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박물관] 민족자결주의에서 ‘자유’선거까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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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민족자결주의에서 ‘자유’선거까지 (1)

                                                                      고지훈(현대사분과)

좀 따분하긴 하지만 선거이야기부터 시작해보자. 그냥 선거가 아니라 ‘자유선거’다. 자유! 한데 이 자유는 사실 우리 현대사에서는 그다지 좋은 의미로 기억되기 힘들 것 같다.

해방 직후 어려운 경제상황에 결정타를 날린 미군정청의 ‘자유’시장정책이 그랬고, 50년대를 통째로 말아드셨던 ‘자유’당이 그랬으며, 점잖은 분들(대학교수와 소설가)끼리 싸우게 만들었던 소설 ‘자유’부인도 참 거시기했다. 물론 신’자유’주의도 빼놓을 수 없다. 어쨌건. . .

1165069344(출처는 네이버카페 http://cafe.naver.com/alehvk2/2085)

한반도에서 대한민국정부만이 ‘유일’하게 정통성을 가진다는 신화의 핵심은 다름 아닌 ‘자유’선거의 존재다.

단 8명의 유엔임시위원단 위원이 전국 200개 선거구 산하 13,272개 투표소의 선거상황을 (마치 천리안을 가진 신이라도 되는 것처럼) 감독한 끝에 “상당한 정도의 자유분위기”하에 진행되었다고 선언했던 1948년 5월 10의 제헌선거에서부터, 남한에서 가장 힘이 쎈 정치집단이 “힘이 모자라 그들을 막지 못했”다며 지을 수 있는 최대한의 불쌍한 표정으로 선거운동인지 신파극인지를 헷갈리게 만들던 지난 총선에 이르기까지.

대소 50여회(대통령, 국회의원, 지방선거)에 이르는 이 ‘자유’선거는, 흑백투표함(2기 최고인민회의 선거가 치러졌던 1957년 8월 27일 이래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으로 상징되는 북한의 ‘짝퉁민주주의’를 비웃는 ‘오리지널 민주주의’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이렇게 말하고 보니 꼭 우리의 선거가 ‘자유’롭지 못했다는 뜻같이 들린다. 새가슴인지라 한가지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겠다. 남한의 선거는 북한의 선거보다 훨씬 더 ‘자유’로웠다는 점에 대해서는 필자도 100% 동의한다. 아, 이 새가슴. . . . 어쨌건.  뭐 이거야 필자의 생각이고, 과연 우리의 선거가 얼마나 ‘자유’롭고 아름다웠는지를 판단하는 것은 그야말로 ‘자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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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블로그에서 가져왔던 것인데, 하도 예전의 것이라 출처를 찾지 못했다. 한데 참 오랜만에 이 사진을 보니 처음과는 다른 의구심이 생긴다. 처음엔 여당이 “약한 소리”하는 것이 우습게 보여서 저장해두었는데, 맨 위의 저 “가슴에 못을 박지 않겠습니다”라는 문구는 대체 무슨 의미였을까? 지난 총선에 장도리당이라도 있었던 것일까? 아님 대못당? 흡혈귀말살당? 참 궁금하다)

‘민족자결주의’와 ‘뭐건내가결정주의자’ 이승만

유엔이 아니었더라면 대한민국은 태어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유엔이 첫 번째로 주권국가의 탄생명령을 내린 곳이 다름아닌 대한민국(1947년 11월 14일)이었다. 간발의 차로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분할이 그 뒤를 이었다(1947년 11월 29일).

소련이 거부해서 정부수립이 난망해지자 ‘아쉬운대로’ 38선 이남만이라도 선거실시를 해야 한다는 탁견을 내린 것도 유엔이었으며, 최초로 유엔군을 파견하기도 해주기도 했다. 도대체 왜 유엔의 날에 안노는 것일까?(물론 예전에는 공휴일이었다)

아무튼 대한민국이 탄생하는 데에, 정확히는 최초의 ‘자유’선거가 시행되는 데에는 유엔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유엔임시위원단이 선거를 감독했던 5.10 선거만 아니라 그 뒤에도 유엔은 우리 선거에 중요한 소품역할을 했던 것 같다. 아래 사진을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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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는 모두 국가기록원 홈페이지)

각각 1956년 3대 정부통령선거와 1958년 4대 국회의원 선거 개표소의 모습이다. 천장에는 만국기, 정확히는 유엔기를 포함한 유엔가맹국들(물론 공산권 국가들의 국기는 빠졌음이 분명하다) 깃발이 걸려있다.

