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이야기] PROLOGUE ; 서울, 신시(神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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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이야기 1 – PROLOGUE ; 서울, 신시(神市)

처용가(處容歌) 첫 구절 ‘東京明期月良’을 양주동(梁柱東)은 ‘새벌 발기다래’로 풀었다. 매일 아침 새로 해가 뜨는 동쪽이 ‘새’임은 해가 지는 서쪽이 ‘헌’ – 또는 하늬 – 이 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니 의문의 여지가 없지만, 경(京)을 ‘벌’로 푼 것이 맞는지는 잘 모르겠다. 나는 고어에 문외한이지만 ‘울’로 푸는 것이 옳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해 본다. 경(京)이란 글자가 울타리를 쳐 놓은 일정한 구역에 육방(六方)으로 길이 난 형상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렇게 보면 ‘새벌’ 보다는 ‘새울’이 더 어울리는 풀이가 될 터인데, 양주동(梁柱東)은 아무래도 동경(東京)을 서라벌이니 서나벌이니 하는 말과 연관짓는데 집착했던 것 같다. 그거야 어찌되었던, 새벌이니 새울이니를 따지는 게 중요한 건 아니다. 양주동이 ‘새벌’로 풀어 놓은 것은 요컨대 그것이 ‘서울’의 옛 말이었음을 밝힌 것만으로도 충분한 의미가 있다. 새벌 – 서라벌 – 셔 – 서울로 변했다는 것이 통설인데, 문제는 ‘서울’이라는 말이 애당초 무슨 뜻으로 쓰였을 것이냐에 있다.

이중환(李重煥)은 택리지(擇里志)에서 서울이라는 말과 관련해 다소 우스꽝스러운 속설을 소개하고 있다. ‘(한양에 새 도읍을 정한 후) 외성(外城)을 쌓으려고 하였으나 둘레의 원근을 결정짓지 못하던 중 어느 날 밤 큰 눈이 내렸다. 그런데 바깥쪽은 눈이 쌓이는데, 안쪽은 곧 녹아 사라지는 것이었다. 태조가 이상하게 여겨 눈을 따라 성터를 정하도록 명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지금의 성 모양이다.’ 그래서 눈이 쌓여 생긴 울, 곧 ‘설(雪)울’이라는 말이 생겼고, 그것이 ‘서울’로 와전되었다는 것이다. 이 말대로라면 서라벌이니 새벌이니 하는 말은 서울과 아무 관계도 없게 되어 버리는 것이니, 이중환이 살던 무렵에도 고어는 이미 사어(死語)가 되어 버렸던 모양이다.

어쨌든 양주동의 풀이에서 뜻을 취해 본다면, 서울이란 ‘새로 생긴 벌’이나 ‘새로 만든 성’ 정도의 뜻으로도 풀어 볼 수 있을 터인데, 그런 풀이가 꼭 타당한 것 같지는 않다. 이 대목에서는 이른바 ‘재야 학자들’의 주장에도 잠시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어떤 이들은 소도(蘇塗)의 ‘소’와 새벌의 ‘새’가 지닌 음가의 유사성에 주목하여 고어(古語)에서는 ‘새’, ‘소’, ‘쇠’가 모두 같은 뜻이었다고 추정한다. 그리고 그 말은 ‘솟다’나 ‘솟대’에서처럼 높이 솟아 있음, 또는 신성함의 뜻을 담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서울이라는 말의 본래 뜻에 관한 한 이 주장이 설득력이 있다고 본다. 그 주장에 따르면 서울이란 ‘솟은 벌’이나 ‘솟은 울’, 즉 ‘솟벌’, ‘솟울’에서 온 말이 된다. 철원(鐵原)을 풀어 쓰면 ‘쇠벌’이니 이 역시 ‘서울’을 의미한다고까지 주장하는 데에 이르면 고개가 갸웃거려지기는 하지만, 조선 후기 서울을 수선(首善)이라 쓰기도 했던 것을 생각하면, 서울이 ‘가장 좋은 곳’, ‘신성한 벌(또는 울)’이라는 뜻으로 쓰였을 것이라 보아도 좋을 듯 하다.

멈포드는 도시의 기원을 성소(聖所)에서 찾았다. 구석기인들이 동굴 벽에 그림을 그려 놓았던 것을 단순한 창작 욕구의 발현이라고만은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은 정주생활이 불가능했지만, 그들의 기나긴 여정 속에서 수시로 – 비록 자주는 아닐지라도 – 찾아오는 곳을 성소(聖所)로 삼았고, 그곳에 그들의 신앙심을 표시해 두었다. 그렇게 해서 동굴은 도시의 배아가 되었고, 거기에는 이미 도시가 갖추어야 할 최소한의 요소들이 자리잡게 되었다. 성채(城砦)로 둘러쌓인 공간, 즉 도시가 만들어진 것은 인간이 동굴을 벗어난 뒤의 일이다.

