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대중화와 역사-인간의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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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대중화와 역사-인간의 거리

 

오항녕(중세2분과)

※ 이 글은 『역사와 현실』 100호에 실린 오항녕 선생님 특집논문 ‘역사대중화와 역사학’을 칼럼 형식으로 재정리한 것입니다. 원문은 웹진 ‘간행물’ 메뉴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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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역사대중화가 동어반복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인간은 원래 역사-인간[Homo Historicus]이다. 호모 사피엔스처럼, 인간임을 알려주는 기본성격 중의 하나가 역사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역사-대중화라는 말은 하나마나 한 말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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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렇지 않다. ‘대중화란 진지한 학문이 갖는 위대한 휴머니즘적 전통의 일부분’이라는 말이 있고, 대조적으로 ‘저널리스트나 정치가, 방송 해설가나 영화감독, 미술가는 역사가 특유의 ‘기술’이나 ‘방법론’ 없이도 그 나름대로 방식을 만들어 ‘과거’에 성공적으로 접근해왔다‘고 대드는 견해도 있다. 여기서 나온다. 역사-인간이라는 현존재와 역사학의 성과 사이에는 틈이 있다. 여기서 역사대중화의 문제가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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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의 영역이 있고 현실의 영역이 있다. 어느 학문이나 마찬가지이다. 실사구시(實事求是)라는 말은 바로 학문과 현실이 멀리 떨어지지 말자는 말이다. 그런 점에서 대중화를 위한 긴장은 정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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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의가 정리되어야할 대중화 방향이 있다. ‘네모난 삼각형’이 있다. 원래 ‘네모난 삼각형’은 없다.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있다고 한다. 팩션(faction)이란 말이 그렇다.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여 새로운 시나리오를 재창조하는 문화예술 장르를 가리킨다고 한다. 역사 영역은 아닌 듯한데, 역사라고 우기는 사람도 있다. 분명히 하자. 추론은 사실에 기초하지만, 허구는 없던 사실을 지어낸다. 그런데 상식에 입각하여 정의하면 역사 또는 역사학은 지어낼 수도 없고 지어내서도 안 된다. 추론이 허구일 수 있다. 둘이 겹치는 부분이 있다. 그런데 사실과의 관계에서 추론이나 허구가 사실에 기초한다면 상상력이지만, 추론이나 허구가 사실을 부정하거나 파괴한다면 왜곡이 된다. 뒤의 경우라면, 추론은 학문적 정당성을 잃고, 허구는 역사와 결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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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친 낙관을 경계하면 생산적이 될 수 있는 대중화의 지점도 있다. 나는 ‘쉽고 재미있는 대중화’ ‘선정적인 대중화’의 첫걸음은 역사를 승패로 변주, 환원하는 데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잘 팔리는 책’, ‘잘 팔리는 영화’를 지향하는 것이 센세이셔널리즘의 토양이고, 그렇다면 이는 상품 생산과 판매가 지배적인 자본주의에서는 피할 수 없는 일이 된다. 이에 대해 ‘팩션은 어쩔 수 없이 ‘허구’에 종속돼, 끝내 허무하게 부정돼야 하는 그 무엇이 되고 마는 것일까?‘ 하는 질문을 던질 수 있다.(최익현, 역사왜곡인가? 대항역사인가?, 한국일보 2016년 9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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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서 “텍스트의 측면에서 사실성과 재현의 엄밀성을 강조하기보다 새로운 해석 가능성을 보여주는 역사 다큐멘터리는 대항역사가 될 수 있다. 미적 텍스트는 관객의 쾌와 감을 유발해 다양한 의미가 교환되고 논의되는 장(공론장)을 활성화할 것이다.”라는 주장도 가능하다. 이것이 “수용의 측면에서 볼 때 영상 이미지는 관객의 주관적 체험을 고양시킨다는 점에서 대항역사의 전망을 보여준다. 관객은 미적이고 주관적인 체험을 통해 수많은 역사적 ‘진실들’을 생산한다.” 대항역사의 가능성이라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고민할 주제의 확장이라는 점에서는 동의하지만, 난 그리 낙관하지 않는다. 왜? 나는 역사학자니까. 난 역시 사실의 입장에서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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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사실(史實)로 돌아가자. 가끔 ‘사실만으로는 역사가 안 된다’, ‘해석해야 비로소 역사다’라는 언명을 본다. 이분법으로 받아들인다는 말이다. 어떤 역사학자는, 아니 많은 역사학자들도, ‘역사학에서 사료가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역사는 해석이다. 이는 역사학의 기본이다.’라고 생각하고 있다. 역사학자를 ‘좌우 어느 곳에도 치우치지 않는’ 초월적 존재로 인식하고 있는 ‘역사학자’도 있다. 그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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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관심, 해석은 물론 역사학의 여러 차원이다. 어떤 사실에 관심을 갖다 보면, 관점이 생기고, 해석이 생긴다. 그러나 ‘보기 나름’은 아니다. 진정한 역사공부는 ‘보기 나름’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거기서 시작한다. 그래, 넌 그렇게 생각해! 난, 이렇게 생각하니까! 이게 아니다. 난 이렇게 생각하는데, 넌 그렇게 생각한다고? 왜 그렇지? 이렇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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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대중화는 독립 영역이 아니다. 역사학자가 생각할 수 있는 역사대중화는 ‘튼튼한 역사학이라는 토대’이다. 진료를 하면서 의사의 실력이 느는 것은 사실이지만, 사람의 몸을 치유할 의사의 실력을 갖춘 뒤에 진료를 해야 하는 것이 기본이다. 그러므로 역사대중화는 역사학의 반성에서 시작한다. 그 중 하나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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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국가사 체제로 편재되어 있는 한국 대학의 ‘(한)국사학과’가 어떻게 대중들의 다양한 역사-소비 욕구에 부응할 수 있는가와 연결된 문제이다. 이는 역사학과에 대한 관심도, 즉 학생 충원의 문제와 연결된다. 인간에게는 다양한 역사가 있는데 학과 편제가 국사(國史)로 한정된다면 역사에 대한 갈망을 충족시킬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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