유엔기, 태국, 스웨덴, ‘자유’중국, 터키, 파나마 국기는 비교적 선명히 보이는데 나머지 삼색깃발들은 뭐가 뭔지 구분이 잘 안된다. 국가기록원 홈페이지에는 이 사진을 촬영한 장소가 설명되어 있지 않아서 정확히 알 수 없다. 하지만 강당인 것만은 분명한데. . .

왜 여기 만국기가 걸려있을까? 네이년 검색을 두드려보니 파리만국박람회 어쩌고 하면서 엉뚱한 대답이 적혀있더라. 뭐 그게 맞을 수도 있겠지만 저 개표장 천장에 널려있는 것은 그런 의미가 아닐 것이다. 아마도 대한민국의 탄생이 갖는 인터네셔널한 의미를 최대한 강조하려던, 그 어떤 본능적 욕구 때문이 아닐까싶다.

도대체 왜 제3자가 우리의 정통정부 탄생을 결정해야 했으며, 그건 또 왜 유엔이라는 ‘국제기구’일 수밖에 없었는지, 이 과정에 어떤 ‘논리적 모순’은 없었는지. . .

아, 궁금한 게 너무 많다. 보장은 없지만, 그래도 혹시 의문을 푸는데 도움이 될지도 모르니 시간을 좀 거슬러 올라가보자.(이런건 일종의 직업병이다)

민.족.자.결.주.의

자결. 수어사이드가 아니다. “자기의 일은 스스로 하자~”라는 노래처럼 민족을 포함한 모든 공동체가 자신의 운명은 자신이 결정해야 한다는 원칙을 말한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1차 세계대전과는 하등의 관계도 없던 극동의 조선인들에게 이 전쟁을 마무리하는 회담 한가지가 관심을 모았다. 바로 자결, 그것도 민족자결이란 말 때문이다.

1165069649(4-출처는  Peter Stepan ed., Photos that Changed the World, Prestel, 2000) 우드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14개조항’으로 우리에게 더 유명한 파리강화회담의 모습이다. 1919년 6월 28일 강화조약에 서명하기 몇 분 전의 모습인데, 테이블 정중앙에 보이는 인물이 윌슨이다. 오른쪽에 보이는 인물은 프랑스 대표였던 조지 클레망소이고 왼쪽은 아마도 로이드 조지 영국수상인 듯 하다.

1165069673베르사이유 강화회담의 우드로 윌슨(가운데).
(출처는 hhttp://teachpol.tcnj.edu/ )

비록 최종적으로는 실패했지만 그의 의도만은 칭찬받을만 했다. 말썽국가들이 일으키는 분쟁을 방지하고, 식민지에 처한 민족들을 해방시키고, 전세계의 부와 자원이 제한없이 차별없이 골고루 잘 활용되어 다같이 번성하는 사회를 만드는 것. 짧게 말해 평화(집단안보), 반식민주의(자결), 번영(자유무역). 이 세 가지다.

지금 들어도 가슴 울렁거리게 만드는 만고불변의 가치들이다. 이 세 가지를 한큐에 해결해 줄 수 있는 도깨비 방맹이인 국제연맹(League of Nations) 가입안이 미의회에서 부결되면서 그의 꿈은 산산조각이 났다.

민족자결주의는 결국 유럽 열강들의 탐탁치않은 태도와 미국 내 고립주의자들의 반대에 부딪혀 용두사미가 되어버렸지만, ‘민족의 자기결정’이란 화두는 비로소 우리 현대사의 가장 중요한 단어로 자리잡게 된다.

3.1 운동의 직접적인 결과였던 상해임시정부는 물론이고 러시아혁명의 세례를 받았던 사회주의자들에 이르기까지(물론 이들은 윌슨표 민족자결주의가 아닌 크렘린발 민족자결주의를 선호했다), ‘민족은 자결’해야 한다는 원칙은 불가역적인 것이 되었다.

하나의 민족공동체가 ‘독립’이 되어도 ‘자결’하지 못하는 경우도 물론 있을 것이다. 독립이 되더라도 왕정 혹은 과두정이 복구된다면 그건 공동체의 자결일 수 없는 건 당연하다. 하니 비록 ‘민족’이란 접두어가 붙었지만 이는 필연적으로 ‘민주주의적’이어야만 한다.

