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병과 재해] 19세기 콜레라 충격과 조선 사회의 반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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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신회(서울대학교 박사과정)

 

인간은 세상에 태어난 순간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각종 질병의 공격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어느 한 지역이 낯선 질병에 노출되어 부모, 형제가 3~4일 내에 연속적으로 죽어 나가는 상황이 발생할 경우, 이를 경험한 자나 그러한 소식을 접한 다른 지역의 사람들이 겪을 공포와 충격은 쉽게 상상하기 힘들다. 윌리엄 맥닐(Willian H. McNeill, 1917~)은 『전염병과 인류의 역사(허정 옮김)』에서 질병에 따른 중대한 사회 변화의 가능성을 언급했다. 그는 한 지역의 주민이 과거에 경험하지 못했던 전염병에 처음 노출되었을 때, 어떠한 사태가 발생했는가에 대한 좋은 실례로 14세기 페스트와 19세기 콜레라의 대유행을 지적했다. 필자가 1821년 조선에서 창궐한 콜레라를 바라보는 시각도 이러한 견해에 기반하고 있다. 동시에 당대 조선이 세계 지리에서 차지하는 위치 역시 “19세기 콜레라의 범세계적 유행에서 분리시킨 채 개별 차원으로 접근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다. 콜레라가 조선에서 퍼져 나가는 과정을 추적하면서 19세기 조선의 사회상과 사람들의 대응 양상을 묘사하고, 이것이 그 시대 사람들에게 어떠한 의미를 갖는지 알아보는 작업은 당대 역사상을 폭넓게 이해하려는 과정이다.

콜레라는 1800년 이전까지 인도 벵갈 지방의 풍토병이었다. 영국은 대인도 식민지배 이후 자신들이 만든 각종 교역로와 군인, 선박의 이동을 통해 새로운 지역으로 병원균을 실어 나르게 된다. 콜레라는 1820년 중국 광동을 거쳐 이듬해 산동과 북경을 경유해서 조선에 들어왔다. 1821년 콜레라가 7월 말에서 9월 말(음력)까지 제주도를 제외한 지역에서 창궐했다면, 이듬해에는 4월 말에서 9월 말(음력)까지 제주도를 포함한 조선 전역에서 발생했다. 『실록』과 개인 일기 등의 자료를 검토해 보면 콜레라가 맹위를 떨치는 동안 일정한 지역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대략 열흘 간격으로 집단 사망하고 있다. 이후 병균은 인간의 이동과 함께 인접 지역으로 옮겨간다. 병균 확산에는 세균이 활동 가능한 날씨와 도로를 따라 이루어진 인구 이동이 큰 기여를 했다. 예컨대 요동을 거쳐 평안도로 들어온 병원균은 황해도를 지나 서울, 수원을 거쳐 충청, 전라, 경상도로 번져갔다. 여기에는 질병에 대한 사람들의 공포심을 부채질 할 수 있는 뜬소문까지 동반되곤 했다.

콜레라는 인간의 영양상태 및 면역력과 깊은 관련을 맺는다. 깨끗한 환경에서 생활하며 양질의 음식물을 섭취함으로써 강한 면역력을 유지할 수 있는 계층은 병에 걸릴 확률이 그렇지 못한 계층보다 상대적으로 낮았다. 이는 영변부사로 재직하던 정원용(1783~1873)의 “평일 잘 조섭한 자들은 많이들 온전할 수 있었다. 소민(小民) 가운데 상한 사람이 많고, 중인은 적으며, 사대부는 더욱 적었다.(『경산일록(經山日綠)』)”라는 목소리를 통해서도 살필 수 있다.

동시기 산업혁명에 필요한 노동력을 제공하던 유럽의 도시 빈민가는 인구과밀, 배설물, 새어나오는 오수 등으로 콜레라가 활동하기에 좋은 환경을 갖추고 있었다. 유럽 하층민들은 콜레라 확산의 목적이 당시 공리주의자들이 주장하던 잉여인구의 제거에 있다 의심했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와 함께 1831년 영국에서는 하층민들의 적대감에도 불구하고 공리주의자들이 선호하던 ‘해부 법안’이 통과됐다. 그해 10월 콜레라가 영국에 상륙하자, 하층민은 자신들의 신체를 해부용으로 얻기 위해 상층민들이 병균을 이용하고 있다 의심했고 이는 폭동으로 이어졌다. 러시아의 경우 1830년 콜레라가 수도 상트 페테르부르크를 덮쳤다. 정부는 군대를 동원한 차단선 설치, 지역 봉쇄, 격리라는 강압적 수단을 동원했다. 격리에도 불구하고 질병을 억제할 수 없자 정부는 상인들의 이동식 주택도 차단했다. 이 기간 동안 하층 계급에서만 10만 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억압적 격리는 폭동으로 이어졌고, 1831년 6월 이들은 수도로 몰려와 콜레라 병원을 습격하며 의사들을 죽였다.

