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이야기] 촬영국(撮影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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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이야기 23 – 촬영국(撮影局)

 요즘에야 중고등학생들도 카메라를 장난감처럼 들고 다니면서 필름값 현상비 걱정 없이 마구잡이로 찍어 대지만 – 민주주의는 자주 기술적 진보에 의존한다.

영상 매체가 그 어떤 기록 매체보다도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오늘날, 인터넷과 디지탈 카메라는 역사상 처음으로 일반 대중을 ‘상시적인 관찰자 및 기록자’의 지위로 올려 세웠다.

그러나 어떤 약(藥)이든 부작용은 있게 마련이다.  – 내가 중고등학교에 다닐 무렵에는 카메라를 ‘소유’하고 마음대로 찍을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렇다 보니 사진 한 장 찍는 데에도 여러 가지를 생각하고 번거로운 절차들을 거쳐야 했다. 대다수 사람들이 카메라 조작에 서툴렀던 데다가, 그런 촬영자를 위해 피사체가 되어야 하는 사람들 역시 어색한 표정을 감추기 힘들었다.

카메라 앞에만 서면 얼굴이 굳어지는 사람들에게 ‘치즈’니 ‘김치’니 하는 말들을 내뱉도록 시키지만, 정작 셔터가 눌리는 시점은 그 말을 억지로 짧게 내뱉은 사람들이 다시 표정을 원위치시킨 뒤이기 일쑤였다. 그래서 현상되어 나온 사진 중에 마음에 드는 사진을 찾기란 무척 어려웠다.

직업 사진가들의 사진은 훨씬 나았지만, 그들로서도 피사체의 표정만은 어찌할 수 없었다. 사진관에서는 사진이 실물보다 잘 나왔느니 못나왔느니 하면서 주인과 손님이 실랑이를 벌이는 일들이 일상적으로 벌어졌다.

그러니 카메라를 평생에 몇 번 만져 보지도 못한 사람이 찍은 사진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뒷말을 늘어 놓는 것은 예의 없는 짓이었다. 어디가 어디고 누가 누군지 알아 볼 수 있을 정도면 정성껏 앨범에 넣어 소중히 보관하곤 했다.



사진 1)1871년 신미양요 당시 미군과 싸우다가 전사한 조선 병사들. 서양인들의 카메라에 찍힌 최초의 조선 풍경은 이토록 처참했다. 시체가 된 이들은 카메라를 향해 포즈를 취할 수도, 개성 있는 표정을 지어 보일 수도 없었다.


 그러나 사진이 귀하다 해서 무조건 간직하는 것은 아니었다. 아깝지만 부득이 버려야 하는 사진도 많았다. 당장 나 자신 중학교 졸업 사진으로 남은 것이 몇 장 없다.

그 때 내 아버지는 어렵사리 이웃에게 카메라를 빌려서는 이리 재고 저리 재면서 여러 장을 찍었지만 막상 현상해 보니 대댜수 사진에서 인물들의 ‘신체 일부’가 잘려 나가 있었다.

나란히 선 가족들의 발이 잘려 있거나 맨 끝에 선 사람의 어깨죽지가 잘라 나간 이런 사진들은 보관할 가치가 없었다. 사진 속의 사람도 ‘사람’이었기 때문에 불구를 만들어서는 안되었던 것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사람을 찍을 때 장소와 배경을 불문하고 굳이 ‘전신(全身)’을 담느냐 아니면 신체의 반, 또는 그 이상을 잘라내는 대담성을 갖고 있느냐에 따라 카메라에 익숙한 세대와 그렇지 못한 세대를 구분한다.

물론 내 기준은 어디까지나 내 개인적인 필요에 따라 만든 기준일 뿐이다. 관광지나 유원지에서 가족 사진을 찍고 싶을 때, 셔터 눌러줄 사람을 선택하는 기준 말이다.

대학 시절 학술 답사 때 친구가 사진을 찍어 준 일이 있었는데, 그 사진에서 나는 허리 밑이 완전히 잘려 나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진이 시원시원해 보여서 결코 버릴 수 없었다.