마이크로소프트사가 만든 꽤 오래된 게임 – the Age of the Empire이든가 – 의 규칙은 수도와 신(神)의 관계에 대한 역사적 이해에 바탕해서 만들어졌다. 게임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도시 한복판에 거대한 신상(神像)을 먼저 만들거나, 아니면 적국 도시의 신상(神像)을 파괴해야 한다. 고대의 – 사실 현대에도 – 모든 전쟁은 도시의 신상(神像) 앞에서 경건하고 엄숙한 출정 의식을 거행함으로써 시작되었고, 적의 도시 중심부에 있는 신상(神像)을 철저히 파괴함으로써 끝났다. 근래에는 내란에서도 ‘동상(銅像)’을 허무는 것이 ‘싸움 끝’을 알리는 상징적 행위가 되고 있지 않은가. 부시가 버릇처럼 ‘십자군’ 운운하는 것이 비단 그의 ‘기독교적 경건성’에만 관계되는 것은 아닐 터이다.

정교 분리의 원칙이 확립되기 이전까지, 모든 국가의 판도는 원칙적으로 종교적 동일체여야 했고, 수도는 정치의 중심일 뿐 아니라 종교의 중심이기도 했다. 시대를 거슬러 올라갈수록, 종교는 세속 정치에 대해 상대적, 절대적으로 우위에 있었으니, 수도를 ‘신의 땅’, ‘신의 울’로 부른 것은 당연한 일이었으리라. 그렇게 본다면 삼국유사(三國遺事)에서 환웅(桓雄)이 처음으로 만든 도시를 ‘신시(神市)’라 했던 것도 쉬 이해가 된다. 서울이라는 말의 뜻을 따서 한역(漢譯)하면 바로 ‘신시(神市)’가 되는 것이니까. 동일한 종교권역 내에서도 신시(神市)가 여럿 있었을 수는 있겠지만, 권역 내의 정치적 통합성이 강화되면 신시(神市)는 결국 하나일 수밖에 없을 터. 국어사전에도 서울은 달랑 ‘수도(首都)’로만 정의되고 있다.

조선시대에도 ‘서울’이라는 단어는 한성부(漢城府)나 한양(漢陽), 경조(京兆), 경도(京都), 수선(首善), 장안(長安) 등의 단어보다도 더 일반적으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 말기 이 땅에 들어온 외국인 선교사들이 우리 말을 배우면서 공식 명칭인 ‘한성부’ 대신에 ‘서울’을 썼던 것은 그 때문이 아니었을까. 속담에도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거나 ‘말은 제주로 보내고 사람은 서울로 보내라’는 식으로 ‘서울’이라는 말이 자주 등장한다. 다만 이 말이 본래 ‘순 우리말’인 관계로 한자로 표기하는 것이 불가능하여 공사상의 문서에 ‘서울’로 표기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한글 소설에서나 간혹 튀어나오는 정도였으니 오죽하면 우리 말을 못잡아 먹어 안달인 서울 시장이 서울의 새 한자 표기법을 찾아내라고 ‘현상금’까지 걸었을까.

우리 역사상 공식적인 문건에 ‘서울’이 표기되는 것은 독립신문이 창간된 1896년 4월부터의 일이었다. 국문판에서는 ‘서울’로, 영문판에서는 ‘Seoul’로 각각 그 발행지가 표기되었던 것이다. 다른 모든 신문이 ’황성(皇城)‘이라는 말을 썼음에도 불구하고 왜 유독 독립신문만이 ’서울‘이라는 표현을 고집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하기야 ’짐(朕)이 곧 국가(國家)‘라는 식의 ’인신(人神)‘적 절대 황권을 추구했던 광무 년간에는 신시(神市)나 황성(皇城)이 같은 뜻이었을 터이니, 순 우리말로 바꾸면 그 또한 서울이 아닌가. 다만 ’서울‘이 선교사를 비롯한 외국인들에게 익숙했던 영어표현이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짐작할 뿐이다. 어쨌든 그 결과로 ’서울‘이라는 말은 제한적으로나마 보통명사에서 고유명사로 – 비록 당시까지는 외국인들에게 국한된 현상이었겠지만 – 바뀌었다. 외국인들도 지도를 제작하면서 한성부가 아니라 ’Seoul’로 표기하였다.

