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이야기] 협률사(協律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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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이야기 32 – 협률사(協律社)

전우용(근대사 2분과)

  10여년 전, 학위논문을 준비하기 위해 한동안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살다시피 한 때가 있었다. 어느날인가 도서관 매점 앞에서 아무리 후하게 쳐 줘도 고등학교 1-2학년 밖에 되어 보이지 않는 ‘어린’ 남녀가 상당히 ‘진한’ 스킨쉽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요즈음에야 지하철 안에서나 공원 벤치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장면들이지만, 그 때만 해도 쉬 볼 수 있는 모습은 아니었다.

  당시로서는 무척 망측한 일이었지만, 주변의 어른들 – 어른이래 봐야 대개는 그 아이들 보다 너덧살 더 먹은 사람들이었지만 – 중에 그들을 나무라는 사람은 없었다. 나 역시 한창 눈 앞에 뵈는 게 없을 상황에 놓인 틴에이저에게 섣불리 무안을 줄 생각은 하지 못했다. 다만 공공장소(公共場所)에서, 중인환시리(衆人環視裏)에, 아무런 거리낌 없이 껴안고 있는 아이들을 뒤에 두고 혼자 혀만 끌끌 찼을 뿐이다.

  그런데 사실은 그들의 ‘행위’ 자체가 낯설지는 않았다. 이미 외국 영화나 드라마를 통해 숱하게 보아 왔던 장면 중 하나였을 뿐이다. 내가 충격을 받은 이유는 그들이 어렸다는 점에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공중(公衆)의 시선(視線)이 얽히는 한 가운데에서, 극히 ‘사적(私的)’인 행위가 이루어졌다는 점, 즉 공(公)과 사(私)가 각각 있어야 할 곳에 있지 못한 데서 오는 ‘장소와 행위의 부조화’에 있었다.

  그들의 나이는 단지 충격의 강도를 키웠을 뿐이다. 내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그들이 무슨 짓을 하건 내가 알 게 무언가. 한 세기 전이었다면 그들에게도 로미오와 줄리엣 같은 사랑을 나누기에 충분한 권리가 있었다.

  공(公)과 사(私)를 구별하라는 말은 누구나 하고 듣는 말이지만, 그게 말처럼 쉽지만은 않다. 공(公)과 사(私) 각각의 영역과 경계(境界)에 대한 생각은 사람마다 다르다. 공중목욕탕에 가보면 굳이 수건으로 앞을 가리고 조심스럽게 움직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네 활개를 펴고 늘어져 자는 사람도 있다. 지하철 안에는 혹여 남에게 폐될 새라 옆 자리의 친지와도 소곤거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휴대 전화기를 들고 큰 소리로 떠들어 대서 주변 사람들로 하여금 수인이를 배신한 민수에게, 돈 떼 먹고 도망간 박사장에게 공연한 공분(公憤)을 느끼게 만드는 사람도 있다.

  공중질서를 지키지 않는다고 비난받는 사람들 중 상당수는 나머지 사람들과 공사(公私)의 경계를 달리 설정하는 사람들이다. 그렇다고 그들을 마냥 비난만 할 수도 없는 것이, 이 경계는 역사상 끊임 없이 변화해 왔고 더구나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다. 그냥 당사자들이 직감적으로 판단해서 처신(處身) – 문자 그대로 자기 몸을 계선(界線)의 어느쪽에 두느냐를 결정하는 것이다 – 할 수밖에 없다.

  공(公)과 사(私)는 사람의 행위에 따라 나뉘기도 하고, 지리적 공간에 의해 구분되기도 하며, 시설이나 장소의 소유 관계를 표시하기도 한다. 사실은 이 중 어느 하나에 지배적 지위를 부여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이들 사이의 중첩적 관계망으로 경계지워지는 어떤 것 정도로 보는 편이 좋을 듯 하다.

  그래도 어렵긴 어렵다. 조르쥬 뒤비도 ≪사생활의 역사≫라는 방대한 저작을 편집하면서, 사생활의 ‘영역’을 설정하기가 무척이나 어렵다고 토로한 바 있다. 거칠게 요약하자면 ‘사생활’은 공문서(公文書)에 포착되지 않는 삶의 영역이지만, 공문서 상에 기재되는 내용은 언제나 변화해 왔고, 경향적으로 확대되어 왔다. 최근의 인터넷을 통한 개인 정보 유출도 사적인 정보가 공적인 감시, 또는 타인의 관찰 대상이 되는 추세를 보여준다. 결국 공사(公私)의 구분선은 역사적 추세와 개인적 성향에 따라 변화하는 것인 만큼, 본래가 모호하다.

