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이야기] 탕평, 땅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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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이야기13 – 탕평, 땅평

일연은 《삼국유사》 <기이편(紀異篇)>에서 “환웅(桓雄)이 태백산 신단수(神檀樹) 밑에 내려와 도읍을 정했으니 이곳을 신시(神市) – 이것이 바로 서울임은 이 글의 모두(冒頭)에서 이미 밝힌 바 있다 – 라 했다” 하고, 이어 그와 함께 내려온 전문가집단 – Specialist -을 간략히 소개하고 있다. 풍백(風伯)·우사(雨師)·운사(雲師) 등이 그들인 바, 이들은 곡식(穀食)·수명(壽命)·질병(疾病)·형벌(刑罰)·선악(善惡) 등 인간사 360여 가지 일을 주관하여 세상을 다스리고 교화(敎化)했다는 것이다.

인간사 360가지라는 것은 세이레, 백일, 돐 처럼 자연의 순환주기와 인생의 리듬을 맞추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억지춘향의 숫자이겠지만, 갓 농경(農耕) 사회에 접어들었던 당대의 기준에서는 그 보다 더 많은 수를 상상하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물론 오늘날의 직업 숫자에 비하면 턱없이 적기는 하지만 – 노동부 산하 국립중앙직업안정소의 조사에 따르면 2001년말 현재 대한민국에는 1만 2,306종의 직업이 있었다 – 어쨌든 농촌의 직업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였음은 분명하다. 옛날 농촌의 직업이라는 것이 농업 말고 또 무엇이 있었겠는가. 드문드문 대장장이나 도축자(=백정)가 있으면 그만이고 그들이 없더라도 가끔씩 찾아오는 장사꾼만 있으면 그것으로 족했다. 그밖의 세리(稅吏), 노역 징발자, 공물 징수자 등은 농촌을 수탈하는 도시의 촉수 구실을 하는 자들로서 설령 농촌 내부에 있더라도 본질적으로는 외부의 타자(他者)들이었다.

반면에 도시는 발생 당초부터 ‘분업과 협업’을 발전시켰다. 물론 이 때의 분업과 협업체계는 생산과정에서 작동하기 보다는 주로 노동력이나 생산물을 관리하는 과정에서 작동하였다. 노예의 가사노동 – 가화위국(家化爲國)이 별건가, 귀족을 위해 견마지로(犬馬之勞)를 다 하면 노예요, 왕의 뒤치닥거리를 하면 관료 = ‘지위 높은 노예’가 되는 것이다 – 은 무척 이른 시기부터 정교한 분업체계 안에서 이루어졌다. 인류는 생산 자체보다는 그 생산물을 분배하고 관리하는 데 더 많은 신경을 썼고, 그 방면에서 더 복잡한 사회적 관계망을 만들어 왔다. 도시의 지표(地表) 위에 새겨진 도로와 필지, 그 위에 용립(聳立)한 건조물들은 그 관계망이 그려낸 그림에 다름 아니었다. 도시 주민의 직능별 구분선은 동시에 도시 공간을 구획하는 구분선이기도 했던 셈이다.

기능별로 구획된 도시 공간 위에 펼쳐진 주거지 역시 각각의 기능을 담당하는 사람들로 채워지게 마련이었다. 다양한 개인적, 집단적 이동수단이 만들어진 근대 이후에야 직장․작업장과 멀리 떨어진 곳에 주거지를 선택하는 일이 가능해졌다. 20세기 전반기까지만 해도, 도시 발달의 속도가 가장 빨랐던 유럽에서조차 공장 노동자는 점심시간을 집에서 보냈다. 걸어서 이동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는 위치에 직장과 집을 따로 떼어 놓을 수는 없었다. 관청 주변에 관료가, 시장 주변에 장사꾼이, 제작소 주변에 공장(工匠)이 모여 살 수 밖에 없었다. 도시가 기능적으로 다원화(多元化)하면 거주지 역시 복잡한 변주를 거쳐 재편되기 마련이지만, 근대 이전의 도시에서는 거주지 정보 하나만으로도 그의 직업과 신분, 지위를 대강은 알 수 있었다. 하기야 오늘날의 서울이라고 해서 크게 다르지도 않겠지만.

● 남대문 부근 성벽 바깥쪽의 자내(字內) 지역. 성벽에 바짝 붙어 초가집들이 늘어서 있다. 자내 주민들의 주된 생업은 채소 재배나 볏짚 등을 이용한 간단한 수공업품 제작이었다.

