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박물관] 민족자결주의에서 ‘자유’선거까지 (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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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자결주의에서 ‘자유’선거까지 (II) : 반탁과 민족자결

(죄송합니다. 담부턴 개기지 않겠습니다. 꼭 2-3주에 한번 꼴로 올리겠습니다!)

남한점령 미군최고사령관으로 하여금 ‘무리한 유권해석’(왜냐하면 대서양헌장의 어느 구석에도 연합국의 ‘거대구상(=신탁통치)’에 저항권(반탁운동)을 행사할 수 있다고 규정한 곳은 없으니까!)을 하게끔 만들었던 것은 뭐니뭐니 해도 신탁통치 문제때문이었다. ‘후견’이다, ‘신탁’이다를 두고 용어싸움이 벌어졌지만 결국 핵심은 ‘참견과 자결’의 다툼이었다. 모스크바 삼상결정의 내용을 두고 벌어진 이 싸움에서 표면적으로 그리고 역사적으로는 ‘자결파’가 승리한 듯하다. 신탁통치는 한일합방과 비슷한 계열로 우리의 ‘역사적 기억’ 속에 저장되어 있는 듯 하다. 이런 플래카드를 보면 그렇다.


(출처는 [보도사진연감] 1999년)

1999년 2월경 서울의 한 대학캠퍼스에 내걸린 플래카드다. 50여년 전쯤 유행하던 단어들인 IMF(브레튼우즈체제)와 신탁통치가 화려하게 부활했다. 저 정도면 완벽한 ‘데자뷰’라 할만할까? 안타깝게도 이번에도 역시 희극이다. 저 플래카드를 쓴 학생들이 어디서 현대사를 배웠는진 모르겠지만 커리큘럼에 문제가 있었음이 분명하다. 어쨌거나. . . 1997년 국가부도위기를 넘기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던 국제통화기금(IMF)의 국내경제에 대한 간섭은 당시부터 찬반논란이 있었지만, 일단 저와 같은 역사적 사례(신탁통치뿐 아니라 97년과 98년 무렵에는 ‘경제적 국치’라는 말도 자주 쓰였다)를 통해서 그 본질이 규정된다. 이는 반대의 작용도 한다. 저 흉악한 국제통화기금(사실 실업의 원인이 IMF 때문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만큼이나, 해방 공간에서의 신탁통치도 나빴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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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사진과 비슷한 칼라톤을 가진 이 사진은 놀랍게도 60년 전의 사진이다. 출처는 『사진으로 본 감격과 수난의 민족사』(조선일보사, 1988)이다. 사진 캡션에는 “1945년 반탁시위대의 모습”이라고 한다. 조선일보의 스타일상 좌익의 ‘찬탁시위’ 사진 갖고 장난치는 거 아닐까란 의구심도 들지만, 캡션은 정확해 보인다. 신탁통치라는 용어는 당시 좌익이 금기시하던 용어였으니까. 1945년이란 시점이 정확하다면, 위 시위는 12월 31일 열린 ‘반탁국민대회’가 분명한 것 같다. 산발적인 시위는 29일경부터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저 사진처럼 정성들여 써놓은 플래카드와 태극기 등의 시위도구(?)와 행렬을 선도하는 사람 아래 일사분란하게 움직이고 있는 대열을 보아하니, 확실히 사진 속의 시위대는 ‘산발적이고도 자연발생적인’ 시위와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미군정도 그전까지의 시위와는 달리 12월 31일을 ‘우익시위의 날’이라 이름붙일 정도였으니. 아무튼 이날 ‘탁치반대국민대회’는 안국정-군정청전-광화문통-서대문-경성역-종로통을 거쳐 서울운동장으로 집결하는 것으로 예고되었다. 시위가 계획대로 전개되었다면, 위 행렬에 참가한 사람들은 요 아래 사진과 같이 운동장으로 집결한 것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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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전집』에 수록된 백범의 연설모습이다. 전집에서는 이 장면을 “12월 31일, 신탁통치반대 전국대회, 서울운동장”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한데 백범의 이 사진 속에는 위 시위행렬의 플래카드나 태극기가 보이지 않는다. ‘반탁국민대회’를 소집했던 주최측에서는 “서울시민은 애국의 열성을 간수하여서 국기를 각기 들고 여기에 전부 참가”하라고 명령쪼(?)로 말했지만, 위 사진에서도 행렬 선두의 기수만이 태극기를 들었을 뿐이고, 아래 사진에서는 태극기나 플래카드가 아예 보이지 않는다. 좀 더 확인해봐야 겠지만 백범의 저 사진은 같은날 같은 대회가 아닐 가능성이 있겠다.

