미혼몬지(池上本門寺)에서 대대적으로 추모법회를 열었다.

  이와 동시에 호시의 ‘위업’을 널리 알리고자 삐라를 십만 장 인쇄 제작하여 도쿄 상공에서 뿌리기로 한 것이다. 이들은 동경 스사키 해변에 있던 민간항공회사인 오쿠리(小栗)비행학교에 이 작업을 의뢰하였고, 오쿠리비행학교의 ‘신진비행사’ 안창남(安昌南)이 이 일을 맡은 것이다.

  이때 안창남은 1921년 4월부터 오쿠리비행학교의 교수로서 후진들에게 비행술을 가르치고 있었다. 1920년 8월 이 비행학교에 입학한 안창남은 입학 두 달 만인 10월 15일 오쿠리 교장이 ‘아사히버선’ 광고지 20만매를 토쿄 시내에 뿌릴 때 일본인 연구생을 제치고 그의 조수로 비행기에 동승하기도 했다.

  남들은 1,2년이 걸리는 졸업과정을 불과 3개월 만에 마친 그는 학교 측의 간곡한 권유로 비행학교 교수가 되었고, 교수가 된 지 한 달 만인 5월 일본에서 처음 시행된 비행사 면허시험에 응시해 일본의 일류비행사들을 제치고 일본인 한 사람과 함께 가장 먼저 합격했다.

  안창남은 성격 또한 대담하여 3등 비행사에게는 허용되지 않는 곡승비행(곡예비행)을 하다가, 당시 경시청과 항공국에 의해 몇 차례 경고를 받기도 했다. 1922년 11월 6일 안창남은 창고 속에 버려두었던 폐기와 다름없는 비행기를 몰고 나와 일본제국비행협회가 주최한 토쿄-오사카 간을 왕복하는 우편 비행대회에 참가하여 우수상을 차지했다.

  또 호시 추모비행을 하기 이십 여일 전에는 일본 전국민간비행경기대회에서 불완전한 비행기를 타고 나가 2등상을 탔다. 요컨대 민간 비행사로서 그의 천재성과 재능은 일본에서도 주목받고 있었다. 그것도 언제나 고장의 위험을 안고 있는 불완전한 비행기로.

  2년만에 실현된 고국방문비행

  일본에서도 이러할진대, 고국에서 안창남은 이미 영웅이었다. 일본인 교장과 함께 비행기를 타고 도쿄 상공에 전단지를 날린 것이 『개벽』지에 실리기도 했고, 1921년 11월 조선의 유지들은 안창남 후원회를 조직하여 비행기 구입을 위한 2만원 모금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고국의 상공을 날고 싶다는 안창남의 소망에 맞추어 국내에서는 몇 차례 고국방문비행을 추진되었다. 물론 이런 움직임은 일제의 방해 등으로 성사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의 활약상이 신문에 보도될 때마다 사람들은 눈을 크게 뜨고 기사를 읽었고, 그가 조국의 하늘 위를 나는 것을 간절히 보고 싶어 했다.

  마침내 온갖 곡절 끝에 안창남의 고국방문기념 비행시범은 실현되었다. 1922년 12월 10일 무려 5만 명의 관객이 모인 여의도비행장에서 안창남은 공중비행 시범을 보였다. 자신이 직접 부속을 조립하여 만든 복엽기 금강호를 타고 악천후를 무릅쓴 채 곡예비행을 전개하면서, 식민지의 설움을 파란 하늘에 씻었다. 이어 14일에는 서울과 인천을 왕복하는 시범을 보이기도 했다.

  그의 고국방문비행은 1920년 『개벽』 12월호에 조국의 하늘에서 자신의 비행술을 선보이고 싶다는 밝힌 지 2년만의 일이었다. 1913년 8월 29일 일본 해군의 기술 장교 나라하라가 ‘국치일’에 맞춰 용산 일본군 사령부 연병장에서 비행시범을 보이며, 일본의 기계문명을 과시하고 모욕과 협박을 가하였던 공개적인 시위행사로부터 10년만의 일이기도 하다.

  나는 추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국내에서 비행학교를 내어 후진을 양성하고 싶다는 안창남의 소망은 실현되지 못했다. 모금활동이 부진하여 비행기를 마련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조선인을 위한 조선인에 의한 비행기 한 대 없는 고국’을 뒤로하고, 안창남은 다시 일본으로 돌아갔다. 일본에서 안창남은 비행학교에서 일하는 한편, 비행대회에 출전하기도 하다가 호시를 추모하는 전단 뿌리기 일을 맡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날의 비행은 순조롭지 않았다.

  안창남은 삐라를 실은 비행기를 몰고 이케카미 상공을 날았다. 그러나 갑자기 기체에 고장이 나서 누가니하치만(根方八幡)의 진흙밭 속으로 추락하고 말았다. 바퀴와 프로펠러 등 기체는 온통 진흙창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다행히 그는 무사했다. 뒤집어진 비행기에서 나온 안창남을 사진기자가 촬영을 하자 그는 의연하게 자세를 취했다. 여기 올린 사진이 바로 그것이다.

