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을 위한 역사15] 지배연합을 지배한 재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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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배연합을 지배한 재벌

 

이정은(현대사분과)

한국역사연구회는 <시민의 한국사> 출간에 앞서 <한겨레21>에 15회 분량의 ‘시민을 위한 역사’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아래의 글은 현대사분과 이하나 선생님이 기고한 글입니다.
(http://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42405.html)

5·16 군사 쿠데타 이후 부정축재자들은 법정에 섰지만(위쪽) 그들의 처벌 수위는 정권을 거치며 계속 낮아졌다. 1963년 3월15일 현역 장병들이 군정 연장을 요구하자(아래쪽) 이튿날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은 ‘군정 4년 연장’을 발표했다. 혼란의 시기에 재벌들은 군사정부에 힘을 실어줬다. (한겨레, 연합뉴스)

 

온갖 의혹을 뒤로하고 롯데월드 타워는 거대하게 솟아올랐다. 롯데 수뇌부의 수천억원대 세금 포탈과 전 정부와의 커넥션에 대한 검찰수사가 진행 중이지만, 들려오는 뉴스로는 용두사미 수사가 예견된다. 이미 다른 한쪽에서는 경제 살리기를 명분으로 천문학적 액수의 횡령·배임 범죄를 저지른 재벌 총수에 대한 특별사면·복권이 행해졌다. 이러한 사면이 매년 반복되어 온 연례행사라면, 정부의 친재벌 ‘경제 활성화’ 정책은 365일 가동 중이다.

부정축재 환수 내건 박정희, 이병철 만나더니…

돈을 가진 이와 권력을 쥔 이가 유착하지 않은 역사가 어디 있겠느냐만, 현재 한국은 단순한 정경유착을 넘어 사적-구조적으로 강고한 친재벌 커넥션이 ‘지배연합’으로 사회전반을 이끈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이 현상의 역사적 출발점은 어디쯤일까? 한국자본주의의 성장발판이 본격 주조되기 시작한 1960년대를 훑어본다면 1961년 5·16군사 쿠데타 이후의 부정축재자처벌 과정을 짚어볼 수 있겠다.

1950년대 부정·불법을 넘나들며 원조물자와 귀속재산 불하, 투융자 기회를 독식하며 몸집을 불린 한국의 대기업은 1960년 4·19 혁명 직후 처음으로 발목을 잡혔다. ‘부정축재자’를 엄벌해야 한다는 강력한 여론 앞에 장면 정부는 처벌법을 준비했다. 하지만 용의 선상에 오른 자본가들은 처벌이 기업 의욕을 꺾고 경제를 파탄나게 할 것이라며 조직적으로 대응했다. ‘경제제일주의’를 내세운 장면 정부도 이들과 공조를 꾀했고, 처벌 수위는 계속 낮춰졌다.

1961년 5월 16일, 장면정권을 끌어내리고 쿠데타로 집권한 군사정부는 다시금 강력한 부정축재자 처벌을 내걸었다. 하지만 초창기의 단언과 달리 군사정부의 태도 역시 몇 개월 안 되어 급속히 선회했다. 부정축재 환수 통고액은 절반으로 줄었고, 처벌방안은 완화되었다. 세간에는 박정희 당시 최고회의 의장이 대표적 부정축재자였던 삼성 이병철 회장과 독대한 후, 국가재건을 위해 구제 결단을 내렸던 것이라고 영웅담처럼 알려져 있다. 하지만 군사정부가 직면했던 구조적 제약과 저간 사정이 좀 더 고려될 필요가 있다.

쿠데타에 대한 미국의 지지를 얻기 위해 군사정부는 “어디까지나 자본주의경제질서의 유지”와 “자유로운 기업 활동을 적극 신장”시킨다는 원칙을 선언해야 했다. 경제개발에는 막대한 재원이 뒷받침되어야 했지만, 1950년대 후반부터 미국 원조는 감소 중이었다. 이를 대신할 외국으로부터의 차관 도입이 시급한 과제로 부상했다.

당시 세계경제질서에서는 상업차관은 물론, 국제기구에 의한 공공차관에서도 민간 기업이 기본 계약 단위였다. 일례로 군사정부가 쿠데타 직후 외자조달을 타진했던 서독과 이태리 상사는 민간회사와의 거래가 가장 우선이어야 한다며 정부가 아닌 한국 민간 실수요자와의 만남을 요구했다. 군사정부는 외자도입에 앞장 설 국내 민간 기업의 존재가 필요했다.