세기말 대한민국에 개입했던 IMF에 대해서 뭐라 할 수 있는 처지는 아니지만(정확히 말하자면 IMF 때문에 더 나빠질 것은 없었다는 뜻이다), 50년 전의 신탁통치와 IMF는 좀 다를 수 있겠다. 신탁통치와 IMF(브레튼우즈 체제)는 루즈벨트식 국제주의의 대표상품이었다. “연합국헌장에 위반하는 모스크바삼상결정”이라는 것이 1945년 년말과 연초 대부분 언론의 논조였지만, 그건 말 그대로 국제정세에 어두울 수밖에 없는 약소국의 처지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탁치는 오래전부터 준비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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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로의 3거두+낄데 안낄데 파악 못하는 퍼스트레이디 송미령.(출처는 FDR Library).

“in due course”라는 관용구를 한국인들 뇌리 속 깊히 새겨놓은 회담이다. 카이로에서는 한국문제가 심도깊게 논의되지 않았고, 따라서 신탁통치에 관한 구체적인 언급도 없었지만, “적절한 절차”가 탁치가 되리란 점은 삼국정상들이 모두 이해하고 있었다. 장개석은 1942년말 루즈벨트에게 먼저 ‘보호’(tutelage) 제안을 내놓았고, 루즈벨트는 답신으로 ‘신탁통치’를 설명한 적이 있었다. 임정측은 애초 카이로 선언을 즉시독립으로 해석하여 ‘파티’를 준비했다가 곧 그 진의를 파악하고 취소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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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미상 : 테헤란 회담의 3거두.

이미 모스크바 외상회담에서 합의된 바 있었지만, 이 만남에서 루즈벨트는 스탈린에게 조선에 대해 신탁통치를 실시할 것이라며 40년 정도면 어떨까라고 운을 띄었다. 카이로회담 중간에 잠시 짬을 낸 루즈벨트와 처칠이 스탈린을 테헤란으로 불러들였는데, 소련측의 공식적인 기록은 보이지 않지만 훗날 루즈벨트는 스탈린이 이 제안에 대해서 별 대꾸 없이 동의했다고 전했다. 공식적으로 이때까지 소련은 대일전참전을 선언하지 않은 상태였고, 조약상으로도 일본과는 불가침조약을 체결한지라 일본의 식민지인 조선문제에 대해서 이렇다 저렇다 공개적으로 말할 처지는 아니었다. 다만 “소련은 카이로 선언에 제약받지는 않지만” 카이로 선언의 한국관련 조항을 추인한다는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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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즈벨트와 스탈린의 마지막 만남이었던 얄타회담 당시의 모습이다.(이 사진 역시 출처를 찾지 못했다) 요 아래 나오는 퀘벡회담 때보다는 나아진 모습이지만 루즈벨트의 얼굴은 매우 수척하다. 조선문제는 얄타회담의 공식의제에 포함되지 않았지만, 오찬회동에서 잠시 언급되었다. 루즈벨트가 신탁통치를 언급하자, 스탈린은 “짧으면 짧을 수록 좋다”며 지난번 테헤란회담과는 달리 준비된(?) 모습을 보였다. 여기까지가 신탁통치에 관한 최고위층의 합의였다.

한가지. 확인할 순 없지만 전형적인 반공서적 스탈로 쓰여진 베리아 일대기(새디어스 위틀린)란 책에 다르면 스탈린은 왼쪽 새끼손가락이 약간 기형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언제나 사진을 찍을 때면 왼쪽손가락이 보이지 않게 포즈를 취했다고 하는데, 위 사진들 역시 잘 감추고있다. 한데 스탈린을 둘러싼 루머는 워낙 많아서 이 역시 뻥일 가능성이 없진 않다. 호기심이 생겨서 필자가 가진 스탈린 사진들을 몇 개 찾아보았다. 뒷짐 진 사진들이 많아서 쉽지는 않았지만, 걔 중에 왼쪽 새끼손가락이 제일 잘 나온 사진을 보니 조금 이상해보이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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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타회담 중에 촬영된 스탈린과 몰로토프의 모습이다.(출처는 FDR Library) 자세히 보면 왼쪽 새끼 손가락이 다소 부자연스럽긴 하다. 무결점의 지도자여야 할 스탈린의 비중을 감안한다면, 저 정도의 장애(?)도 맘에 걸렸을 것 같기는 하다. 뭐 중요한 문제는 아니다. 공부 못하는 학생이 꼭 이런 사소한 데에 집착하는 법인데…