콜레라로 희생자가 발생하는 상황에서 조선 정부는 사악한 기운과 자신들의 조화를 이루지 못한 정치 때문에 질병이 발생했다고 여겼다. 조정은 콜레라 발병 즉시 죄수석방 등의 조치를 통해 하늘의 노여움을 풀고자 하는 ‘仁의 정치’를 실행했다. 질병이 확산되고 의학적 대안을 찾지 못하는 상황에서, 집권층은 당대인의 사고에서 가장 합당한 것으로 인정받던 ‘별여제’ 등 동원 가능한 제사를 신속하고 집중적으로 설행했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서 명시하고 있는 약물 및 장례 지원 등 정부의 구휼 정책과 제사의 실행은 어진 정치가 현실에서 발현되는 것을 의미했다. 이로써 정부는 민심을 감싸고 달래며, 괴질을 물리칠 수 있다는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할 수 있었다.

조선 지식인들은 당시 사람들이 질병에 걸리는 원인을, “코로 병의 증기를 냄새 맡는 데서 비롯된다.(『목민심서(牧民心書)』)”라고 인식했다. 이는 1880년대 세균을 발견하기 전까지, 유럽인들이 그 원인을 땅 속 시체, 부패물질, 오물구덩이에서 나오는 공기 탓으로 여긴 것과 비슷했다. 콜레라가 극성할 당시 조선 민간에서는 쥐가 발생시킨 질병이라는 뜻에서 ‘쥐통’, ‘쥐병’으로 불렀다. 사람들은 쥐의 형상을 한 귀신이 몸속으로 파고들면 콜레라에 걸리고 발을 통해 침입한 악귀가 다리를 갉아 먹으면서 올라가 내장을 손상시킨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조선 민간에서 콜레라를 극복하기 위한 행동 방식은 다양한 모습으로 표출되었다. 여기에는 약초를 통한 의술 행위, 기도를 올리는 무속 행위, 민간의 관습을 활용한 토속 행위 등 조선인의 사고를 엿볼 수 있는 다양한 삶의 모습이 반영되었다. 예컨대 콜레라는 쥐가 물어서 생긴 병이기 때문에 고양이를 부적에 그림으로써 물리칠 수 있다거나, 황소 머리를 대문 앞에 두면 전염병을 일으키는 귀신이 두려워 도망한다는 식이었다. 특히 무당은 신령한 중개인으로 자처하며 환자 가족으로부터 강한 신뢰를 얻었고, 민간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개고기는 즙이나 죽의 형태로 자주 활용되었다.

고양이(한역연)

[사진1] 고양이부적 (샤를 바 라 지음, 성귀수 옮김, 2001, 《조선기행》, 눈빛, 146쪽.)

황소머리(한역연)

[사진2] 황소 머리(조선총독부 엮음, 신종원·한지원 옮김, 2013, 《조선위생풍습록》, 민속원, 173쪽)

감염자의 근육 경련과 탈수로 추해지는 몰골은, 신재효(1812~1884)가 정리한 판소리 『변강쇠가』에서 ‘신사년(1821) 괴질 통에 험악하게 죽은 송장’으로 남겨졌다. 질병에 대한 기억이 후대 문학 작품에까지 수록되었다는 사실은, 당대인들이 느꼈던 공포가 그만큼 대단했다는 점을 웅변한다고 하겠다. 여기에는 조선인들이 병의 발생 원인에 대해 초자연적 힘을 제외하고는 상상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정보의 변형과 왜곡된 소문 역시 사람들의 공포감을 반영하는데,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사망자 숫자의 이면에 담겨 있는 피해의식이다. 『목민심서』와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 의하면 1821년 콜레라로 인해 평양에서 죽은 사람만 수만 명이며, 도성에서 죽은 사람은 13만 명으로 서술했다. 『역서일기(曆書日記)』 또한 “도성 안에서 이 병으로 죽은 사람만 20만 4천여 명이고, 시골은 그 수를 알 수 없으나 서울에 비해 두세 배에 이른다.”라고 했다. 그러나 인구 밀도가 높은 도시에서 더욱 왕성하게 활동하는 병원균의 특성을 고려할 때, 지방의 사망자 숫자는 도성보다 적을 수밖에 없다.