그 사진이 지금 내가 지니고 있는 가장 오래된 ‘불구 사진’이다 – 증명사진은 논외로 하고 -. 내게 카메라가 생긴 것은 그로부터 얼마 지난 후였는데, 그 사진를 본 이후로는 다른 사람의 몸을 ‘잘라내는’ 일에도 태연할 수 있었다.


사진 2) 1883년 말 견미사절단 일행이 일본에 들러 찍은 사진. 조선의 한다 하는 명문자제들은 일찌감치 사진이 영정(影幀)을 대신할 수 있음을 배웠다. 사진은 아슬아슬할 정도로 모든 인물의 머리끝에서 발끝까지를 화면 안에 꽉 채웠다.

 사진을 모사(模寫)한 형상(形象)으로만 보지 않고 그 안에 피사체의 혼령(魂靈)이 담겨 있다고 믿는 태도는 이 땅에 사진이 도입될 당시에도 이미 형성되어 있었다.

사진을 ‘찍히면’ 혼령이 달아난다고 믿는 사람들 탓에 초창기 사진가들이 겪어야 했던 곤란에 대한 이야기는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런데 당시 사람들이 사진에 관해서만 이런 태도를 취한 것은 아니었다.

사실 그림과 사진은 한 인물에 대한 1 대 1 대응관계를 가장 확실히 보여주는 텍스트이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말은 이름과 인격 사이에 분명한 일대일 대응관계가 존재한다는 전제 하에 나온 것이지만, 사실 이름을 다른 인격체와 공유하지 않을 도리는 없다.

얼마 전 느닷없는 궁금증이 일어 아이러브스쿨이라는 사이트에서 누구나 아는 이름 몇가지를 검색해 본 일이 있다. 김일성은 40여명, 김정일은 무려 900명이 넘었고 이완용도 30명이 넘었다. 김일성과 김정일, 이완용을 욕할 자유와 권리는 광복 이후 지금껏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무한정으로 허용되어 왔다.

그러나 하나의 이름이 한 명의 인물에만 대응한다면 모르겠거니와 이런 판국에는 수많은 사람들 – 김대두, 주영형, 유영철 같은 사람들까지 포함하면 수만도 넘는다 – 의 인격이 몇몇 ‘악당’ 때문에 도매금으로 매도당하는 일이 일상적으로 벌어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개별 인격체에 관한 그림이나 사진은 본모습과 닮았건 닮지 않았건 일대일 대응관계라는 전제 하에 만들어지고 유포된다. 우리나라 화폐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썩 탐탁치 않은 몇가지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첫째는 모두가 이씨라는 점이다. 이 사실은 더 이상 사용되지 않는 화폐를 포함해도 달라지지 않는다. 이승만을 제외하면 이름을 알 수 없는 가공의 모자(母子) – 가공이지만 당시 사람들은 그 인물들이 누구를 의미하는지 다들 눈치를 채고 있었다 – 가 한 때 화폐에 얼굴을 내민 적이 있을 뿐이다.

둘째는 굳이 붙이는 공통점이랄 수도 있지만 모두가 조선시대, 그것도 중기 이전 15~ 16세기의 사람들이라는 점이다. 한국 역사상 위인(偉人)이 한 두 사람이 아닌데 –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이라는 노래도 있다 – 굳이 이 시대 사람들만 모아 화폐에 얼굴을 새겨 놓은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지만, 이 지점에서 길게 늘어놓을 얘기는 아니다.

세째는 현행 화폐에 얼굴을 내민 인물들 중 ‘실물’을 그린 ‘영정(影幀)’을 남긴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는 점이다. 모두가 김기창, 이종상, 이유태의 상상의 산물일 뿐이다. 설령 그들이 그림을 그리기 전에 해당 위인(偉人)들이 ‘현몽(現夢)’했다 할지라도, 꿈에서 스치듯 본 얼굴을 그린 그림이 본모습과 똑같다고 우길 수는 없는 일이다.

