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이야기] 헐리는 총독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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헐리는 총독부

홍순민(중세사 2분과)

헐린다 헐린다 하던 조선총독부 청사가 드디어 헐리고 있다. 11월 상순 현재 외형은 거지반 다 헐려 공사용 가리개만 없다면 광화문 밖에서도 근정전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총독부 청사를 허는 문제를 놓고 찬반 의견도 참 많았다. 이제 다 헐린 마당에 새삼스럽게 찬반 논쟁을 지속하는 것은 그리 큰 의미가 없게 되었다. 다만 이제 경복궁을 들어가서 그 내부를 둘러보고자 하면서, 그 초입에 있는 총독부청사 건물에 대해서 그 내력과 건축의도, 이 건물이 지금까지 끼쳐온 영향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짚어보지 않을 수 없다.

조선총독부 청사를 짓게 된 내력에 대해서는 본란 21과 22 ‘광화문의 운명(1·2)’에서 광화문의 역사를 이야기하면서 이미 간략하게 언급한 바 있다. 1915년 일제는 경복궁에서 시정오년기념조선물산공진회(始政五年紀念朝鮮物産共進會)라는 총독부 식민 정책을 홍보하는 자리를 열었다. 그 공진회가 끝나면서 경복궁의 정전인 근정전과 정문인 광화문 사이, 원래는 광화문을 들어와 홍례문이라고 하는 행각문과 또 영제교라고 하는 금천교가 있던 자리에 조선총독부 청사를 짓기 시작하였다. 총독부 청사를 짓는 공사는 10년 정도 걸려 1926년에 끝났다’는 것이 그 골자였다.

경복궁의 주요 건물들, 곧 정문인 광화문, 행각문인 홍례문, 금천교인 영제교, 정전 문인 근정문, 정전인 근정전, 편전 문인 사정문, 편전인 사정전, 왕의 연거소 문인 향오문, 연거소인 강령전, 왕비의 침전 문인 양의문, 침전인 교태전, 그리고 교태전 뒤의 인공산인 아미산은 남에서 북쪽을 보자면 약간 동쪽으로 기운 남북 일직선상에 한 줄로 나란히 서 있다. 이것이 경복궁의 축이다. 그 축선은 한강을 사이에 두고 멀찍이서 마주 보면서 서울을 감싸안고 있는 할아버지산―조산(祖山)인 북한산과 관악산에 맞추어져 있다. 다시 말하자면 뒤로는 북한산, 그 연봉 가운데서도 가장 남쪽에서 서울을 내려다 보고 있는 보현봉을 기준점으로 삼고, 앞으로는 멀리 관악산으로 연장되는 것이다.

그런데 조선총독부 건물의 축은 경복궁 주요 건물들의 축과는 일치하지 않고 있다. 남쪽을 바라보면서 약 5°각도 정도 동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그 선을 따라가 보면 그것은 남산, 목멱산이 아니라 남산 쪽을 바라보게 된다. 남산의 중턱, 지금의 식물원이 있는 곳에 일제는 1912년부터 조선신사(朝鮮神社)를 지을 계획을 세워 1925년 건물을 완공하면서 조선신궁(朝鮮神宮)으로 이름을 고쳤다.

조선총독부 청사 건물의 축선이 경복궁 주요 건물들의 그것과 다르다는 사실은 곧 그 건물을 지은 건축의도가 경복궁과는 전혀 다름을 보여준다. 경복궁이 한북정맥과 한남정맥을 이으면서 조선 팔도를 내다보는 법궁이라는 건축의도를 가지고 있다면, 조선총독부 청사는 식민통치를 위한 권력기구의 총본산으로서 일본의 정신을 상징하는 신궁을 지향하는 건축의도를 드러내고 있었던 것이다.

일부 건축을 전공하는 사람들은 이 건물을 건축사에 남을 수작으로 보는 모양인데, 우리네 일반인의 눈으로 보자면 참 딱딱하고 정감없는 건물이다. 조선총독부 청사 건물은 좌우 대칭의 석조 건물로서 매위 위압적이다. 영국의 인도총독부, 일제의 대만총독부, 그리고 식민지 시대 이 땅에 수도 없이 지어졌던 각종 일제 수탈기구 건물들과 아주 닮았다. 총독부 청사의 가로 폭은 그 뒤에 있는 근정전 회랑보다 양 옆으로 각각 몇 미터씩 더 넓다. 이는 무슨 의도인고 하니, 팔을 벌려 근정전을 완전히 가로막겠다는 뜻이다. 그렇기 때문에 총독부 건물이 살아 있을 때는 광화문 앞, 오늘날의 세종로 일대에서 북쪽을 아무리 자세히 살펴 보아도 경복궁은 철저히 가려져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말하자면 경복궁의 목을 밟고서 앞을 떡하니 가로막고, 다른 데를 바라보며 딴청을 부리자는 것, 그것이 이 건물의 건축의도이다. 그런 건물이 없어지니 우선은 시원하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