아무튼 루즈벨트는 세계대전 이후 국제질서를 재편하는 데에 있어서 특히 강대국들 간의 협조가 무엇보다 필수적이라고 믿었고, 그 중에서도 소련의 협조는 특히 중요했다. 코민테른 창립 이래로 식민지, 반식민지 민족들에게 자신들을 구원해줄 유력한 후보였던 소련식 사회주의는 대공황을 거쳐 파산선고를 받은 자유방임주의체제에 비해 훨씬 매력적으로 보였다. 따라서 많은 해방지역에서 스탈린의 인기는 높았다. 북한 역시 예외가 아니다. 사회주의는 반식민주의를 일찍부터 제창하고 있었고, 스탈린식 개입주의는 루즈벨트표 제국주의 즉 예전의 ‘소유-경영 일치형 제국’이 아닌 ‘소유와 경영의 분리’를 추구하는 신식제국주의와 공감대가 있었다. 강자가 여전히 강자의 지위에 머물면서도, 약자의 지위를 약간 조정해 주는 것이다. 어쨌건 루즈벨트는 자신의 구상을 실현시키기 위해, 해외여행을 기피하던 스탈린을 만나러 먼길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 멀고 먼 여정을 찾아다니느라, 전쟁말기 루즈벨트의 심신은 이처럼 피폐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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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9월, 제2차 퀘벡회담 당시 루즈벨트의 모습이다.(출처는 [타임2차대전]) 4선에 도전하던 루즈벨트는 극도로 자제했음에도 불구하고 대통령 선거유세와 연이은 전시회담으로 탈진한 모습이다. 처칠의 표정이 더 재미있다. ‘이 친구 믿고 계속 가도 되는거야?’ 뭐 이런 표정같다. 어찌되었건 계속된 주치의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루즈벨트는 강행군을 계속했고, 스탈린과 장개석, 처칠 등 연합국 빅4의 지도자들을 상대로 자신의 상품을 열심히 쎄일즈했다. 그리고 그것은 거의 성공적이었다. 꺼져가는 자신의 수명과 맞바꿀만큼 높은 가치를 두었던 루즈벨트의 신탁통치구상을 포함한 전후계획은 그러나 그의 사망과 함께 수포로 돌아갔다.

조선에 관한 문제 역시 마찬가지였다. 표면적으로만 보자면, 카이로-테헤란-얄타로 이어진 전시회담과 종전 후의 모스크바 삼상회의, 그후 두 번의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고 결국 유엔으로 넘어가는 과정은 ‘강대국의 간섭으로부터 민족자결’로의 점진적인 이행과정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오랜 식민지 시절을 보냈던 한국인들의 지난한 투쟁의 결과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 ‘독립운동의 연장전’을 진두에서 지휘한 장수는 대표적인 두 분의 독립투사, 이승만과 김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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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김구전집에 수록된 또다른 사진이다. 앞으로 이 두분이 함께 찍은 사진이 몇번 더 등장할 예정인데, 한꺼번에 모아놓고 봐도 재미있다. 1946년 여름경이라고 되어 있는 이 사진 속 두 분의 의상이 참으로 잘 어울린다. 피부가 약간 거무틔틔한 김구는 하얀색으로 통일했고, 백발의 이승만은 어두운 계통으로 입으셨다. 흑백논리를 선호하셨던 분들답다. 여담이지만 사실 나는 김구가 이승만보다 잘 난거라곤 단 하나도 없다고 생각했었다. 이 사진을 보기 전까지는. 적어도 키는 김구가 더 컸네. 갑자기 친구라는 영화가 생각난다…… 아무튼 ‘직업 독립운동가’로서 실직 위기에 놓였던 이 두 분의 독립운동가의 입장에서는, 신탁통치논란으로 당분간 ‘일거리 걱정’은 안해도 좋게 생겼다. 뭐 계산해 볼 수야 없겠지만, 사실 지난 30년간의 독립운동기간 보다 해방후의 독립운동이 노동강도라는 측면에서는 훨씬 더 격렬하지 않았을까 싶다. 임시정부도 1919-20년과 1940년대 초반 5년 정도를 제외한다면 그나마 한가한 편이었고, 이승만 역시 워싱턴의 로비활동보다 하와이에서 ‘교육언론사업’으로 더 오랜 시간을 소일(?)했으니 평균해 보자면 그렇지 않았을까 말이다.

어쨌건 이 두 분의 건국시조들께서는 아무리 연합국이 주장하는 것이라고 해도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수치였다. 이승만의 표현처럼 “비록 을사조약과 성질은 상이하나 우리의 일을 자력으로 하지 못한다는 것은 (을사조약이나 신탁통치는 똑같이) 치욕”일 수밖에 없다. 비록 루즈벨트와 스탈린이 입을 맞춰 “선의의 행동(good conduct)이라는 정신에 입각하여” 피신탁국을 도울 것이라고 강조했지만, 이미 일본에 속은 바 있는 조선인들을 설득하는 것은 애초부터 어려운 일이었다. 그들의 ‘반탁’은 정당성을, 역사적-경험적 정당성을 충분히 가질만한 것이었다. 민족자결은 다시 한번 중요한 원칙이었다. 자, 이 골치아픈 ‘자결과 간섭’의 충돌을 해결했던 유엔의 결정은 정당한 것이었을까? 이 문제는 ‘다수결은 언제나 옳은가?’를 고민했던 루즈벨트와 스탈린과 같은 ‘위대한 인간들’의 걱정과도 일맥상통하는 바가 있다. 루즈벨트는 나름대로 이 문제를 잘 해결했다고 믿었을 것이다.

