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을 위한 역사] ④ 영웅이 아니라 나라가 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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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이 아니라 나라가 이겼다

이종서(중세1분과)

한국역사연구회는 <시민의 한국사> 출간에 앞서 <한겨레21>에 15회 분량의 ‘시민을 위한 역사’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아래의 글은 중세1분과 이종서 선생님이 기고한 글입니다.
(http://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41483.html)

  대한민국의 역사는 ‘국난 극복의 역사’라고 할 만큼 수많은 외세의 침략을 극복하며 전개됐다. 고구려는 여러 차례 중국의 침략을 물리쳤으나 마침내 당에 패해 멸망했다. 고려는 거란(요), 몽골의 침략을 극복했다. 조선도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위기를 넘기며 생존했다. 국난을 겪으며 영웅들의 이야기가 만들어져 후세로 전해졌다. 고구려의 을지문덕, 고려의 강감찬, 조선의 이순신은 지금도 위인으로 추앙받고 있다.

영웅사관은 역사적 사실인가


[사진1] 강감찬(왼쪽)은 1019년 거란의 10만 대군을 물리치는 데 앞장섰지만 ‘영웅’의 칭호는 그만의 몫이 아니다. 강민첨(오른쪽) 같은 훌륭한 장군들이 그의 곁에 있었고, 아래로는 전쟁에 참가한 고려 민중 20만 명이 있었다.  ⓒ국립중앙박물관


영웅들이 이끌었던 전쟁이나 전투에서 전제되는 것이 있다. 방어자인 우리는 소수였으며, 그나마 겁먹고 무기도 변변치 않은 약소국이었다는 것이다. 반면에 침략자는 정예병으로 구성된 대군이었다. 이 때문에 우리의 싸움은 들판에서 격돌하는 육박전이 아니라, 기묘한 꾀를 써서 이기거나 성을 굳게 지키는 방식으로 진행됐다고 여긴다. 아울러 전쟁의 승리는 강건한 국가 체제와 백성의 단합된 힘 대신 몇몇 ‘영웅적인 지휘자’ 덕분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을지문덕, 강감찬, 이순신은 나약한 군대로 강적을 물리친 영웅이며, 이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대한민국이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영웅에 대한 또 다른 전제도 있다. 공을 세운 영웅은 권력자의 시기와 질투를 받아 훗날이 편치 못하다는 것이다. 관직에서 물러나 목숨을 부지하면 다행이고, 잘못하면 역적으로 몰려 죽는다. 이순신이 사형의 위기에 처했다가 백의종군으로 풀려난 것은 대표적인 사례다. 이순신이 노량해전에서 전사하지 않았다면 그의 말로 역시 예측하기 어렵다는 게 일반적인 인식일 것이다.

  그런데 대한민국의 긴 역사가 소수 영웅에 의해 지탱돼왔다든지, 이들이 없었다면 지금의 대한민국 또한 없었다고 여기는 것은 역사적 사실과 부합하는 인식일까. 미리 말하지만, 적어도 고려 이전 시기에 이같은 전제를 설정하는 것은 온당치 않다. 영웅사관의 허구성은 역사서의 기록만 봐도 금방 확인된다.

  강감찬의 사례를 보자. 1018년(현종 9년) 12월, 고려는 위중한 도전에 직면했다. 앞서 두 차례나 고려를 침략했던 거란(요)이 다시 10만 군대를 보내 공격해왔다. 총사령관 강감찬이 이끄는 고려군은 귀주에서 거란군을 무찔러 나라를 수호했다. 이 빛나는 승리가 ‘귀주대첩’이다.

  소배압이 이끄는 거란군이 국경을 넘자 고려는 강감찬을 상원수로, 강민첨을 부원수로 임명했다. 강감찬은 이미 70살을 넘긴 노령이었다. 이들은 군대를 이끌고 서북쪽 흥화진에 이르러 강물을 막았다가 터뜨리는 ‘수공’으로 다수의 거란군을 무찔렀다. 그 유명한 ‘소가죽 작전’이다.