  예컨대 회사는 사익(私益)을 추구하는 사적(私的) 집단이지만, 그 안에서 맺어지는 인간관계나 그 조직이 요구하는 행위 규범은 공적(公的)이다. 밥 먹고 술 마시는 행위는 가장 사사로운 일에 속하지만, 무슨 정상회담 만찬장 같은 자리에서라면 극히 공식적인 일이 되어 버린다.

  오늘날에는 오랫동안 사적인 일 중에서도 가장 사적인 일이었던 – 공(公)에는 언제나 개방성이 따라 붙는다. 그래서 ‘남’에게 내 보이는 것을 공개(公開)라고 한다. 반면 사(私)에는 내부(內部), 은밀함 등의 이미지가 고착(固着)되어 있다 –  일을 공개하는 것조차 ‘직업’으로 삼는 사람들이 있다.

  사전적 정의에 따르자면 공공(公共)이란 국가나 지방자치단체가 공익(公益)을 위해 만들고 운영하는 것이며, 공중(公衆)이란 다중(多衆)과 대략 같은 말이다. 그러나 개인의 생각과 태도를 규제하는 정도에서는 두 용어 사이에 큰 차이는 없다. 사람들이 공공(公共)과 공중(公衆)을 헷갈리는 것도 그 때문이다.

  도시의 공간과 장소를 중심에 놓고 보자면, 공(公)이란 가족 – 한 집에 사는 사람들 – 이 아닌 다른 사람들의 시선(視線)에 노출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장소가 공공장소이며, 그 안에서 지켜야 할 규범이 공중도덕과 공공질서이고, 그 안을 청결하게 하는 것이 공중위생이다. 물론 공공(公共)이나 공중(公衆)이라는 범주가 만들어진 것은 그리 오래 전의 일이 아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중세까지는 왕과 사제(司祭)들의 것 – 이는 땅, 건물 뿐 아니라 생산물에도 해당되었다 – 이 공(公)이었고, 그 나머지, 개인들이 사사로이 갖거나 지배하거나 이용할 수 있는 것만이 사(私)였다.

  공(公)은 궁극적으로 하나로 귀결되는 것이었지 무리 = 중(衆)에게로 귀결되는 것은 아니었다. 근대 이전의 공적(公的) 공간은 기본적으로는 궁궐, 관아, 신전(교회) 같은, 왕이나 신(神)에게 소속된 도시의 핵심 구성요소들을 의미했다. 따라서 오늘날과 같은 의미의 공중(公衆)은 절대권력의 상대화와 함께 출현했다.

  수많은 사인(私人)들을 한 자리에 모아 놓고 같은 느낌을 갖게 하는 공적(公的) 시설은 도시의 발생과 동시에 만들어졌다. 이런 시설은 다중(多衆)의 사적(私的) 욕망을 같은 장소에서, 같은 시간대에 공적(公的)으로 충족시켜 줌으로써 그 ‘공(公)’을 만들어준 사람 – 또는 신(神) – 의 권위와 능력을 사람들의 의식 깊은 곳에 각인(刻印)시키는 구실을 했다. 로마의 콜로세움에 모여 든 사람들을 ‘공중(公衆)’으로 표현할 수 있다손 치더라도, 그들은 공(公)에 ‘속한’ 사람들이었지 공(公)을 ‘만드는’ 사람들은 아니었다.

  어쨌거나 이런 시설은 일반적으로 대단히 과시적이었고 그런 만큼 자원(資源) 낭비가 심했다. 그러나 그 낭비야말로 도시를 도시답게 만드는 것이기도 하다. 멀리 거슬러 올라갈 것도 없이 올림픽과 월드컵을 치르기 위해 만들어진 서울의 경기장들만 해도, 엄청난 인력과 물량을 소비했음에도 불구하고 요즈음에는 고작 한 달에 한 두 번씩, 그것도 매 번 서너시간씩 밖에 사용되지 않는다.

  이런 시설들은 본래가 합리적이지도 경제적이지도 않다. 그러나 도시에 이런 시설을 지을 때는 어느 나라에서나 ‘자본주의적 합리성’만을 따지지는 않는다. 시설의 활용 방안은 대개 짓고 난 뒤의 고민거리가 될 뿐이다. 사람들은 이런 시설이 늘어날 수록 도시가 발전한다고 믿고, 가끔씩 이런 시설을 찾을 권리를 – 이 권리는 자주 유보되지만 – 잃기 싫어 도시를 떠나지 않는다.