다시 말하자면 독립을 원하는 모든 자, 민족자결주의를 받아들인다. 한데 민족자결주의는 그 자체로 모든 독립투사들이 민주주의자가 될 것도 요구한다. 이 지당한 논리가 아이러니하게 보였던 인물들도 있다. 이승만과 같은 인물들이다.

1165069779(출처는 조선일보사,『이승만과 나라세우기』)

열혈 독립투사이던 이승만은 애초 민족자결주의와 궁합이 잘 맞는 듯했다. 1918년 1월 18일 의회연설에서 ‘민족자결주의’를 제창했던 인물이 다름아닌 우드로 윌슨이었다는 점에서 그랬다. 위 사진은 우드로 윌슨이 프린스턴 대학 총장을 지낼 무렵 같은 학교에 다니던 조선인 유학생 이승만의 모습이다.

참고로 앞으로 이런 종류의 단체사진들이 종종 등장하게될 터인데, 이런 사진에는 꼭 ‘먼산 보는 사람들’이 있다. 위에도 네 명이나 있다. 아마 사진기와 눈을 마주치면 영혼을 뺏긴다는 생각에 저런 습관이 생겼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

민족자결주의를 히트(?)시키면서 전세계적인 인물로 부상한 우드로 윌슨으로 인해서 이승만은 또 사람들의 입에 회자된다. 과장된 소문이 없진 않았겠지만 결국 이승만은 윌슨과의 인연으로 파리강화회담에 파견할 미주한인 대표로 선정이 되었고, 안창호의 말마따나 “고상한 철학박사이시자 윌슨 대통령의 同一知友”로 격상된다.

자, 이쯤 되면 이승만이야말로 가장 철저한 민족자결주의자가 될만한 자격이 있는 듯도 하다. 하지만 그가 철저한 독립투사였을망정, 철저한 자결주의자가 되기에는 여러모로 부족하다는 점은 훗날 지겹도록 확인된다. 아니 굳이 훗날까지 가지 않더라도, 요 아래 사진을 찍을 무렵 그의 ‘국민된 자의 도리’는 이런 거였다.

“한국인들이 뛰어난 이유는 바로 그들이 양순하고 성실하기 때문이다”

히틀러도 비슷한 뉘앙스의 말을 하긴 했다. “통치자에게 다행스러운 점은 바로 국민들이 도무지 생각을 안한다는 사실이다” 이런 망발의 랠리에 스탈린이 빠질 수가 있나. “인민들? 그들이 뭘 안다고. 그저 밭이나 갈면 됐지. 그런 결정은 우리가 하는거요”

1165069934(출처는 조선일보사 『이승만과 나라세우기』)

민영환의 특사로 테오도르 루즈벨트 미대통령을 알현했을 무렵에 찍은 사진이다. 이 젊은 나이(만 서른이다)에 백성의 미덕을 ‘양순함’에 두었으니, 칠순이 되었을 무렵에는 어땠을지 알만하다.

아무튼 이승만이 생각하던 ‘민족자결주의’에는 독립이 포함되어 있는 것은 분명했지만, 그것이 민주주의로까지 발전할지는 매우 의심스러운 것이었다. 게다가 윌슨의 민족자결주의가 실패한 것이 분명해진 1920년대 초반 이후, 그는 골치아프게 자결과 민주주의 간의 역설문제에 골치썩힐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 . . .

민족자결주의의 부활과 FDR

좀 어거지기는 하지만 민족자결주의가 민주주의를 불가피하게 만든다는 점을 다시 강조해보자. 윌슨과 친하다는 이유로 어떻게든 다리를 놓아보려던 이승만의 작전이 실패로 돌아간지 한참이 지난 1941년 여름, 허약한 체질과 무리한 유세일정으로 말년을 우울하게 보낸 윌슨의 뒤를 이어 또 한 명의 민주당 대통령이 ‘미션 임파서블’을 외치며 등장했다. 다름 아닌 미역사상 유일무이한 장기집권 대통령 루즈벨트다.

123123123(출처는 FDR LIbrary 홈페이지)

취임 첫해였던 1913년 워싱턴의 한 연단에 모습을 드러낸 윌슨(검은 양복에 흰 바지 그리고 빽구두)과 루즈벨트(연단 오른쪽 끝)의 모습이다. “충실한 윌슨주의자”라 불리던 루즈벨트는 1910년 뉴욕 상원의원으로 정계에 데뷔했는데, 이 사진은 윌슨의 배려로 해군성 차관보에 임명된 직후 촬영한 것으로 보인다.

