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강도의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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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강도의 편지

9월 2일 저녁 9시 뉴스를 통해 수감자 관리실태가 부실하다는 내용의 보도를 접했다.  복역중인 강도가 피해자에게 편지를 보내 “판사에게 선처를 호소해 줄 것”을 강요했다는 것이다.  화면에 나온 편지 내용을 보니 기가 막혔다. “강도질로 빼앗은 돈은 다 써버려서 갚을 도리가 없지만 반성하고 있으니 판사에게 너그럽게 판결해 달라고 부탁하라.” 이 사건에 대한 아나운서 멘트는 “피해자를 두 번 울리는 일”이라는 것이었다.

나는 그 강도가 왜 강도짓을 했는지는 모른다.  다만 아직도 강도 피해의 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피해자에게 편지를 써서 ‘강도질한 돈은 되돌려 줄 수 없지만 판사에게 선처를 부탁해달라’고 요구하는 것 하나만 가지고도 그가 얼마나 뻔뻔한 인간인지는 알 수 있었다.

두 시간 후,  나는 MBC 백분토론에서 그보다 더 심한 사람들을 두둔하는 장면을 봐야 했다. 그 강도는 입발린 소리로나마 ‘반성하고 있다’고 했지만,  이영훈 교수는 ‘반성’ 대신에 가해자의 고백적 자기 성찰을 이야기했다.

이영훈 교수는 일본인에 비교하면 한국인이 반성적으로 자기성찰을 하려는 노력이 부족하다고 했다.  맞다.  그런데 왜 그렇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얘기를 하지 않았다.  그는 곳곳에서 그것이 중세 이래 한국인의 전통인 양 이야기 했다.  식민사학의 민족성 이론은 그의 의식 세계 안에 여전히 건재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중세 이래 한국인들의 ‘고질적’ 기질이라는 인식에는 동의할 수 없다.  어느 민족, 어느 개인이든지 가해의 경험을 스스로 반성하는 경우는 드물다. 반성하지 않고서는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을 때,  자신이 가해자의 지위에서 피해자의 지위로 전락했을 때,  그 때 가서야 반성하는 법이다.  전후 청산을 철저히 할 수밖에 없었던 독일인들은 통렬히 반성했고, 흐지부지 해도 되었던 일본인들은 하는 둥 마는 둥 반성했다.  그런데 우리는 어땠는가.

민족운동가들을 잡아 고문하고 학살했던 고등계 형사들이 처벌받거나 반성했던 적이 있는가.  없다.  학생들을 전장으로 내 몬 교육자들이,  철없는 소녀들을 일본군 성노예로 끌고 간 관리들이 공개적으로 피해자들에게 사과한 적이 있는가.  없다.  자신의 공훈을 과장하기 위해 수많은 양민을 학살했던 군인들이 스스로 죄상을 고백한 적이 있는가.  없다.  죄없는 사람들을 법의 이름으로 죽음으로 내몰았던 숱한 조작 사건 담당 판사들이 양심선언한 적이 있는가.  없다.  다리 다친 두루미 사진은 1면 톱으로 내면서 유신체제에 항거하여 자결한 대학생 사건은 1단 기사로 조그맣게 낸 신문이 과오를 뉘우친 적이 있는가.  없다.  그들중 절대 다수는 반성은 커녕 변명조차 해 본 적 없다.

그들은 아직도 자신의 죄상이 세월 속에 묻히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모든 피해자들이 하루 빨리 죽어서 그에 관한 기억조차 사라지기를 기다리고 있다.  군데 군데 찢겨 나가 사실을 밝혀 낼래야 밝혀 낼 수 없게 되어버린 휴지조각같은 기록이 과거에 대한 유일한 기록이 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일제 침략자들과 군사반란자들에게 충성을 맹세한 자들이 남긴 허황된 신문기사가 ‘신빙성 있는’ 자료로 인정받게 될 날을 기다리고 있다.

그런 시절이 온다면 우리의 근대사와 현대사에서 옳고 그름은 물론이요 ‘사실관계’를 확인하는 것조차 불가능하게 될 것이다.  그 때가 되면 역사에서 선악의 기준은 진정 무의미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아직은 많은 피해자들이 눈을 시퍼렇게 뜨고 살아있다.  진정한 사실관계는 가해자들이 남긴 너덜너덜한 종이조각이 아니라 피해자와 그 가족들의 한서린 기억 속에 담겨 있다.  그 기억들이 사라지기 전에 가해자들에게 반성의 기회를 주어야 한다.

죄를 지어도 그 때만 모면하면 된다는 믿음,  손바닥으로도 하늘을 가릴 수 있다는 신념이 가해자들에게서 ‘고백적 자기성찰’의 능력과 기회를 빼앗아갔다.  이런 역사가 반세기 이상 지속되면서 한국민 대다수가 같은 길을 걸었다.  뻔뻔스럽게도 피해자에게 ‘선처를 부탁하는 편지를 써달라’고 요구한 강도는 ‘고백적 자기성찰’ 능력을 잃어버린 한국인의 자화상일 뿐이다.

과거사 규명은 단지 과거의 잘잘못을 따지는 일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이영훈 교수가 누차 강조한 대로 한국인들에게 ‘고백적 자기성찰’의 능력을 되찾게 해 주는 작업이다.  스스로 반성하지 않은 자들에게,  반성의 필요를 느끼지 않은 자들에게,  반성은 커녕 피해자들을 계속 윽박질러온 자들에게 진정한 반성의 기회를 주어야 한다. 그 다음에야 민간 차원에서도 고백적 자기성찰의 움직임이 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