  경기장만큼 규모가 크지는 않지만 그와 본질적으로 같은 기능을 하는 것이 극장(劇場)이다 – 규모의 문제는 어디까지나 상대적이다. 내 기억 속의 첫 번째 영화는 ‘꼬마신랑“(1970)이었는데, 어린 꼬마의 눈에는 변두리 극장의 객석 규모조차 너무 압도적이어서 영화 내용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극장 모습은 지금껏 잊혀지지 않는다 -.

  때로는 경기장이 극장(劇場)으로 전용(轉用)되기도 한다. 그런데 서울에서 극장(劇場)은 공중목욕탕만큼이나 특이한 공중시설이다. ‘공중(公衆)’이라는 이름이 붙은 대다수 시설과 장소들이 근대의 산물이지만, 극장과 목욕탕의 흔적은 고대 도시의 유적지에서도 흔히 발견된다. 그러나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서울에는 이런 시설이 없었다. 목욕탕이야 그렇다 쳐도 중국이나 일본 도시들에도 흔했던 극장이 없었던 것은 중세 도시 서울의 주요 특징이었다.

  한가지 더, 대다수 공중시설이 사적인 행위와는 대립적이지만 – 멸사봉공(滅私奉公)은 본래 대의멸친(大義滅親)과 비슷한 말이었지만, 현대에는 주로 ‘공적(公的) 장소에서 사적(私的)인 일을 (생각)하지 말라’는 뜻으로 쓰인다 – 극장은 사적인 욕구를 수용하고 사적인 행위를 일부나마 용인하는 특이한 공적 공간이다.


(사진 1) 마당놀이. 서울에 상당한 규모의 빈 터가 남아 있던 시절에는 이런 마당놀이도 간간이 행해졌다. 상설 무대가 없던 조선시대의 연희(演戱)는 모두 이런 마당에서 – 또는 길 위에서 –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런 곳에 모인 사람들은 무리이되 공중(公衆)은 아니었다. 앉아서 보든 서서 보든 또는 누워서 보든 뭐랄 사람이 없었고, 보다 말고 자리를 떠도 그만이었다. 물론 남의 눈은 의식해야 했지만, 그것이 행위의 전면적인 제약이 된 것은 아니었다. 마당놀이가 구경꾼들에게 요구한 규율은 오늘날의 관점에서 볼 때에는 지나치게 느슨했다.

  요즈음에는 어떤지 잘 모르겠지만, 10~20여년쯤 전에는 서로 처음 만나 형식적인 인사를 나눈 남녀가 첫 데이트 장소로 선택하는 곳이 주로 극장이었다. 그들은 관계를 한 계단(?) 더 진전시키자는 묵시적 합의를 이룬 뒤에도 다시 극장을 찾곤 했다.

  극장은 다중(多衆)이 모이는 곳이되 타인의 시선(視線)으로부터는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공간이다. 물론 바로 옆 사람의 눈치도 보아야 했고, 1970년대초였다면 극장 뒤편 한 구석에 버티고 있는 ‘임석경관(臨席警官)’ – 일본인들은 다중(多衆)이 회합하는 거의 모든 시설에 경찰을 배치하는 노골적인 감시의 ‘전통’을 만들어 놓았는데, 이 전통의 수명은 일반의 기대보다 훨씬 길었다 – 의 낌새도 의식해야 했지만, 그래도 ‘어둠’은 여러 가지 사적인 행위를 포용해 주었다. 그래서 극장은 청춘 남녀의 사랑을 꽃 피워 주는 온실이 되기도 했다.

  극장은 또 사람들에게 공사(公私)가 뒤섞인 상태로나마 자발적으로 규율에 따르는 법을 익힐 수 있게 해 주었다 – 학생들을 2시간 가까이 꼼짝 않고 책상에 붙어 앉아 있게끔 하는 선생은 나쁘거나 무서운 선생 뿐이다 -.

  정해진 시각에 정해진 장소에 가서 징해진 돈을 내고 정해진 시간을 거의 움직이지 않고 보내는 훈련을 ‘자발적’으로 반복하면서, 사람들은 근대 사회가 요구하는 규율이 그럭저럭 ‘견딜만 하다’고 느끼게 되었다.