그랬거나 말거나, 사람들은 만원 짜리 지폐에 그려진 얼굴을 세종대왕이라 하고 오천원짜리 지폐에 그려진 얼굴을 이율곡 선생이라 하며 천원짜리 지폐와 백원짜리 동전에는 또 이퇴계 선생과 이순신 장군이 얼굴을 내밀고 있다고 믿는다.

어차피 본모습을 알 수 없는 인물들이니 그 그림들에 성종대왕이나 맹사성, 서거정, 임경업이라는 이름을 붙인다고 해서 안될 것은 없겠으나 사람들이 이미 그 인물로 인정한 이상 그런 짓을 할 수는 없다.

세종이야 명 세종도 있고 청 세종도 있지만, 대한민국 조폐공사 발행 만원짜리 화폐에 그려진 세종은 다른 세종일 수가 없다. 사람들은 설령 그 그림이 완전한 상상의 소산이라 할지라도 일단 그림으로 그려진 ‘그’는 ‘그 자신’이지 결코‘다른 누구’가 될 수 없다고 믿는다.

 인물 그림이나 조각 – 동아시아에서는 불상과 같은 신상(神像)을 제외하고는 인물 조각을 만드는 일이 극히 드물었지만 – 이 인격체와 정확히 대응한다는 관념은 아주 오래 전부터 있어 왔다.

신상(神像)이 신의 실체(實體)를 직접 확인하고 싶어 한 사람들의 열망에 따라 만들어진 것 처럼 – 우상(偶像) 숭배를 전면 배격하는 기독교에서도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상을 앞에 두고 꿇어 앉아 기도하는 일을 금하지는 않는다 -, 초상(肖像)이나 조상(彫像)도 죽은 사람의 혼령을 오랫동안 옆에 두고 싶어 한 후손의 욕망으로 만들어졌다. 혹은 죽은 뒤에까지 자손들 주변에 실재(實在)하고 싶어 한 당자(當者)의 욕심 탓이었거나.

그러나 동물을 정물로 변환시키면서도 그 모습을 실체에 가깝게 그려낼 수 있는 능력을 지닌 화가는 많지 않았다. 사람은 태초부터 타인의 미세한 표정 변화까지 감지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 온 존재이기 때문에, 인물화에 특히 놀라운 식별력을 갖고 있다.

화폐에 굳이 사람 얼굴을 그려 넣는 것도 위조 방지에는 그 어떤 그림보다 탁월한 효과를 발휘하기 때문이다. 누가 보아도 ‘그’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정교하게 그려낼 수 있는 화가는 언제나 ‘전문직’이었고, 그런만큼 그림값도 비쌌다.

그래서 동서양을 막론하고 자신의 초상화를 남길 수 있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초상화에 고귀함, 신성함 등의 이미지가 따라 붙게 된 데에는 이런 이유들도 작용했다.


사진 3) 1890년 주한 프랑스 공사 쁘랑땡. 유럽에서는 영육(靈肉)을 분리해서 생각하는 유목민 문화가 지배적이었기 때문에 조각의 팔 다리를 자르거나 그림에 반신(半身)만 나타내는 일이 어색하지 않았다. 그러나 정착 농경 사회에 보편적인 혼백(魂魄) 일체론적 사고에서는 그림이나 사진이라 해도 신체의 일부를 잘라 내는 것은 금기로 여겨졌다.

 그래서 죽은 이의 혼이 담긴 – 예술가의 혼(魂)이 아니라 – 그림은 함부로 걸어두고 대할 수 있는 ‘물건’의 영역 밖에 자리 잡았다. 영정(影幀)은 ‘소장하는 것’이 아니라 ‘모시는 것’이었으니, 조선 왕조에서도 역대 왕의 영정(影幀)은 따로 영희전(永禧殿)에 모셨다.