일단 형식으로만 놓고 보자면, 유엔은 잘 조화되지 않을 것 같던 ‘강대국과 약소국’을 모두 만족시키는 데에 성공했다. 즉, 신생독립국들 역시 미국이나 소련 그리고 영국과 똑같은 1국 1표의 권리를 행사하는 유엔총회는 ‘약소국을 위한 민주주의’의 상징이었고, 미소영불중의 대표들이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는 안보리는 ‘강대국의 기득권 보장’을 충족시켜주었다. 누이좋고 매부좋다. 각 주마다 2명의 상원의원을 일률적으로 배정하지만, 주별 규모를 반영하여 하원의원의 수에 차이를 둔 미연방의회처럼, 유엔의 구성 역시 ‘1국 1표 원칙’과 ‘힘에 따른 비토권’을 병치시킨 것이다. 유엔헌장의 서문만 미국헌법을 흉내낸 것이 아니라, 유엔이라는 기구 자체가 미국식 연방제도를 벤치마킹한 것이다. 자 이런 제도로 세계질서가 마치 미국이 그랬던 것처럼 자유와 번영으로 넘실대며 잘 발전해나간다면 좋겠지만, 이게 그리 쉽지가 않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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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한국과 관련해서 유엔은 개입부터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미육군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군인”이라 칭송받던 마샬(George C. Marshall)이 장관취임 선서를 하던 날(1947.1.21), 트루먼 대통령, 번즈(James F. Byrnes) 전 국무장관과 함게 악수를 나누고 있는 장면이다. 이 세분은 한반도가 ‘군사적 분할’에서 ‘정치적 분단’으로 넘어가는 와중에 각자 자기 역할을 담당했다. 불행한 점이라면, 이 세분은 모두 전후 세계질서를 그리고 있던 루즈벨트의 ‘거대구상(Grand Design)’에는 거의 참여하지 못했던, 완전한 ‘문외한들’이라는 점이다. 번즈는 루즈벨트 행정부의 마지막 국무장관이던 스테티니우스의 뒤를 이어 트루먼이 임명했다. 모스크바 삼상회의 당시 미국의 국무장관이었고, 전시외교에 거의 무지했던 후임자 트루먼에게 대소강경책을 조언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아울러 뉴딜의 노동정책에 대해서도 비판적이었던 것을 보면 전형적인 보수성향의 인물이었던 모양이다. 마샬 역시 2차대전 종전 직후 중국에서 국민당과 공산당의 합작을 추진하는 일을 맡긴 했지만, 2차대전 동안 줄곧 미육군참모총장직을 수행했던 전형적인 직업군인이었다. 그러던 그가 국무장관에 임명된 지 얼마되지 않아 삼상회의 결정을 파기하고 유엔으로 조선문제를 이관하겠다는 연설(1947.9.17)을 하게 된다. 그로서는 영광일지 모르겠지만, 통일정부 수립을 바라던 당시의 많은 조선인들을 실망시켰다. 지난 두 번의 선거에서 루즈벨트의 러닝메이트이자 부통령을 지냈던 헨리 월러스를 ‘공공연한 공산주의자’로 부르던 언론과 반대파를 안심시키기 위해 지명된 인물이 트루먼이었다. 루즈벨트의 ‘거대구상’을 깡그리 작살내기에 이보다 더 좋은 라인업은 없다. 소련은 마샬의 연설에 대해서 즉각, ‘미소양군 동시철병 및 조선인들에 의한 문제해결’을 제안했다. 물론 소련측 제안은 거부되고 미국이 내놓은 유엔임시위원단을 결성해서 조선에 선거를 치르겠다는 결의안이 통과되었다. “전세계인들 가운데에는 당분간 다른 국가와의 관계에서 신탁을 필요로 하는 소수의 아이들”이 존재하며, 이 아이들(약소국)이 성장해서 어엿한 성인이 될 때까지 “선의의 행동(good conduct)이라는 정신에 입각하여 그들을 지도”해주겠다는 루즈벨트의 탁치안을 버리고, 화끈하게 ‘민족자결’을 선사해 준 것이다. 1947년 11월 경, 민족자결은 어느덧 ‘자유선거’와 다르지 않은 말이 되어버렸다. 적어도 38선 남쪽에서는…. (다음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