  그런 점에서 극장은 학교나 병영, 공장과 마찬가지로 ‘근대의 학습장’이었지만, 다른 공적 시설들보다 훨씬 소프트한 – 임석경관이 배치되어 있던 시대에 한해서는 ‘훨씬’이라는 부사(副詞)를 빼야 하겠지만 – 학습장이었다. 더구나 많은 도시들에서 이 학습장은 ‘전통’과도 연계되어 있어서 ‘전통과 근대’의 연속성을 보장해 주기도 했다.

  그런데 앞에서도 지적한 바와 같이 ‘괴력난신(怪力亂神)’을 말하려 하지 않았던 유교 국가 조선의 수도 서울에는 극장이 없었다. 유희나 축제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것들은 ‘상설무대’를 갖지 못했다.

  종묘나 문묘의 의례는 그저 엄숙할 따름이었고, 궁궐 내의 잔치도 잡인(雜人)들과는 무관했다. 이들 행사는 공적(公的)이되 공개적(公開的)이지 않았고, 거기에 모이는 사람들도 공인(公人)들이되 공중(公衆)이 아니었다. 잡인(雜人)들은 그저 모모 대감의 환갑 잔치날을 기다려 그 집 마당에서 벌어지는 – 또는 열리는 – ‘연희(演戱)를 볼 수 있었을 뿐이다.

  조선 후기에 장마당에서 연희패가 벌이는 ‘놀이’를 구경하거나 그에 참가할 기회가 늘어났으나, 이 역시 ‘장터’를 관장하는 군문(軍門)이나 ‘장마당’을 지배하는 ‘상인(商人)’들이 사람을 모으기 위해 만들어낸 행사였고, 장(場) 자체가 상설(常設)이 아닌데 무대가 상설(常設)일 수는 없었다.

(사진 2) 산대(山臺). 궁중에서는 내전 깊숙한 곳에 앉은 왕이나 왕후(王后), 대비(大妃)가 볼 수 있도록 높은 대를 만들고 그 위에서 연희(演戱)를 펼쳤다. 무대 자체가 아랫것들은 아래에서 올려다 보고, 윗사람은 위에서 내려다 보는 신분적 위계에 걸맞도록 만들어진 셈인데, 그 공역(工役)이 만만치 않아 민간에서는 만들 수 없었다. “파란 눈에 비친 하얀 조선”에서.
  조선 후기 도성(都城) 주변에서 행해진 대표적 ‘연희(演戱)’로 ‘송파 산대놀이’와 ‘양주 별산대놀이’라는 것이 있다 – 이 두 놀이는 조선 후기 서울로 들어오는 행상(行商)을 둘러싸고 벌어진 송파장과 다락원장의 치열한 경쟁을 반영한다 -.

  산대(山臺)라는 것은 본래 궁궐에 임시로 가설한 무대를 말한다. 대궐 마당에 놀이판을 벌이면 내전(內殿) 깊숙한 곳에 정좌(定座)한 왕이나 왕후, 대비(大妃) 같은 ‘높으신 분’들은 제대로 볼 수가 없다. 그렇다고 그들이 계단 밑에 시립(侍立)한 금군(禁軍)이나 액례(掖隷) 따위와 같은 ‘높이’에서 구경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내전(內殿)의 대청 높이로 올려 세운 무대를 산대(山臺)라 했다.

  산처럼 높은 대(臺)이기도 하고 산처럼 층층이 쌓은 대(臺)이기도 하다. 고려시대 이래 동짓날 궁중에서 지내던 나례(儺禮)나 그밖의 축일(祝日)을 기념한 각종 잔치에 따라 붙은 연희(演戱)가 이 무대에서 열렸다.

  양란(兩亂) 이후에는 궁중(宮中)에서 ‘놀던’ 재인(才人)들이 민간에서 ‘돈벌이 기회’를 찾으면서 ‘궁중 놀이’가 민간으로도 퍼져 나갔는데, 이 확산을 추동한 것이 다름 아닌 송파와 다락원의 군문(軍門) 대감들과 장사치들이었다 – 교통의 요지는 군사적 요충지이기도 하다. 그래서 군인과 상인의 겸업 또는 동업은 자연스러운 바, 송파장은 남한산성의 수어청과, 누원점(樓院店)은 북한산성의 총융청과 각각 연결되어 있었다 -.