  그러나 소배압은 그대로 물러나지 않았다. 그는 속전속결 전술을 택했다. 곧바로 개경으로 진군했다. 강민첨의 군대가 추격해 또 크게 이겼으나, 거란군은 아랑곳하지 않고 남진을 계속했다. 이듬해 1월, 개경 밖 100리(39.3km) 지점에 이르렀다. 국왕은 개경 밖의 건물을 헐고, 곡식을 옮기는 ‘청야전술’로 전면전을 준비했다. 아울러 거란의 척후병 300여 명이 개경 교외의 금교역에 잠입하자 심야에 습격해 모조리 살해했다. 거란군이 군대를 돌려 퇴각하기 시작했다.

  고려군은 퇴각하는 거란군을 북쪽으로 추격했다. 쫓기는 입장이 된 거란군이 결사적으로 저항했다. 다급해진 거란군이 귀주성 교외에서 방향을 돌려 남쪽으로 진을 치고 고려군과 격돌한 것이다. 막상막하의 접전이 계속됐다. 때마침 김종현이 이끄는 고려군이 가세한데다, 기상 상황도 고려군에 유리하게 전개되자 거란군은 마침내 전의를 잃고 궤멸했다. 이 싸움을 <고려사>에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김종현이 군사를 이끌고 도착한데다 갑자기 비바람이 남쪽에서 불어와 깃발이 북쪽을 가리켰다. 우리 군대가 기세를 타고 용기백배하여 맹렬하게 공격하니 거란 군대가 드디어 패주하기 시작했다. 우리 군대가 석천을 건너 반령에 이르기까지 추격했는데, 시체가 들을 덮었으며 사로잡은 포로와 노획한 말·낙타·갑옷·병장기를 다 헤아릴 수 없었다. 살아서 돌아간 거란군은 불과 수천 명뿐이었다. 거란이 이토록 참혹하게 패배한 적은 없었다. 거란의 임금은 패한 소식을 듣고 크게 노하여 ‘네가 적을 가볍게 여겨서 적국 깊숙이 들어갔다가 이 지경이 되었으니 무슨 면목으로 나를 보겠는가? 너의 낯가죽을 벗긴 뒤에 죽일 것이다’라고 사자를 보내 꾸짖었다.”


20만 대군은 왜 얘기하지 않는가


[사진2] 국왕과 총사령관, 고려민들이 하나로 힘을 모아 나라를 지킨 전쟁이 귀주대첩이다. 김식이 <고려사>에 묘사된 거란군 섬멸 장면을 토대로 그린 ‘귀주대첩 기록화’. ⓒ국립중앙박물관

강감찬이 군대를 이끌고 개선하자 국왕 현종은 황해도의 영파역까지 나아가 환영의례를 베풀었다. 화려한 무대 위에서 기예와 음악을 공연하며 장병을 위로하는 가운데, 왕은 여덟 종류의 ‘금꽃’을 강감찬의 머리에 꽂아주었다. 왼손으로 강감찬의 손을 잡고 오른손으로는 술잔을 잡고서 위로와 감탄의 말을 그치지 않자 강감찬은 큰절을 하며 몸 둘 바를 몰랐다. 지극히 아름답고 유쾌한 광경이었다.

  그러나 강감찬은 개경으로 돌아와 국왕에게 사직을 청원했다. 당시 고려 관리의 퇴직 연령이 70살이었다. 현종은 허락하지 않았다. 의자와 지팡이를 하사하고, 사흘에 하루만 근무하는 특전을 줬다. ‘재상’의 지위와 ‘공신’의 영예도 베풀었다. 이듬해 강감찬이 다시 사직을 요청하자, 작위를 더 높였다. 1030년에는 관리의 최고 지위인 문하시중에 임명됐다. 강감찬이 84살의 나이로 숨을 거두자, 국왕은 사흘 동안 조회를 정지하고 애도했다. 조정에서 장례용품과 부의를 풍부하게 지급하고 조정의 관리들이 모두 장례식에 참석하게 하였다. 강감찬은 삶뿐 아니라 죽음까지 영예로웠다.