일제 강점기에 한성부는 경성부(京城府)로 그 명칭이 바뀌었고, 그 지위도 한 나라의 수도(首都), 신시(神市)에서 일본 제국의 일개 지방도시로 전락하였지만, 대다수 사람들은 여전히 ‘서울’이라는 표현을 즐겨 썼다. 잡지 서울이 발간되었고, 「서울에 딴스홀을 허하라」는 글도 나왔다. 공식 명칭 게이죠와 민중 세계의 언어 서울은 그 내용상의 현격한 괴리에도 불구하고 공존하였고, 혼동되지도 않았다. 동경(東京)은 동경(東京)이거나 도오꾜-였을 뿐, 결코 ‘서울’이 되지 못했다. ‘서울’이라는 말은 그렇게 식민지 예속민들이 민족해방의 염원을 꼭꼭 감춰 놓은 ‘비밀의 언어’로 남았다.

사진)1920년대 후반 종로 ; 출처 – 서울시청 홈페이지 서울갤러리

 

그러나 해방 후에도 한동안 서울의 공식 명칭은 여전히 ‘경성부(京城府)’였고, 그 행정수반은 경성부윤이었다. 경성부가 ‘서울시’로 바뀐 것은 해방 1년째 되는 날인 1946년 8월 15일의 일이었다. 이 날 전문 7장 58조로 된 서울시헌장이 발표되었는데, 그 제1장 제1조에 ‘경성부를 서울시라 칭하고 이를 특별자유시로 함’이라고하여 이 때부터 ‘서울’이 공식 명칭이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당시 서울 시장이었던 김형민(金炯敏)은 이와 관련해 씁쓸한 회고담을 전한다. 광복이 되었으니 왜인(倭人)들이 제멋대로 갖다 붙힌 ‘경성부’라는 이름을 버리고 새 이름을 써야 한다는 데에는 사람들이 대체로 동의했지만, 무슨 이름을 붙일 것이냐에 대해서는 의논이 분분했다고 한다. 옛 이름인 한성부를 쓰자는 사람이 많았지만, 이승만의 호를 따서 ‘우남시(雩南市)’로 하자는 의견도 만만치 않았다고 한다. 김형민은 ‘그 압력을 물리치고 서울로 하자고 고집하여 관철시켰다’고 주장했는데, 다소 과장된 기술일 수는 있겠지만 김형민의 ‘공(功)’을 무시할 수는 없을 듯 싶다. 군정청 장교를 대학동기로 둔 덕에 석유장사에서 일약 시장으로 벼락출세한 처지였으니, 미국인들에게 익숙한 이름을 쓰자고 고집할만도 했을 것이다. 그로 인해 대한민국에서 유일한 ‘순한글’ 이름의 도시가 만들어졌고, 그로 인해 우남정(雩南亭)이 팔각정(八角亭)으로 바뀔 때에도 서울의 이름은 그대로 남을 수 있었던 것 아닌가.

다음 글을 기다릴 독자들이 혹시 있을지 모르니 사족(蛇足) 하나만 달아 두기로 한다. 신시(神市)는 이미 사라졌고 – 정말 있었는지도 알 수 없지만 – 서울이라는 말이 신시(神市)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도 이제는 거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울은 과거에도 신시(神市)였고, 지금도 신시(神市)이다. 그리고 행정수도가 어디엔가로 옮겨 간다 해도 오랫동안 신시(神市)로 남을 것이다. 신시(神市)는 종교적 동일체의 상징이고 종교적 권위를 표현하는 공간이다. 물론 우리는 종교적 구심점을 갖지 못한 희귀한 ‘단일 민족’이다. 그렇다고 정말 종교적 중심이 없을까? 굳이 마르크스를 걸고 들어갈 필요도 없이 자본주의 시대의 신은 물신(物神)이다. 오늘날의 서울은 한국적 물신(物神)의 도시이며, 서울 시민들은 그 물신(物神)의 ‘은총’ 속에서 다른 도시, 다른 지방 사람들이 넘볼 수 없는 ‘특권’을 누리며 살고 있다. 서울은 중세적 중앙집권국가에서 유교적 왕신(王神)의 도시로 만들어졌지만, 왕신(王神)이 그 현실적․상징적 권위를 완전히 상실한 뒤에도 새로운 종교의 성지(聖地)로 변신하는데 성공했다. 이후에 계속될 일련의 글조각들은 신시(神市) 서울에 감춰진 비밀, 그 성공적 변신의 비결을 찾아가는 데 관심을 집중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