이중화(李重華)는 19세기 서울의 주거 공간이 오촌, 양대, 자내(字內), 오강(五江)으로 나뉘어 있었다고 하였다. 오촌은 동서남북중의 다섯 촌(村)이요, 양대는 웃대 아랫대의 두 대이며, 자내(字內)는 성을 둘러 펼쳐진 성 밖의 거주지이며, 오강(五江)은 경강변(京江邊)에 늘어선 주거지역이다. 자내(字內)라는 말은 도성(都城)을 쌓거나 보수하거나 경비할 때 담당기관이나 담당지역을 배정하기 위해 일정한 길이로 구획하여 각 구간에 천자문 순서대로 이름을 붙인데서 온 말이다. 즉 성벽 밖 황자(黃字) 구간 밑이나 영자(盈字) 구간 밑 등이 모두 자내(字內)가 되는 것이다.구획된 서울의 도시 공간 위에는 서로 구분되는 종류의 사람들이 끼리끼리 모여 살았다. 오촌(五村) 중 중촌(中村)을 제외한 나머지 네 촌(村)은 양반, 관료들의 주거지였다. 동촌은 낙산 언저리 – 오늘날의 이화동, 동숭동, 충신동, 혜화동 일대 -, 북촌은 백악(白岳) 아래, 남촌은 남산 기슭이었으며, 서촌은 인왕산 밑에서 서소문 주변에 이르는 지대 – 였다. 조선 중기 붕당(朋黨)의 이름이 대개 이 사촌(四村)에서 나왔다. 김효원(金孝元)이 동촌에 살아 그 일파가 동인(東人)이 되었고, 심의겸(沈義謙)이 서촌(西村)에 살아 그 일당이 서인이 되었다. 동인이 다시 나뉠 때 남산골 사는 일파가 남인(南人)이 되었고, 북촌(北村)에 사는 일당이 북인이 되었다. 물론 근래의 동교동계나 상도동계가 다 동교동, 상도동에 몰려살지 않았던 것 처럼 당시에도 북인이 모두 북촌에 살고 남인이 몽땅 남촌에 살았던 것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유유상종이라, 16세기에도 끼리끼리 모여사는 추세는 있었을 터이다.

동서남북 분당 이후 여러차례의 정치적 변동을 거치면서 각 촌의 주인도 그에 따라 바뀌었다. 땅의 지위라고 해서 바뀌지 않는 것은 아니로되, 그보다는 언제나 사람의 지위 변화 속도가 더 빨랐다. 무엇보다도 19세기까지는 궁궐의 지위를 위협할 수 있는 공간요소는 아무것도 없었다. 조선시대 내내 서울 북촌(北村)은 전국 최고의 주거지였다. 18-19세기 노론 일당 지배체제가 별다른 동요 없이 유지되면서 북촌(北村)은 당연히 노론의 집거지가 되었다. 화동, 재동, 계동, 가회동, 안국동, 경운동 등지에는 반세기전까지만 해도 아흔아홉칸 저택이 도처에 웅자(雄姿)를 뽐내고 있었다 – 세상이 일변하매 그 집들은 태반이 요정(料亭)이 되었다가 그나마 근 20여년 사이에 거개가 필지 분할되어 Villa 단지가 되어 버렸다 – . 반면 어쩔 수 없는 북향(北向)에 토질조차 좋지 않아 일년 내내 나막신을 신고 살아야 했던 남촌의 진고개[=泥峴] 언저리는 양반이되 양반대접 받지 못하는 남인과 무반의 주거지가 되었다. 동서 양촌에는 소론과 북인이 다수 모여 살았지만, 다른 당색의 양반 관료들도 더러 섞여 살았다. 그런데 그 무렵의 양반님네들은 이미 양반으로서의 동질감을 느끼기 보다는 당색별 차이를 드러내는 데 더 집중했던 모양이다. 그들은 서로 다른 가례(家禮)에 준거하여 혼장례를 치르고 제사를 모셨을 뿐 아니라 옷고름 매는 방식, 갓끈 매는 방법에도 차이를 두었다. 거주지 뿐 아니라 모양새에서도 자당(自黨)과 타당(他黨)을 구분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 탓에 딴 동네 양반이 북촌을 어슬렁거릴 양이면 봉변까지는 당하지 않더라도 눈총받기 십상이었다. 이런 형편이었으니 “남산골 샌님 역적(逆賊) 바라듯 한다”는 속담(俗談)이 나오지 않을 수 없었을 게다.