  강감찬이 말년에 영화를 누린 것은 ‘복종·겸손’ 같은 개인적 인성 때문이 아니었다. 국난 극복을 위한 전쟁을 지휘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전쟁에서 이긴 것은 ‘유능한 한 명의 영웅’ 덕분이 아니었다. 오히려 전쟁에서 승리한 원동력은 일선에 나섰던 무수한 민중에게서 찾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거란의 10만 대군에 대항해 고려가 편성한 방어군 인원이 무려 20만8300명이었다. 거란군의 두 배가 넘는다. 강감찬이 아니었어도 승리를 기대할 만한 대군이다. 소가죽을 이용한 수공작전도 그렇다. 이 전투에 기병 1만2천 명이 동원됐다. 가둔 물을 터뜨려 적의 대열을 어지럽히는 동시에 매복했던 기병이 적을 타격해 대승을 거뒀다.

  귀주대첩 이전에도 이미 대군을 동원한 혁혁한 승리의 전과가 있었다. 강민첨이 자주에서 대승을 거뒀고, 조원도 마탄에서 1만 명에 이르는 적군의 목을 베었다. 거란군이 개경에 육박하자 강감찬은 김종현에게 병사 1만 명으로 개경 수비를 맡겼고, 동북면 병마사도 3300명을 보냈다. 이들 군대가 때맞춰 귀주 교외에서 합세해 거란군을 섬멸한 것이다.


고려는 약소하고 무기력했나

  승리의 궁극적인 주역은 백성으로 구성된 20만여 명의 병사였다. 고려에서 20만이 넘는 방어군을 편성할 수 있었던 것은 중앙정부의 강압적인 명령이나 감시 체계만으로 설명할 수 없다. 당시 고려는 극히 소수의 지방에만 상징적으로 관리를 파견했다. 지방 운영은 지방 세력의 자치에 맡겼다. 그러므로 방어군 동원은 지방 세력의 자발적인 협조가 없으면 이루어질 수 없었다. 또한 들판에서 격돌하는 대규모 전투는 병사들의 충분한 무장과 훈련뿐 아니라 개별적인 전투 의지가 없으면 불가능한 것이다.

  강감찬이 이끄는 군대는 ‘강감찬의 군대’가 아니라 ‘고려의 군대’였다. 장병들은 고려와 고려의 일부분인 그들의 지역에 충성하는 군대였다. 위로 국왕과 총사령관부터 아래로 개별 병사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각자의 역할을 충실히 이행해 승리를 거둔 것이다.

  역사 속에서는 분명 ‘영웅’이 있었기에 지금의 이 나라가 있다는 판단이 가능한 경우가 있다. 영웅은 지배자가 부패하고 백성이 무기력해진 시기에 출현했다. 또 영웅은 암울하고 나약한 시대에 출현했다. 국왕은 압록강가에서 명나라에 애걸하고 백성은 흩어진 와중에 홀로 승리의 행진을 이어간 이순신 장군이 그런 경우에 해당할 것이다. 고위 관료가 나라를 팔아먹고 국민은 숨이 막혀가던 암흑기에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안중근 의사도 영웅에 해당할 것이다.


백성과 국민을 경시하는 의식?

  강감찬은 지혜롭고 노련한 총사령관이었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영웅은 아니었다. 강감찬이 영웅으로 떠오른 대신 고려는 약소하고 무기력한 나라처럼 인식되고 있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고도 하고 “현재를 이해하고 미래를 준비하는 길잡이”라고도 한다. 역사는 현재 우리에게 유용한 과거의 사실이자 이에 대한 해석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강감찬에게 영웅의 이미지를 부여하는 것은 우리의 현재와 미래에 어떤 도움이 될까. 강감찬의 경우처럼, 특정 인물을 미화해 영웅이라고 찬양하기보다 고려가 침략받았을 때 체계적이고 조직적으로 대응할 수 있었던 이유를 분석하는 것이 필요하다.

  영웅을 기리기보다 영웅이 나오게 된 이유를 분석하고 반성하는 것이 우리에게 도움이 된다. 그리고 영웅을 만들고 추앙하는 역사의식은 백성과 국민을 경시하는 의식과 짝을 이루는 것이 아닌지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