인물 사진의 출현은 영정(影幀)에 부착된 ‘귀족’, ‘권위’, ‘신성’의 이미지를 약화시키는 작용을 했지만, 당장 그 결과가 두드러지게 나타나지는 않았다. 사람들은 과거보다 훨씬 싼 값으로 더 정교한 인물 그림 = 사진을 얻을 수 있게 되었으나 그림에 담겨 있던 인격적 요소 – 부분적으로 신격화된 – 가 가격만큼 가벼워진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한동안은 더 강화되었다.

디지탈 카메라가 일반화된 지금도 사진은 ‘찍는다’고 하고, 조금 옛스러운 말로는 ‘박는다’고도 한다. 사진은 마치 도장처럼 사람을 실체 그대로 찍어 내거나 – 일대일 대응관계라는 점에서 도장과 사진은 같다. 인감(印鑑)이 인격체의 의지를 최종적으로 담지하는 것으로 취급되는 시대가 언젠가 끝나기는 하겠지만 아직은 아니다 – 사람을 틀 속에 박아 넣는 것으로 취급되었다.

하기야 사진(寫眞)이라는 말 자체에 ‘참 모습’이라는 뜻이 담겨 있으니 거기에 담긴 ‘인격적 실체’를 부정하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이 땅에서 인물 사진에 대한 오래된 금기가 깨지는 데에는 한 세기 가까운 시간이 필요했다.

 이 땅과 이 땅 위의 사람들 모습을 담은 최초의 사진 기록은 1871년 신미양요 때 미국인들이 찍은 것이다. 그 탓에 처음 사진으로 모습을 남긴 한국인은 ‘포로와 시체들’이었다.

개항 이후 묄렌도르프를 필두로 서양인들이 속속 들어오면서 한국과 한국인을 담은 사진도 늘어났는데, 이 때쯤에는 ‘포로’와 비슷한 처지에서 마지 못해 ‘찍힌’ 사람들도 있었지만, 또 자진해서 기꺼이 사진에 얼굴을 내미는 양반 관료들도 생겨났다.

이 무렵 사진은 그림보다 정교하고 사실적이면서도 고생스럽지 않게 만들어 가질 수 있다는 장점 때문에 점차 초상화를 대체해 가기 시작했다.

1883년 한성순보는 시내에 촬영국(撮影局)이라는 기관이 있다고 보도했는데, 이것이 이 땅 최초의 사진관이었다. 이름으로는 정부 설립 기관 같지만, 실은 황철(黃鐵)이 세운 사설 기관이었다.

황철(黃鐵)은 정부가 중국에 영선사를 파견한 다음 해인 1882년, 가업 경영과 관련하여 상해에 광산기계 구입차로 갔다가 그 곳에서 사진 기술을 배우고 사진기를 구입해 왔다. 그러나 그의 촬영국(撮影局)은 갑신정변 때 불타 버렸고, 사진기계도 모두 파괴되었다.


사진 4) 1884년 경복궁 주변 Percival Lowell은 아마도 서울의 경관(景觀)을 집중적으로 촬영한 최초의 외국인이었을 것이다. 1880년대 중반 그가 서울 사진을 찍을 때만 해도 궁궐과 그 주변은 가장 인상적인 경관 요소였을 터이지만, 1890년대까지 그 상황이 지속되지는 않았다.

1884년에는 지운영(池運永)이 일본에서 사진 기술을 배워 와서는 고종의 어진(御眞)을 찍었다. 지운영(池運永) – 이 땅에 처음으로 우두종법(牛痘種法)을 시행한 지석영(池錫永)의 형이다 – 은 문재(文才)가 있고 필법(筆法)이 좋다고 소문난 수재(秀才)여서 남의 과문(科文)을 대신 써 주고 통리아문 주사 자리를 얻었던 인물인데, 갑신정변 이후 김옥균 암살을 위해 도일한 적이 있었고 만년(晩年)에는 기인(奇人)으로 더 유명했다.