  이들이 만들어 준 장마당 놀이는 명칭은 ‘산대놀이’였지만, 산대는 없었다. 또 이 놀이는 사람들에게 볼거리를 제공해 주기는 했지만, 그것이 바로 공중(公衆)을 만들어 내지도 못했다. 이미 서너번씩은 본 사람들은 놀이 마당을 힐끗 쳐다 보고 지나쳐 갔을 터이고 놀이에 몰입한 사람들조차 이리저리 움직이면서 구경하거나 수시로 추임새를 넣으면서 떠들었을 것이다. 이 마당에 ‘규율’은 필요 없었다.

  또 놀이꾼들에게도 이는 ‘독립적인’ 돈벌이가 아니었다. 흡사 오늘날 신장개업 식당 앞에서 벌어지는 도우미들의 ‘간이 공연’처럼,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모아 들이는 데 주목적이 있었을 뿐이다. 다만 송파나 누원이 어엿한 도시로 발전했다면, 그 곳 장사치들이 놀이패의 패트런이 되어 극장을 짓게 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나 알다시피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사진 3) 마당놀이로 펼쳐지는 송파 산대놀이 재연. 서울 주변의 상업이 발달함에 따라 궁중 산대에서 놀던 재인(才人)들이 송파와 다락원 등지의 장마당에 진출하기 시작했다. 산대놀이의 레퍼토리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겟지만, 무대는 어쩔 수 없이 마당이 되었다.

  서울에 상설 무대가 있는 건물, 그래서 사람들이 일부러 시간을 내어 찾아가서는 돈을 내고 들어가 벌서듯 앉아 있어야 하는 극장이 처음 생겨난 것은 1895년경의 일이었다. 일본이 청일전쟁에서 이기자 서울로 이주하는 일본인들이 늘어났고, 그들의 거류지는 일본 도시의 모습을 갖추어 갔다. 이 와중에 일본의 도시 문화도 그대로 이입되었다. 나라의 체면 손상을 우려한 일본 영사관의 단속에도 불구하고 일본인 작부(酌婦)와 창기(娼妓)가 밀려 왔으며, 일본인 예인(藝人) 집단도 ‘자국민 위로차’ 수시로 드나들었다.

  일본 가부키 같은 것은 아주 오래 전부터 실내에서 공연되었기 때문에, 이들을 맞이 하기 위해서는 어쨌든 극장이 있어야 했다. 가부키좌 같은 극장이 그래서 먼저 만들어졌다. 그러나 이런 공연은 한국인들의 취향에 맞지도 않았고, 일본인 극장도 한국인을 받아들이는 데 관심을 갖지 않았다. 1897년, 일본인 거류지내 가건물에서 최초의 활동사진이 상영되기도 했지만, 이 일이 미친 파장은 크지 않았다.

  이런 일들이 영향을 미치면서, 같은 무렵 한국인들을 위한 거리의 볼거리도 늘어났다. 한국인 재인(才人)들이 서울 변두리 빈 터에서 돈을 벌기 위해 무동연희장(舞童演戱場)이라는 이름의 놀이판을 벌이기도 했고, 거리 유희(遊戱)에 오랜 경험을 가진 중국인들이 곰이나 원숭이를 거느리고 기예(技藝)를 보여 주기도 했다. 사람들 사이에서 ‘놀이마당’을 일부러 찾아가는 경험이 쌓여 갔다.

  1902년, 고종황제 즉위 40주년 칭경(稱慶) 예식을 치르기 위해 전국 각처의 재주꾼을 끌어 모아 협률사(協律社)라는 단체를 만들었을 때쯤에는 – 대개는 협률사(協律社)를 극장 이름으로 알고 있지만, 예인(藝人) 단체라 해야 옳다. 봉상사(奉常司) – 1895년 봉상시(奉常寺)를 개칭한 것 – 자리에 새로 만든 건물은 이 예인들의 집합처이자 공연장이었다 – 공연(公演)에 대한 수요는 이미 넘쳐 나고 있었다.