한편 광교에서 효경교 – 종묘 앞에 있던 다리 – 까지 이어지는 개천변 양안(兩岸) 일대를 중촌(中村)이라 하였으니 오늘날의 다동, 무교동, 수표동, 관수동, 삼각동, 입정동 등지가 이곳이다. 이 일대에는 의관(醫官), 역관(譯官), 화원(畵員) 등 이른바 ‘기술직 중인’들이 모여 살았는데, 중촌(中村)과 중인(中人)이라는 명칭 사이에는 아무래도 모종(某種)의 관계가 있었던 듯 싶다. 동촌에 살아 동인, 서촌에 살아 서인이고, 남북촌 역시 남인 북인을 낳았는데 중인(中人)이 중촌과 관계가 있으리라 생각해서 잘못은 아닐 터이다. 본래 조선후기의 ‘중인’에서 ‘중(中)’은 이중의 의미를 지녔다. 즉, 이 때의 ‘중(中)’은 ‘상중하(上中下)’의 지위․위계 개념뿐 아니라, 동서남북중의 방위 개념까지도 포함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두가지 개념은 거의 같은 시기에 만들어지고 통합되었다.

조선 전기만 해도 기술직 관료는 종류도 많고 수도 많았다. 의관, 역관, 산사, 율사, 화원 등만이 아니라 삼청관이나 서운관에 소속된 도사(道士)들도 있었다. 국초부터 이들을 사대부(士大夫)들에게서 떼어 내어 따로 ‘중인(中人)’ 자리에 몰아 넣은 것은 아니었다. 17세기까지 중인(中人)이 특정한 지위, 신분에 있는 사람들을 칭하는 말로 사용된 예는 거의 없었다. 중인은 군자(君子)와 소인(小人) 사이에 있는 보통 사람이거나, 오성(悟性)이 평범하여 성인(聖人)이 될 수는 없되 그렇다고 하우(下愚)에 속하지도 않는 범인(凡人)이거나, 중간 정도 규모의 재산을 가진 사람이었다. 때로는 궁중에서 일을 보는 남성 내관(內官) – 나인(內人)과 상대하여 – 을 지칭하는 말로 쓰이기도 했다. 사림파(士林派)의 도학(道學) 정치 실험이 본격화하는 16세기에 들어와 중인이라는 말에 ‘사대부(士大夫)와 다른 자’라는 새로운 의미가 부가되기는 하였으나, 이 때까지도 이 말이 신분개념으로 사용된 것은 아니었다.

이 말이 양반(兩班) – 중인 – 평민 – 하천(下賤)으로 이어지는 신분적 위계질서 상에 놓여 있는 개념으로 변화된 것은 17세기 말의 일이었다. 중인과 서자(庶子)를 아우르는 중서(中庶)라는 말이 일상적으로 쓰이기 시작했고, 중인은 점차 사부(士夫)․업유(業儒) 이하 상한(常漢) 이상의 신분을 가리키는 개념으로 고착되어 갔다. 그런데 이 무렵에는 이미 서울의 중촌(中村) 일대가 기술직․잡직 관리들과 시전상인들의 집단 거주지가 되어 있었다. 전에 말한 바와 같이 17세기말부터 18세기 중반 사이에 개천의 폐색이 심해지고 천변 주거환경이 악화된 것도 중촌 일대 주민 구성의 변화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이 때문에 중간 신분이기 때문에 중인이라는 말이 붙었는지, 중촌 사람이기 때문에 중인이라는 말이 붙었는지를 엄밀히 따지기는 불가능하다. 다만 일단 잡직 관료와 그 일족, 후손들에게 중인이라는 딱지가 붙으면서 이 말은 바로 일반화되어 경향간(京鄕間)에 중인(中人)이라는 말이 널리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이 말을 쓰는 사람들이 대체로 사대부(士大夫)였던 만큼 중인이라는 말에는 ‘미천하다’는 이미지가 각인되었고, 영정조 연간에는 시정(市井) 사람 일반을 가리키는 말로까지 쓰이게 되었다. 이어 정조때 편찬된 《대전통편》에는 중인과 서인(庶人)의 등용에 관한 규정이 명문화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근래의 중인 연구는 아무래도 중인(中人)의 스펙트럼을 너무 넓게 잡고 있는 듯 하다. 당당한 품관(品官)인 의관(醫官), 역관(譯官)이나 지방의 찰방(察訪), 참봉(參奉) – 이들은 수령(守令) 자리에까지도 오를 수 있었다 – 으로부터 경아전(京衙前)이나 시골 이서배(吏胥背)에 이르기까지를 모두 중인으로 보고 있으니, 이쯤 되면 말 그대로 ‘어중간(於中間)한 사람들’은 뭉뚱그려 중인이 되는 것 아닌가. 내 좁은 소견으로는 중촌(中村)에 집거하던 역관, 의관, 화원 등 잡직 관료와 그 후손들에 국한하여 ‘중인’이라는 말을 써야 할 듯 하다. 심증(心證)으로는 중인이라는 말 자체가 ‘중촌 거주자’에서 나왔다는 당대 중인들의 항변이 맞는 것 같기도 하다. 신분이 세습되는 사회에서 서자(庶子)의 자식은 비록 적자라도 서족(庶族)이 되었으니, 중인의 자제가 벼슬이 없어도 중인이 되는 것 또한 당연한 일이었다. 일 자리 없는 중인 자제가 향곡(鄕曲)에 내려가 산다고 해서 그들이 바로 이서배(吏胥背) 노릇을 하지는 않았을 터이니까.

