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양 진전사 터를 찾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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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의 겨울답사 이야기

더위가 시작된 요즘 시간대를 잠시 떠나, 지난 겨울에 찾았던 옛 절터 이야기부터 먼저 시작해본다. 서울을 출발한 때는 2005년 2월 3일. 영동고속도로를 타고 속사에서 빠져나와 선림원지를 먼저 찾고, 양양으로 향했다. 진전사 터로 올라가는 길은 그동안 내린 눈이 채 녹지 않아 태반이 빙판이었다.

▲ 진전사는 완만한 비탈을 깎아 세운 절이다. 그래서 초입에 바라본 모습은 이렇다. 축대 위에 석탑의 끝자락이 보이는 정도.

햇살은 맑게 비추고 있었으나 바람은 제법 차가웠다. 녹지 않은 눈이 사방을 둘러싼 풍경도 그렇거니와, 한적한 유적지를 찾을 때 느끼는 청량감은 일상의 스트레스를 푸는 역할도 한다. 초봄 쯤, 새싹이 조금씩 움틀 무렵에 찾아와도 참 좋은 풍경일 것같다는 생각이었지만, 이번 봄에는 때를 놓쳐버리고 말았다.

▲ 절터 위에 올라서 서남쪽으로 바라본 모습. 이상하게도 숲 속에 쌓인 눈은 제법 녹았지만, 석탑 주변은 전혀 녹지 않아 무릎까지 빠진다. 숲 속은 오히려 기온이 좀 높고, 찬 바람을 바로 맞는 한데 평지의 기온이 상대적으로 낮은 까닭인듯.

석탑 주변과 부도탑 주변은 1974년, 75년 두 차례에 걸쳐 단국대에서 발굴했다. 그 전에 이미 [陳田]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기와가 수습된 적이 있었으므로 절 터의 정확한 장소를 확인하는 데는 문제가 없다. 발굴 결과 고려 초기에서 조선 세조 때까지의 연호가 찍힌 기와들이 나왔다. 그래서 이 무렵까지는 절이 유지되고 있다가 이후 언젠가 폐사(廢寺)된 것으로 추정한다.

▲ 석탑의 기단부는 여느 탑과 마찬가지로 2단이다. 아래쪽에는 천인상(天人像)을 새겼고, 윗쪽에는 팔부신중(八部神衆)을 새겼다. 그리고 1층 몸돌에는 사방불을 새겨놓았는데, 이런 형식은 통일신라 후기부터 더러 조성되기 시작한다. 지금 바라보이는 것이 동쪽면이고, 사방불에서 동쪽에는 약사여래가 배치되는 것이 보통임을 확인시켜주듯, 부처님 손에는 약사발이 들려 있다.

 ■ 나말려초의 선승(禪僧)들

아름다운 탑이 있다는 것도 중요하지만, 역사를 공부하는 이에게 어떤 장소가 의미를 갖는 것은, 그곳과 관련된 사람들을 기억하고, 더욱이 그 사람들이 당대(當代)의 역사를 이해하는 데 가볍지 않은 의미를 지닌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신라 말 고려 초, 저명한 선종 승려들이 머물고 거쳐갔던 곳이 바로 이 곳이다. 중국의 달마에 비견되는 ‘해동 선종(禪宗)의 초조(初祖)’로 불리는 원적(元寂) 도의(道義)가 그 주인공이다. 물론 이전에 신행(信行) 등 중국에서 선법(禪法)을 배워온 사람들은 없지 않았으나, 도의 이후에 널리 확산되었기에 그렇게 이해한다.

도의는 당 나라에 들어가 선법(禪法)을 배운 뒤에 귀국하여 법을 펴고자 했다. 821년(헌덕왕 13) 무렵이었다. 그러나 당시 사람들은 “경전의 가르침과 관법(觀法)을 숭상하고 있어 무위임운(無爲任運)의 종(宗)은 아직 이르지 않아 허망하게 여기고 존중하지 않음이 달마가 양(梁)의 무제(武帝)에게 받아들여지지 못한 것과 같았다.”(「보림사 보조선사비」) 도의는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다” 여기고 산림에 은거하였다. 바로 이곳 진전사였다.

이후 도의의 법을 전해 받은 이들이 늘어난다. 도의는 염거화상(廉居和尙)에게, 염거화상은 다시 보조(普照) 체징(體澄)에게 법을 전했다. 체징이 당에 갔다 돌아온 뒤에 헌안왕의 청에 따라 머물기 시작한 곳이 지금의 장흥 보림사였다. 체징의 뒤를 선각(先覺) 향미(辶+向微)가 이었다.