(사진 4) 1902년에 완공된 협률사 극장. 원형 극장에 뾰족 지붕을 세웠다. 최남선은 로마의 콜로세움을 본 따 원형으로 지었다고 했는데, 그렇다 하더라도 이 시기에 원형 건물은 아무나 지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황제의 즉위 40년을 기념한다는 의미에서 원형 건물을 지은 것으로, 내부 객석도 원형으로 배치되지 않았다. 1906년 일시 폐쇄되었다가 19088년 원각사라는 이름으로 재개관하였다.
  개선문을 소박하게 본 딴 독립문처럼, 협률사 건물은 로마의 콜로세움을 ‘나름대로’ 축소한 500석 규모의 ‘원형 극장’이었다. 그러나 막상 칭경예식은 예정대로 치러지지 못했다. 국내외 귀빈(貴賓)들이 모인 자리에서 자기 재주를 내 보일 생각에 재인(才人)들은 열심히 연습했지만, 당년에는 극심한 흉황의 여파로, 익년에는 러시아와 일본 사이에 전운(戰雲)이 짙어간 탓에 예식이 연기되고 마침내 취소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시설은 서울 사람들의 삶과 의식, 태도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유산(遺産)이 되었고, 이 도시에 공공(公共)과 공중(公衆)이 출현하는 단서(端緖)의 하나가 되었다. 궁중에서나 제대로 가설되었던 산대(山臺)가 무대로 형식을 바꾸어 건물 안에 들어 간 것은 새로운 공간, 장소가 생겼다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녔다. 칭경예식의 여흥(餘興)을 거나하게 치를 목적 뿐이었다면, 굳이 궁궐 밖에 극장을 만들 이유는 없었다. 본래가 궁궐은 그 자체로 하나의 커다란 전시장이요 극장이었다. 그 이전에도 외국인들은 안 쓰는 궁궐을 자유롭게 구경할 수 있었고, 궁궐 안에서 벌어지는 산대놀이를 관람할 수도 있었다.

  고종은 탑골공원 안에 팔각정을 만든 것과 똑 같은 이유에서, 협률사 건물을 ‘만들어 준’ 것이다. 당장 봉상사(奉常司)는 국가의 제사와 시호(諡號), 권농(勸農), 교악(敎樂) 등의 일을 맡은 관서로서 이 자리에 민(民)을 ‘끌어들이는’ 공연장(公演場)‘을 지은 것은 민(民)과 함께 국가의례를 치른다는 상징성을 갖는 일이었다.

(사진 5) 탑골공원의 시위군악대와 프란츠 에케르트. 공원 서쪽에 군악대 건물이 따로 있었으며, 공연은 팔각정 위에서 주로 이루어졌다. 비록 개방된 공간이었지만, 사람들이 음악을 ‘감상’하기 위해서는 아마도 정해진 규칙을 따라야 했을 것이다.

  고종은 자신의 즉위 40년을 ‘한 다리만 건너면 바로 친척이 되는 사람들’과만 보내려 하지 않았다. 선대의 정조가 그랬던 것처럼, 그는 민(民)이 황제를 직접 느낄 수 있기를 바랐던 모양이다. 상징적으로라도 황제가 민(民)과 소통하려 하고 있음을 알리고 싶어 했고, 실제로도 ‘별 볼 일 없는’ 가문의 사람들을 여럿 발탁하여 중용(重用)했다.

  황권(皇權)에 대한 그의 생각이 중세적 틀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니었지만, 협률사와 탑골공원 팔각정은 민(民)을 황제의 사(私) = 공(公) 안으로 끌어 들이려는 전략(戰略)에 따라 만들어진 것이었다. 궁궐 안에만 있던 것이 궁궐 밖으로 나오고, 왕과 고관(高官)들이나 볼 수 있던 것을 백성들도 보게 됨으로써 더 이상 ‘신분제’에 의존하지 않는 제국(帝國)의 모습이 어렴풋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것들은 황제가 만든 ‘황제의 것’이었지만, 동시에 민(民)이 이용하는 ‘민의 것’이기도 했다. 대한제국의 황도(皇都) 서울에서 공중(公衆)은 이렇게 양방향의 접근을 통해 만들어져 갔다.

(사진 6) 군악대의 아침 행진. 군악대는 수시로 시내 도처를 행진하면서 연주하였다. 서양식 군대를 양성하면서 악기를 통한 신호체계도 서양식으로 개편했는데, 이미 별기군 당시부터 곡호대(曲號隊)라는 초보적인 군악대가 있었다. 에케르트 부임 후 군악대는 30-40명 규모의 오케스트라격이 되었고, 악기의 종류도 대원수만큼 많았다. 서울 사람들은 이미 이 무렵부터 서양음악에 대한 감수성을 키워 나갔다.

  물론 누차 언급한 바와 같이, 어떤 시설이든 이용자는 결코 설계자의 의도를 충실히 따르지 않는 법이다. 칭경 기념 제전이 수포로 돌아간 뒤 1903년부터 협률사 극장은 공연시설로 본격 가동되었는데, 여기에 출입하는 사람들은 황제의 은덕이 아니라 돈의 가치를 먼저 생각했다.