  뒤집어져 배를 하늘로 내어놓은 비행기와 달리 그는 마치 비행대회에서 우승한 것처럼 당당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눈매는 더욱 빛나고 입가에는 미소마저 띠고 있다. 그는 아마도 이렇게 외친 것은 아닐까.

“비행기는 추락했어도 나는 추락하지 않았다!”

  이 사생을 넘나든 비행 두어 달 후인 9월 안창남은 고국에 섬뜩한 소식을 다시 한 번 전한다. 관동대지진으로 일어난 조선인 대학살 사건으로 안창남이 살해되었다는 소식이 국내 신문을 통하여 알려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름 뒤 무사하다는 소식과 함께 그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났음이 판명되어 많은 사람들이 안도하기도 했다.

  망명, 그리고 항공독립군을 조직하려 하다

  민족의식이 강했던 안창남은 마침내 망명을 결행했다. 1924년 10월 고국에 귀국했다가 이듬해 1월경 일본 경찰의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서 동지인 김동철과 함께 만주를 거쳐 상해에 도착하였다. 안창남은 제일 먼저 상해임시정부 등과 접촉하여 비행사의 양성을 통해 항공독립군을 구성하겠다는 자신의 구상을 밝혔다.

  그러나 사무실조차 간신히 유지하는 당시 임시정부의 상황으로서는 불가능하였다. 안창남은 다시 북경으로 건너가 조선청년동맹이란 조직에도 가입하여 활동하다가, 군벌 염석산(閻錫山) 휘하의 산서(山西)항공학교 교장 겸 항공중장으로 연습생을 육성하였다.

  그러나 그는 독립운동에 더 큰 관심을 가져 조선인 청년들을 중심으로 대한독립공명단을 비밀리에 조직했다. 이들을 중심으로 비행사관학교를 설립하여 여기서 배출되는 비행사를 통해 조국독립투쟁을 전개하겠다는 계획이었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 공명단 단원들이 국내로 잠입하여 총독부의 우편자동차를 습격하는 거사를 벌이기도 하지만, 일경에게 모두 체포되고 말았다.

  공명단을 기초로 항공독립군을 이루겠다는 안창남의 꿈은 커다란 시련에 부닥쳤다. 그리고 1930년 4월 2일 그 또한 뜻하지 않은 비행기 추락사고로 죽으면서 조선인 항공독립부대의 꿈은 끝내 실현되지 못하였다. 그의 나이 서른 살, 너무나 짧고 아까운 인생이었다.

  자유로 상징되는 하늘의 의미를 안 사람

  안창남은 당시 일본인들이나 몰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던 비행기를 조선인들도 몰 수 있다고 강변했다. 그리고 자신이 직접 그것을 입증했을 뿐 아니라 국내에 비행학교를 만들어 후진들을 키우고자 했다. 나아가 중국 망명지에서 비행독립군을 양성해 조선해방의 선봉이 되고자 했다.

  그것은 일시적인 흥분도 아닌 오랜 그의 구상이자 간절한 염원이기도 했다. 1922년 12월 그는 식민지가 된 고국의 하늘을 날면서 서울과 인천을 내려다보면서 느꼈던 자신의 격정을 『개벽』지에 글로 발표했다. 오늘의 우리에게도 뜨겁게 와 닿지 않는가!

경성의 하늘! 경성의 하늘!
내가 어떻게 몹시 그리워했는지 모르는 경성의 하늘! 이 하늘에 내 몸을 날릴 때 내 몸은 그저 심한 감격에 떨릴 뿐이었습니다.
경성이 아무리 작은 시가라 합시다. 아무리 보잘 것 없는 도시라 합시다. 그러나 내 고국의 서울이 아닙니까. 우리의 도시가 아닙니까.
장차 크게 넓게 할 수 있는 우리의 도시, 또 그리할 사람이 움직이고 자라고 있는 이 경성 그 하늘에 비행기가 나르기는 결코 1,2차가 아니었을 것이나 그 비행은 우리에게 대한 어떤 의미로의 모욕, 아니면 어떤 자는 일종 위협의 의미까지를 띤 것이었습니다.
그랬더니 이번에 잘하나 못하나 우리끼리가 기뻐하고 우리끼리가 반가워하는 중에 우리끼리의 한 몸으로 내가 날을 수 있게 된 것을 나는 더할 수 없이 유쾌히 생각하였습니다.
(안창남, 「空中에서 본 京城과 仁川」 『개벽』 1923년 1월호)

  제국주의자들의 “모욕의 비행” “위협의 비행”으로 더렵혀진 조선의 하늘을 “잘하나 못하나 우리끼리가 기뻐하고 반가워하는 중에 우리끼리의 한 몸으로” 날아보려던 안창남이야말로 진정 자유로 상징되는 하늘의 의미를 아는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