쿠데타 이래 경기침체까지 가속화 중이었다. 호기롭게 연평균 경제 성장률 7.1%를 목표로 내건 군사정부는 다급해졌다. 당시 주한미대사관은 현재의 경제를 더 악화시킬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에 군사정부가 재벌에게 강한 ‘액션’을 취하지 못한다고 보았다.

투자와 외자 교섭 볼모로 잡은 전경련

그리고 이 앞에 군사정부의 명령을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조절·변경하고자 끊임없이 움직이던 대자본가 세력이 있었다. 군사정부로부터 경제재건의 헌신을 요청받고 1961년 7월 지금의 ‘전국경제인연합회’의 전신인 ‘경제재건촉진회’를 발족(한 달 뒤 ‘한국경제인협회’로 개칭, 이하 전경련)했던 당시 부정축재 대자본가들은 자신들의 과거 외자 교섭 경험과 자본 동원 능력을 적극 앞세우며 군사정부에 어필했다. 침체된 경기를 살리고 사업 자신감을 회복하려면 먼저 ‘부정축재자’ 처벌이 완화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61년 10월초 당시 주한미대사관 측과 만난 자리에서 이병철 회장을 위시한 전경련 지도부는 부정축재 선고 벌과금을 줄이기 위한 막후교섭을 하는 중이며 군사정부에 다음을 제안해 놓았다고 밝혔다. ①벌과금 납부 대신에 그에 상당한 금액을 자신들이 제안하는 공장(비료, 시멘트, 철강, 합성섬유, 혹은 정유공장)에 투자하겠으며, ②자신들은 해외 차관교섭에 나서겠다는 것, ③그 대신 정부는 금융지원을 해달라는 것, 그리고 ④지어진 공장은 정부가 해당 기업가에게 원금에 6%를 더한 가격으로 다시 팔라는 것을 골자로 했다.

그 후 벌과금 통고액은 반으로 줄었고, 주한미대사관 측조차 전경련의 영향을 받았다고 평가한 법안이 10월 26일 공포되었다. 벌과금의 직접 납부 대신 원하는 공장을 건설하여 주식으로 대납할 수 있도록 한 부정축재처리법 개정이었다.

그 직전, 개정안 허가여부를 놓고 1961년 10월 23일에 열린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는 전경련을 대변하는 입장 발언이 넘쳤다. 박정희 의장 외 주요 참석자들은 “오늘날의 경제침체는 부정축재자들의 기업의욕 감퇴에 의한 것이다”, “부정이득자에게도 기회를 주자”, “기업주의 창의는 무시 못 하는 것이다” 등의 발언을 이어갔다. 민간 기업가가 필요하다면 왜 굳이 부정축재자들인가라는 반대 의견도 있었지만, “외자 교섭에는 장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그들의 교섭경력이 필요”하며, “신인을 내세워 5개년계획의 외자도입에 얼마나 성과를 올릴 수 있는가 의문”이라는 반박이 뒤따랐다. 결국 부정축재처리 개정 법률안은 7대 1(기권)로 통과되었다. 쿠데타의 경제적 성과를 빠르게 가시화해야 하는 군사정부의 조급함이 부정축재 자본가들이 내미는 손을 덥석 잡게 만들었다.

이후 부정축재자들은 제1차 경제개발계획의 주요 공장건설을 나눠 맡았다. 집중적인 금융지원이 이어졌고, ‘차관교섭’을 앞세운 해외 출국은 일상화되었다. 결과적으로 공장 건설 성공 여부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높은 인플레(연평균 20~30%)를 감안하지 않은 기존 벌과금 금액을 3~4년 후 현금이나 현물로 납부하면 그만이었다. 공장을 완공했다면 손쉽게 개인소유로 전환시켰고, 건설에 실패했어도 또 다른 차관 사업 추진에 나설 수 있었다. 전경련이 군사정부에 제안했던 원 내용보다 더욱 구미가 당기는 귀결이었다.

재벌의 건의 창구였던 중정과 청와대 비선

군사정부에 대해서는 정치적 지지로 화답했다.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이 군정 4년 연장을 발표(1963.3.16)하여 혼란이 가중되던 시기, 주한미대사관 측과 만난 전경련 주요 인사들은 군사정부 편임을 분명히 했다. 현재는 민주적 절차보다 안정과 질서 속의 느린 변화가 더욱 중요하기에 “덜한 악”을 택한다고 표현하면서도, 군사정부의 원칙이 더 이어지길 바라며, 허정이나 윤보선은 근대적 지도자로서 효과적인 역할을 할 수 없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러한 지지가 1963년 10·15대통령 선거에서 15만여 표라는 역사상 가장 근소한 차이로 박정희 후보가 윤보선 후보를 이길 수 있었던 데 큰 자원이 되었을 것임은 쉽게 짐작 가능하다.