  그들은 이 곳에서 스스로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공중(公衆)이 되는 훈련을 받았지만, 그걸 가능하게 한 것은 ‘돈’이었다. 공연의 레퍼토리도 돈을 따라 다녔고, 그래서 충신 열사를 만드는 공간이 아니라 탕자(蕩子) 음부(淫婦)가 모여 드는 장소라는 비난을 받았다.

(사진 7) 단성사. 1906년 협률사 해산 이후, 그 단원들은 여러 패로 나뉘어졌고, 각각 독립적인 공연장을 만들었다. 단성사니 연흥사니 장안사니 하는 패거리가 만든 ‘극장’들은 모두 500석에서 1000석 규모의 당시로서는 초대형 공중시설이었다.

  황제의 ‘돈’으로 만들어진 새로운 시설에서 새로운 볼거리를 즐기면서 민(民)이 공중(公衆)으로 형성되는 과정은 같은 때, 서울의 다른 곳에서도 진행되었다. 협률사 극장이 준공된 바로 그 무렵, 탑골공원 팔각정 서쪽에 군악대 음악당이 들어 섰다. 일본에서 오랫동안 군악대를 지휘했고 일본 국가 기미가요를 작곡했던 에케르트(Franz Eckert)는 1899년 독일로 귀국하여 프로이센 육군 군악대장으로 있었는데, 대한제국 정부는 그를 초빙하여 시위군악대 지휘를 맡겼다.

  에케르트는 일본에서 했던 일 그대로를 한국에서 펼쳤다. 시위군악대는 불과 6개월만에 서양인들의 찬탄을 받을만큼 훌륭한 연주 솜씨를 보여 주었다. 시위군악대는 1901년 9월 9일 고종황제 탄신일 경축연에서 ‘내외 귀빈’을 청중으로 앉히고 최초의 연주회를 개최했는데, 그 1년여 후부터는 ‘시민공원’으로 만들어진 탑골공원에서 매주 목요일, 일반 시민을 대상으로 무료 연주회를 열었다. 서울 사람들이 트럼펫이니 오보에니 클라리넷이니 하는 악기 소리에 어떤 감흥을 가졌는지는 알 방도가 없으나, 독일식으로 훈련받은 군악대의 ‘엄숙․경건․절도(節度)’를 상상해 보건대, 아마도 연주회장에서 함부로 떠들거나 마구 돌아다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연주회를 ‘구경’하던 사람들은 ‘함께 보고 즐기기 위해서는 감수해야 할 불편도 있다’는 공중질서, 공중도덕의 최소 개념을 배우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다음해 6월 밤부터는 한성전기회사 – 고종과 콜브란, 보스트윅이 합작으로 설립한 회사임은 이미 말했다. 이 때에도 사장은 한성부윤 이채연(李采淵)이었다 – 의 동대문 전차 차고 옆에서 한국인 ‘공중(公衆)’을 대상으로 활동사진 상영이 시작되었다.

  고종은 자신의 즉위 40년과 나이 50이 된 해를 기념하여 – 기념이란 보통 ‘빌미’라는 의미를 겸유(兼有)한다 – 자신이 민(民)과 함께 한다는 – 정치적 수사(修辭)로서 ‘민(民)과 함께’나 ‘민(民)과 더불어’는 언제나 ‘지지기반을 확대하고 싶다’는 뜻을 나타낸다 – 가시적 표현물들을 만들었다.

  이 표현물들 안을 들락거리거나 그 주변을 배회하는 서울 사람들이 그 ‘의도’를 구체적으로 읽어내느냐 마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고대 로마의 숱한 경기장들마다 그것을 지어준 귀족들이 있었지만, 그랬다고 로마 시민들이 진정 그들을 사랑한 것은 아니니까. 다만 대한제국의 황도(皇都) 서울에서, 신식(新式) 공중시설에는 한동안 황제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는 점만은 기억해 둘 필요가 있다.