●경강 나루터. 오강(五江)의 역부들은 옷도 걸치지 않고 뭍과 물을 오가며 일을 했던 모양이다.

무엇보다도 서울에서 경아전(京衙前) 무리는 중촌에 살지 않았다. 아전(衙前)이라는 말 자체가 ‘관아 앞 동네에 사는 사람’이라는 의미이니, 서울의 웃대 = 상촌(上村)이 바로 그들의 거주지였다. 경복궁 주변, 육조 관아가 늘어서 있는 오늘날의 당주동, 도렴동, 체부동, 순화동 등지에 사는 사람들을 상촌인, 또는 웃대사람이라 했는데, 이들은 직위가 직위이니만치, ‘공손(恭遜)’이 몸에 밴 사람들이었다. 말투도 행동거지도 항상 조심스러웠고, 옷차림도 언제나 단정했다. 말단 공무원의 이미지가 그 때라고 해서 지금과 크게 다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들이 길에 방만하게 굴다 자칫 상사(上司)의 눈에라도 띨 양이면 그 뒷감당을 하기가 쉽지 않았으니, 이들에게는 조심성이 체질화될 수밖에 없었다.

웃대 사람은 흔히 중촌을 건너 뛰어 펼쳐진 아랫대 = 하촌(下村) 사람과 비교되었다. 효경교 동쪽 개천 하류 양안을 따라 오간수문과 광희문 사이로 이어지는 아랫대에는 주로 군병(軍兵)들이 살았다. 어영청, 동별영, 훈련원 등이 모두 이 일대에 자리잡고 있었던 탓에, 오늘날의 광장시장 주변이나 광희문 언저리에 군병들이 모여산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밖에 예지동, 연지동, 을지로 5-6가 일대, 성문을 나서 왕십리까지가 군병이 다수 거주한 지역이었다.

한국 중세의 군사제도가 ‘병농일치제(兵農一致制)’에 입각하여 유지되었다고는 하지만, 17세기 이후 수도방위에 관한 한은 ‘병상일치제(兵商一致制)’라 해야 맞을 것이다. 군비(軍費) 조달에 어려움을 겪던 정부는 군병(軍兵)들에게 소소한 물품을 만들어 팔 수 있게 조치해 주었는데, 17-18세기 난전(亂廛) 문제도 처음에는 군병들로부터 시작되었다. 이것이 세월을 따라 관행화되어 종국에는 군인인지 장사꾼인지 그들 스스로도 알 수 없는 처지가 되었으니, 서울 최초의 상설시장인 선혜청 시장이나 배오개 시장이 모두 군병․장사치들이 만들어낸 것이었다. 경성방직주식회사의 모태(母胎)가 된 경성직뉴회사는 바로 광희문 일대의 군병과 그 가족들이 만들어낸 직뉴업 – 띠, 대님, 댕기같은 끈 종류의 섬유제품을 만들어 파는 일 – 을 기반으로 설립되었다. 이 자리는 오늘날 동대문시장과 평화시장을 비롯한 일군의 ‘섬유․의류타운’으로 이어졌으니, 참으로 질긴 장소성(場所性)이다. 그리하여 아랫대 사람들은 군인의 투박함과 장사치의 교활함을 아울러 지니게 되었고 말투나 행동거지 역시 거칠었다고 한다.