큰돈이 필요했던 선거는 대자본가와 정치세력 간의 후원관계 결성을 가속화했다. 재벌들은 이익이 될 것 같은 사업에 경쟁적으로 뛰어들었고 이를 보장받을 정치적 연줄을 함께 갖춰갔다. 청와대에 매달 정기적으로 송금했다는 증언 역시 상당하다. 그리고 이는 한 쪽의 일방 착취가 아닌 단단한 ‘상호의존의 관계망’을 형성했다. 주요 경제정책은 특정 재벌의 이익에 맞춰 수시로 조정·변경되었다. 삼분폭리, 특혜융자, 사카린밀수 등 재벌 관련 사건이 터지면 정부와 공화당이 이를 무마하려 먼저 나섰다.

대기업 간 경쟁영역을 넘어선 공통이해의 추구에는 전경련이 앞장섰다. 전경련과 정부와의 간담회는 수시 개최되었다. 전경련이 일정을 공개하기 시작한 1964년도 주요 정관계 인사와 전경련 차원의 회합은 ‘공식’ 횟수만도 약 26회가 넘었다. 비공식적 소통은 더 긴요했다. 전경련 상근자들에 의하면 당시 핵심적인 정책 건의 루트는 중앙정보부였다. 청와대 비선도 점차 부상했다.

이러한 회합은 정부 지시하달의 도구가 되기도 했지만, 대기업의 각종 요구를 전달하는 창구이기도 했다. 노동계는 물론 여타 시민 계층은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상호이해를 나누는 상시적 협의체계의 작동이었다. 전경련은 이를 통해 행한 수많은 대정부 건의와 정책제안에 대해 1971년 다음과 같이 자평했다. “비록 그것이 즉각 반영되지 못하여 시기의 빠르고 느림만은 있을지언정, 후에 이것을 분석하여 보면 종국에 가서는 그 대부분이 채택되었다.”

미 원조당국은 1967년 당시 한국 정부-재벌 관계를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본질적으로 매우 가까운 상호의존(interdependence)관계로서, 상대방에 의해 포획되지도 않는 반면 상대방으로부터 멀리 도망갈 수도 없다.” 원색적 이해로 가득 찬 이 상호의존관계의 작동에 민주주의와 같은 가치는 낄 틈이 없었다. 국가경제 지분을 손쉽게 불리던 재벌은 기꺼이 독재의 편에 섰다. 삼선개헌과 유신체제가 선포될 때 전경련은 “시의에 맞는 결단”이라며 환영했다.

이상은 어디까지나 성장 정책에 수반되는 각종 모순보다는 성장 자체를 위한 요소 투입을 가장 중시했던 50여 년 전의 모습이다. 하지만 지금의 젊은 세대에게도 낯설지 않은 장면일 것이다. 재벌을 상대화시키는 대안 강구가 좀처럼 탄력 받아본 적 없는 사이, 독재정권은 권좌를 지키지 못했지만 재벌은 훨씬 더 강력해졌다.

재벌 총수의 사면이 국가경제의 실질적 향상을 낳거나, 재벌의 이익이 사회 구성원의 삶의 질 향상으로 이어진다는 지표는 현재 찾아보기 어렵다. 오히려 1960년대 후반부터 시작한 다음 패턴, 즉 재벌의 과잉투자와 부실경영이 국가경제 전체를 흔들고 곧이어 거대한 공적자금이 투입되는, 그리고 수 년 뒤 다시 비슷한 위기가 반복되는 현상만이 변함없이 진행 중이다.

50년 지난 지금도

재벌을 앞세운 성장 구호에 발목 잡히기보다, 질기게 이어져 온 한국적 지배연합에 의문을 던지고 비판하기를 주저하지 말아야겠다. 과거 정권이 재벌과 연관된 경제 비리를 덮으려할 때마다 그나마 처벌에 진척을 보였던 선례에는 모두 쉽게 가라앉지 앉았던 비판여론과 운동이 있었다. MB정권과 롯데의 관계는 파헤쳐질 기미가 없고, 현 정부는 재벌이 준 돈으로 미심쩍은 재단을 설립·운영 중이라는 ‘헬 조선’의 일상에서, 더 이상은 가만히 있을 수 없다는 시민의 분노가 거대한 위력을 발휘하며 역사의 명장면을 남길 날을 고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