직접 대면하는 것으로만 전법(傳法)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874년(경문왕 14) 이후, 진공(眞空) ○운(○運)은 “나는 남은 힘이 없으니 너희들을 보내겠다”는 스승의 말을 뒤로 하고 이리저리 떠돌다가 한 선사(禪師)를 만났고, 그로부터 도의의 가르침을 전해 듣고서 설악산으로 향했다. 그리고 진전사를 찾아 “(도의의) 영탑(靈塔)에 예배하고 진정한 스승의 자취를 미루어 생각하여 느끼고 영원히 제자의 의례를 폈”다.

진전사 석탑이 있는 곳에서 200m 가량 더 올라가면 도의의 것으로 추정하는 부도탑이 있다. 진공 ○운이 멀리서부터 찾아와 예배하며, 이미 입적한 도의의 가르침을 이어받기로 마음먹은, 바로 그곳이다.

▲ 다른 부도와는 조금 모양이 다르다. 아래는 석탑의 기단, 윗부분은 흔히 보는 나말려초의 부도탑. 탑이든 부도든 그 기원이 유골을 안치하는 데 있다면, 이 부도는 기원에 충실한 모양이라 할 것. 초기 부도의 모습을 논할 때 흔히 언급되는 것이 바로 이 부도.

일연과 진전사

진전사는『삼국유사』의 찬자(撰者) 일연(一然)이 머물렀기 곳이기도 하다.

일연은  9살 소년의 몸으로 홀어머니가 있는 경북 청도의 비슬산 자락을 떠나 멀리 해양(광주 무등산 자락) 무량사로 갔다. 아마 여기서 유교 경전과 한문학을 공부했을 것이며, 아울러 불경도 익혔을 것으로 짐작한다. 그리고 14살 무렵에 출가하기로 결심하고 이곳 진전사로 향하여 대웅(大雄) 스님 밑에서 승려가 된다. 그리고 1227년(고종 14)에 개경에서 치른 승과에 합격할 때까지 이곳에 머물렀다. 약 7~8년 가량을 이곳에 머문 셈이다. 짧지 않은 세월을 이곳에서 보냈던 것이다. 그는 내가 보고 있는 이 석탑을 바라보며 법당을 출입하는 일상을 보냈을 것이다.

일연은 만년에 경북 군위의 인각사(麟角寺)에 머물며 『삼국유사』찬술에 몰두했다. 그가 입적한 뒤에 보각국사(普覺國師)라는 시호가 내리고, 부도와 탑비가 세워진 곳은 인각사였다.

▲ 인각사에 있는 보각국사 비각(왼쪽), 그리고 그 안에 있는 비석. 2003년 인각사를 찾았을 때 찍은 것.

일연의 비는 오랜 세월을 거치며 부서지고 마멸되어 거의 글자를 알아볼 수 없다. 비석이 이 지경에 이르게 된 데에는, 경상도 선비들이 한양으로 과거보러 가는 길에 들러, 비석을 갈아먹으면 합격한다는 속설이 있었던 것도 한몫 했다고 전해온다.

그러나 비문의 내용은 이렇게 마멸이 심해지기 전에 작성된 탁본이 있어 파악 가능하다. 왕휘지의 글자를 집자(集字)한 비석이라 애호가들이 종종 탁본을 해놓은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이 비문이 일연에 관해 정돈된 유일한 기록이다. 그가 진전사에 머물렀다는 기록도 여기에 나온다.

그는 왜 무등산 자락에서 북쪽으로 멀리 떨어진 이곳 진전사까지 가서 출가했을까? 그가 어려서 수학했다는 해양 무량사는 광주 무등산 자락 어디쯤으로 추정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곳은 보조선사 체징이 머문 장흥 보림사와 가깝다. 진전사에 은거하던 도의의 선맥(禪脈)은 염거-보조-선각으로 이어진다. 그래서 무량사를 선종 9산문 중 가지산문(迦智山門)에 속한 것으로 추정하면 해답이 나온다. 진전사 역시 가지산문과 관련된 절이었다. 이렇게 보면 일연이 진전사로 가게 된 것이 자연스럽게 이해된다. 일연은 가지산문에 속한 승려였다.

옛 기록 속에서 진전사는 흔히 [설산(雪山) 진전사(陳田寺)]로 표현된다. 설산은 물론 설악산이다. 이곳은 계절이 바뀌는 늦게까지도, 겨우내 내린 눈이 잘 녹지 않아 흰 자태를 오래 간직하고 있다. 따라서 설산 진전사를 답사하기에는 겨울이 제격이다.

사진은 이 절터에서 설악산을 바라본 모습이다. 왼쪽에 쌓아놓은 것은, 절터 발굴이 끝난 뒤에 모아둔 기와조각들이다. 사진을 찍고 있는 내 오른쪽 뒤에는 덩그런 새 절을 짓는 공사가 한창이었다. 이제 얼마 뒤에 이곳을 다시 찾는다면, 그 때는 더 이상 진전사 <터>가 아닐 지도 모르겠다.

진전사 터를 떠나 강릉으로 가는 국도 변에서 맛본 시원한 메밀 막국수가 기억에 남는다.                              하일식(고대사분과, 연세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