성 밖 지역은 비록 한성부(漢城府)의 행정관할하에 있었지만 그 곳에 사는 사람들은 온전한 서울 사람 취급을 받지 못했다. 서울에서 오래 산 노인들의 회고를 들어보면 1950-60년대까지도 성 밖 사람을 낮춰 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고 하니 18-19세기 당대에야 오죽했으랴. 성밖 사람들도 서울 사람 특유의 깍정이 기질이야 공유(共有)했겠지만, 아무래도 주변에 이렇다 할 양반 나으리들이 살지 않은 관계로 반상(班常)을 구별하고 예의 범절을 따지는 데에는 미숙하였을 터이다. 이들은 서울 촌놈, 시골뜨기였고, 성안 사람들은 자신의 정신건강을 위해서라도 물건 팔러 들어온 성밖 사람들을 ‘약간은 모자라는 놈’으로 치부하는 편이 좋았다.

●조리장수. 조리, 채, 광주리 등 가정용품을 만들어 성안으로 팔러다니는 사람들은 대개 성밖 자내(字內)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같은 성밖 지역이라도 자내(字內)와 오강(五江)은 또 달랐다. 도성민을 위한 찬거리 공급지라는 점에서는 자내나 오강이 다를 바 없었지만, 자내 사람들은 직접 농사짓고 가축 기르는 일을 하였고, 오강 사람들은 먼 데서 오는 물건들을 사서 도성민에게 되파는 일을 업으로 하였다. 남대문 밖의 청파, 동대문 밖의 왕십리, 서대문 밖의 무악재, 심지어 연신내 일대에 이르는 광활한 성밖 지역에는 미나리, 토란, 무, 배추, 우엉 등 다양한 채소 농지가 펼쳐져 있었고, 돼지를 기르거나 닭을 치는 집들이 많았다. 도성 안에 들어와 분뇨를 쳐 가는 것도 자내 사람들이었다. 자내 사람들은 농사꾼이자 행상이었으니, 매일 새벽 남문안 조시(朝市)나 배우개 조시(朝市)에 들어와 야채니 계란이니 장작이니를 늘여 놓고 파는 자들 역시 자내 사람들이었다. 반면 오강 사람들은 상인이 아니면 짐꾼이거나 막일꾼이었으니, 자내 사람보다도 더 거칠고 그악스러웠다. 각지에서 물건 싣고 오는 뱃놈 상대하랴, 강변 포구에서 호랑이 행세하는 별감나리 상대하랴, 각전 상인 어르랴 – 오강 상민들에게는 육의전 각전(各廛)의 난전 단속이 가장 심각한 문제였다. 오죽하면 “각전 상인 난전 모듯”이라는 속담이 생겨났을까 – 오강 사람들로서는 ‘빠꼼이’가 되지 않고서는 살아 남기 힘들었을 터이다.

사람의 기질(氣質)은 ‘혈통’ 뿐 아니라 환경으로부터도 영향을 받는다. 지역문화라는 것은 그 지역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만들어 내는 것이로되, 그 지역문화에는 특정한 자연환경에 대한 거주민의 집단적 적응양식은 물론 거주민들 사이의 사회적 관계망도 포괄된다. 서울이라는 작은 도시 공간 안에서도 오촌과 양대, 자내와 오강 지역의 문화는 다 달랐다. 18-19세기 양반 문화만 놓고 보아도 동서남북 사촌이 다 달랐고, 그들 사이에는 쉬 해소될 수 없는 차별의식과 적대감이 가로 놓여 있었다. 영조와 정조는 탕탕평평(蕩蕩平平)을 필생의 과제로 내세우고 사색(四色)을 고루 등용하여 당쟁(黨爭)의 폐해를 불식해 보려고 애썼으나, 결과는 그리 신통치 못했다. 정치적 연대 시도에도 불구하고 같은 당파끼리 모여사는 관행이 지속되는 한 지역간 적대감이 해소되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배타적 지역 커뮤니티를 해체할 수 있는 ‘땅평’이 탕평보다 앞서야 하는 것이었지만, 그 일이 어려워서였는지 아니면 몰라서였는지, 북촌의 ‘특권성’을 해소하려는 시도가 나온 적은 없었다. 얼마 전 세상을 온통 시끄럽게 했다가 슬그머니 숨어들어간 ‘연정론(聯政論)’에 현대판 탕평론이라는 이름을 붙여준다고 해서 크게 잘못된 것은 아니겠지만, 300년 전에 써서 안들었던 약이 오늘날 갑자기 효과를 나타낼 수는 없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