프랭클린 딜라노 루즈벨트(FDR) . . . 왠지 본 연재원고에 자주 등장할 것 같은 예감이다. 그도 그럴 것이 루즈벨트의 아내였던 엘레노어 루즈벨트는 별명이 ‘유엔의 할머니’였고, 루즈벨트가 등용한 관료 가운데 제일 오랫동안 사무실을 지킨 인물이던 코델 헐 국무장관의 별명은 ‘유엔의 아버지’로 통했다. 촌수가 좀 이상하긴 한데 뭐 별명이니까 넘어가자.

아무튼 ‘반식민주의, 국제평화, 자유무역’이라는, 윌슨이 남긴 미완의 프로젝트를 완수하기 위한 약간은 무모했던(?) 그의 도박은 우리 현대사의 많은 분야에 흔적을 남겨놓게 될 것이다. 차차 이야기하기로 하고, 여기에선 한가지만 살펴보고 넘어가자. 바로 ‘대서양헌장’이다.

124124124124124(출처는 위키피디아)

미군전함 어거스타(Augusta) 함상에서 열린 FDR과 처칠 간의 회담(1941.8.10∼12) 모습이다. 뒤 줄 군인들 중 가운데 서 있는 사람이 훗날 ‘마샬플랜’의 주인공 조지 마샬이다. 그 뒷줄 왼쪽끝에 ‘뒷담화’를 까시고 계신 두 양반은 루즈벨트의 절친한 친구이자 동료였던 해리 홉킨스와 애버럴 해리만인데, 이들도 기억해 둘만하다.

아무튼, 아직 전쟁에 공식참전하고 있지 않던 미국 대통령과 독일과의 힘겨운 전쟁을 벌이고 있던 처칠은 이 회담에서 “연합국의 전쟁목표”라 할만한 ‘대서양헌장’을 발표했다.

훗날 소련을 비롯한 40여개 국가가 서명한 ‘연합국 공동선언’으로 발전했고 결국은 ‘유엔헌장’으로까지 이어졌던, 국제협조의 신호탄이라 할만한 선언이다. 모두 8개 항목에 걸쳐 연합국의 전쟁목표를 설명하고 있는

이 헌장에서 우리의 시선을 끄는 것은 역시 ‘민족자결’이다. 이건 2항(영토의 변경은 해당 지역 인민의 의사에 따른다)와 3항(모든 인민은 자결의 권리를 가진다)에 담겨있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는 당시 토착언론이던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등이 다룬바 있었지만, 대서양헌장은 그렇지 못했다. 일제가 한창 전쟁중이었으니, 사실상 추축국에 대항하는 “연합전선 구축 선언”이던 대서양헌장이 국내에 소개될리 만무하다. 게다가 토착언론들도 죄다 폐간한 다음이고.

한데 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휴회된 직후, 새삼스럽게도 이 ‘대서양헌장’이 남한 언론과 주한미군 최고사령관의 입에 오르내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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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는 역사정보통합시스템 홈페이지)

1차 미소공동위원회는 모스크바 3상 결정에 따라서 조선의 임시정부수립을 비롯해서 신탁통치 등의 문제를 토의하기 위해서 1946년 3월 20일부터 열리고 있었는데, 잘 나가던 회의분위기는 5월 8일 갑작스럽게 중단된 바 있다.

한데 이 회담결렬과 관련해서 왜 새삼스럽게 ‘대서양헌장’이 등장했을까? 이 문제는 좀 복잡하다. 위 동아일보 사설에도 나오듯이 이 무렵 “자유로운 의사표명”은 반탁투쟁으로 일거에 ‘민주투사’들로 변신하신 남한의 우익진영이 ‘우리의 좌우명’으로 삼고 있던 철칙이었다. 아마 이 문구를 팔뚝에다가 문신으로 새겨넣은 열혈 우파청년들도 분명 있었을거다.

반탁운동 전과경력(?)이 있는 단체를 임시정부수립을 위한 협의대상에서 제외해야 한다는(이에 따르자면 김구나 이승만, 한민당 등은 낙동강으로 가야된다. 오리알 뒤집어쓰고…) 소련에 맞서, 미국이 내세운 논리가 바로 무대뽀 정신…아니 대서양헌장의 정신, 바로 ‘표현의 자유’였다.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