(사진 8) 활동사진 초기 상영 시대의 야외 상영관. 복제와 완전한 반복이 가능한 활동사진은 ‘기술복제시대’에 가장 어울리는 흥행물이었다. 처음에는 호기심 거리에 불과했지만, 불과 수십년 내에 이 흥행물은 다른 모든 것을 ‘잡것’으로 만드는 지위에 올라섰다. 오늘날 극장(劇場)은 영화관을 지칭하는 말이 되어 버렸고, 연극장은 따로 표시를 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그러나 1904년 초 러일전쟁이 일어나고 일본군이 서울을 점령하자마자 황권(皇權)은 추락하기 시작하였고, 진작부터 준비하고 있던 ‘돈’ = 자본이 황제의 그림자를 재빨리 지워 갔다. 1906년 일시 폐쇄되었던 협률사 극장은 1908년 원각사라는 이름으로 재개관했고, 이보다 앞서 1907년에는 협률사에 모여 있던 재인(才人)들과 또 다른 재인(才人)들이 광무대, 단성사, 연흥사 등을 만들었다. 1908년의 서울에는 돈벌이에만 관심을 둔 5개의 극단과 극장이 있었다.

  이 무렵에는 한성전기회사도 한미전기회사로 이름을 바꾸고, ‘활동사진관람소’를 따로 열어 자본주의적 ‘흥행’을 본격화했다. 이로써 이들 시설은 공(公)과 결합한 공중(公衆)이 아니라 자본과 결합한 공중(公衆)을 만들어 내는 공간이 되었다. 이 공중시설들을 ‘개량’하여 다시금 ‘권력’과 관계지우려는 ‘애국주의’와 ‘식민주의’의 대치가 시작된 것은 바로 그 직후의 일이었다.

  1980년대 초까지, 종로 화신백화점 꼭대기층에 ‘화신극장’이라는 곳이 있었는데, “매일 매일 쇼도 보고 영화도 보고”라는 글귀가 쓰여 있던 그 극장 간판은 한 번도 바뀌지 않았던 것 같다. 이 극장이 서울 한복판, 종로 네거리에 있었기 때문에 ‘촌스럽다’는 느낌이 – 쇼의 명칭도 ‘20세기 쎈츄리쇼’로 동어반복이어서 더 우스꽝스러웠다 – 증폭되어 기억에 생생할 뿐, 사실 그 무렵 서울 변두리 극장은 다 그랬다. 영화관인 동시에 공연장이었다.

  물론 흥행이 되는 – 흥행이 안되는 것은 만들어지지도 않았다 – ‘공연물(公演物)’은 대개 영화였기 때문에 다른 용도로 쓰이는 경우는 흔치 않았지만. 그러나 지금, 서울에는 날마다 수많은 영화, 연극, 뮤지컬, 콘서트, 음악회, 전람회가 열리고 각각에 특화(特化)된 공연장들이 따로 만들어져 있다.

(사진 9) 클리프 리처드 내한 공연. 1969. 이화여대. 사람들은 각자의 자율적 판단에 따라 공연장을 찾지만, 그 안에서는 한 순간에 같은 감정 세계로 몰입해 들어간다. 권력은 오랫동안 이 엄청난 에너지를 이용하려고 애써 왔지만, 그것은 마치 벼락의 전기 에너지를 저장하려는 시도처럼 큰 실효를 거두지는 못했다. 그러나 반복적인 경험은 결국 사람을 바꾸기 마련이다. 오늘날 연예기획사들이 만들어낸 대중 스타들에게 열광하는 사람들은 스타를 만들고 움직이는 ‘다른 힘’을 의식하지 못한 채로 그 지배를 받고 있다.

  사람들은 여가(餘暇)에 공연장(公演場)을 찾는다고 생각하기에, 직장이나 학교에 가는 것보다 더 시간을 지켜야 하고, 그 안에서 일하거나 공부할 때보다 더 꼼짝않고 앉아 있어야 하는 이 특이한 규율 공간들에 대해서는 별다른 불만을 비치지 않는다. 어떤 공연장 좌석은 한 두 시간 앉아 있는데 수십만원을 요구하지만, 그에 기꺼이 응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20세기에 접어들 무렵부터 공연장을 장악하여 공중(公衆)을 통제하려는 국가권력의 기도가 시작되어 한 세기 가량 지속되었는데, 이것이 사람들로부터 흔쾌한 동의를 얻은 적은 없었다. 자본과 결합된 오늘날의 공중(公衆)은 국가 권력의 그늘에서 형성된 과거의 공중(公衆)보다 훨씬 자율적인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고 천만명 이상이 자발적으로 본 영화 ‘괴물’이 그보다 더 많은 사람이 의무적으로 본 ‘대한늬우스’보다 사람들에게 미친 영향이 덜 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