그는 자칭 시문서화(詩文書畵)의 사절(四節)이라 했는데, 윤효정(尹孝定)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모(某) 재자(才子)가 여기에 선(禪) 광(狂) 치(痴) 혜(慧)의 사절(四節) – 이런 걸 사절(四節)이라고 할 수 있는지는 모르갰다. 오늘날의 일상 언어로 풀면 ‘도 통한 건지 미친 건지, 바본 지 똘똘한 건지 알 수 없다’가 맞다 – 을 더하여 팔절(八絶)로 만들어 주었다고 한다. 그의 그림 솜씨는 자타가 공인하는 것이었던 만큼 그가 새로운 그림 도구 = 사진에 일찍부터 관심을 가진 것도 무리는 아니다.


사진 5) 1900년경의 청계천 수표교 밑. 더러운 개천물에서 빨래하는 아낙네와 그 앞에서 벌거벗고 노는 아이들. 서양인들은 무의식적으로 동양(東洋)을 비문명 혹은 반문명(反文明)의 세계로 인지했고 동양에 와서는 그 증거를 찾아내기 위해 열심이었다. 개천의 빨래터는 조선(한국)의 반문명성을 보여주는 호적(好適)의 장소였다.

 황철(黃鐵)과 지운영(池運永)이 여러 장의 초상사진을 찍은 것은 분명해 보이지만, 그들이 찍은 사진에 대한 상세한 정보는 남아 있지 않다.

그로부터 10여년 후인 1895년, 화가였던 김규진(金圭鎭)이 일본에서 사진 기술을 배워 와서는 소공동에 천연당(天然堂) 사진관을 열었다. 갑오개혁 이후 제도적으로 반상(班常) 차별이 철폐된데다가 단발령이 시행되는 등, 사람들의 자의식과 외모에 동시적인 변화가 일어난 시절이었기 때문에 이 사진관은 크게 성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황철이든 지석영이든 김규진이든, 그들은 주로 초상화를 대신할 인물 사진을 찍었고, 값비싼 필름과 인화지를 도시 경관(景觀)을 찍는데 ‘낭비’하지 않았다. 그래서 도시 경관에 관한 사진 기록은 철저하달 정도로 외국인이 잡은 앵글에 의존한 것들만 남아 있다.

그 탓에 현재 우리가 접하는 근대의 사진 기록들은 거의 모두가, ‘타자의 시선으로 본 우리’를 비추고 있다. 그들의 시선이 그 거리와 방향에서 한국인들의 시선과 같았을 수는 없다.

 필름도 기록매체, 그것도 값비싼 기록매체이기 때문에 기록자 – 촬영자 – 들은 그들 스스로 ‘기록할 가치가 있다’고 판단하는 것들만 기록한다. 개항 이후 이 땅에 들어온 서양인들은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한 채 ‘한국에 고유한’ -‘자신과 자국민이 보기에 신기한’- 대상만을 골라 찍었다. 유럽 어느 도시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신문명의 상징들 – 전차, 서양식 건축물 등 – 은 한국 문화 전체에 관련된 컨텍스트로서는 분명 의미가 있는 것이었지만, 아쉽게도 뷰파인더로는 개별 텍스트만 볼 수 있었다.

더구나 그가 ‘일본이나 중국을 거쳐’ 한국(조선)에 들어온 사람이라면, 그의 촬영 목록 안에는 이미 ‘동양에 뿌리내린 서양’을 기록해 놓은 필름들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때문에 그들은 결과적으로 ‘동양적이되 중국이나 일본과도 또 다른’ 한국에 관한 정보에 집중하게 되었다.

그들은 별다른 악의 없이 일본의 발전과 극단적으로 구별되는 ‘낙후된 한국(조선)’에 주목했고, 그것들이 오늘날 개항기 서울 모습에 관한 ‘권위있고 사실적인’ 영상 기록의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세심하게 관찰하지 않으면, 사진 찍은 이의 의도를 놓친 채 그냥 그 모습이 전부려니 하고 믿을 수밖에 없다. 만원 짜리에 세밀화로 그려진 세종대왕이 진짜 세종대왕이 아니듯이, 오늘날까지 남아 전하는 사진들 속의 서울 풍경이 진짜 서울 풍경이 아닐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