조선인들이 느꼈을 공포는 인구수와 관련한 『실록』 기사를 통해서 더욱 생생하게 접근할 수 있다. 『실록』에는 당시 서울과 지방을 합쳐 사망한 사람의 숫자가 수십만에 이른다고 했다. 그러나 조선 정부가 작성한 1819년 12월과 1822년 12월의 인구 숫자를 비교하면 6,512,349명에서 6,470,570명으로 41,779명만 감소했을 뿐이다. 물론 여기서 조선 정부의 인구 파악이 세금 징수를 위해 필요한 인원만을 호적에 등재하는 불완전한 것이었음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따라서 콜레라로 인한 희생자 숫자는 최소 4만여 명 이상으로는 생각해야 한다. 그러나 사망자가 수십만이라는 기억과 인구수 4만 감소에서 보이는 양자 사이의 커다란 간극은, 지금껏 경험하지 못했던 질병에 대한 공포가 사람들에게 얼마나 크게 다가왔는지를 반영한다 하겠다.

콜레라 창궐 당시 천주교인들과 직·간접으로 접촉할 수 있었던 조선인들의 경우에는 천주교에 귀의하는 방식으로 극한의 공포를 극복하고자 했다. 1784년(정조8) 이승훈(1756~1801)이 북경 천주교회에서 영세를 받고 귀국한 후, 서울과 내포, 전주 등지에는 신앙 공동체가 세워졌다. 비록 신유박해(1801)로 주문모 신부와 초기 천주교회 지도자들이 희생되면서 타격을 입었지만, 1810년(순조10) 이후 재건작업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긔해일기』에 따르면 최창흡과 그의 아내 손씨는 1821년 콜레라로 사람이 많이 죽자 세례를 받고 신앙심이 깊어진 경우였다. 최창흡은 서울 중인집안 출신으로 신유박해 때 형을 잃은 후 천주교도들과 거리를 두었으나, 콜레라로 인해 다시 천주교에 귀의했다. 손씨 역시 신유박해로 집안이 망했으나 콜레라가 극성을 부리자 남편과 함께 세례를 받고 입교했다. 통제할 수 없는 질병 앞에서 인간이 종교에 귀의하는 현상은 지구상에 사람이 생활하는 곳이라면 어디든 동일하게 발생하는 인류의 보편적 현상이었다.

콜레라가 몰고 온 공포와 그로 인해 각인된 기억은 조선 사회에 불안감을 확산시켰다. 다블뤼(Daveluy, 1818~1866)는 프랑스 신부로 1845년 선교를 위해 조선으로 건너온 후 콜레라에 대한 조선인들의 기억을 다음과 같이 남겼다. “조선인들은 그 이야기를 할 때면 벌벌 떤다. 어디를 가나 죽음이요, 약은 하나도 없었다. 어떤 가정이든지 초상이 나고 시체가 있으며, 가끔 행길에 송장이 즐비한 경우도 있었다.” 이로 비추어 볼 때, 1821년 콜레라가 발생하고 한 세대가 지난 시점에서도 조선인들의 의식 속에서는 여전히 공포가 사라지지 않고 있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치료법을 알 수 없는 질병이 하층민의 가슴에 새겨둔 공포와 현실의 삶에서 가중되는 지배층의 수탈은, 최제우(1824~1864)에게 동학이라는 새로운 종교를 조선 사회에 내세우도록 이끌었다. 그는 19세기 농민들이 겪고 있는 상황에 대해 “우리나라는 악질이 세상에 가득하여 백성들이 한시도 편안한 날이 없으니, 이 또한 상해의 운수이다.(『동경대전(東經大全)』)”라고 호소하며 사람들의 마음에 다가갔다. 실제 그 자신이 득도를 내세우면서 사람들의 감정을 불러일으켰던 내용 역시, “한울님을 공경하면 우리나라에 삼년(1859, 1860, 1862) 동안이나 극성을 부리던 괴질(콜레라), 그 괴질에 걸려 죽을 염려 없을 것이다.”라는 점이었다. 그리고 그는 “가련하다. 가련하다. 우리나라 운수 가련하다. … 온 세상 괴질운수 다시 개벽 아니겠는가!”라며 새로운 시대의 도래까지도 외치고 있었던 것이다.

최제우의 이러한 주장은 현실에서 극단의 공포를 불러오는 질병을 동기로 삼고 있었다. 이는 새로운 세상에 대한 민간의 바람을 구하는 방식이었다고 생각된다. 19세기 조선 민간에서 느끼던 공포와 안정에 대한 염원이 기존 사회에 대한 불만과 위기감을 점차 심화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경험하지 못한 괴이한 질병과 그로 인해 민간에 퍼진 두려움은 역설적이게도 누군가에게는 이를 해소하고 사람들을 구원해 내려는 생각을 품도록 만들었다. 여기서 최제우는 19세기 이러한 사회 분위기를 등에 업고 동학으로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다는 안도감을 민간에 제공해 주었다. 이어 그는 새로운 세상인 ‘개벽’까지 언급함으로써 당대인들의 마음속에 깊이 파고들었다. 그렇다면 19세기 조선에서 창궐한 콜레라는 사람들로 하여금 생각의 변화를 촉진시켜 다음 세대로 나아가게 하는 촉매제로 기능했다고 설명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