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이야기] 죽어버린 청계천, 사라진 수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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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버린 청계천, 사라진 수문

홍순민(중세사 2분과)

홍인문―동대문을 유심히 보면 그 북쪽 옆구리, 곧 이화여대 병원 쪽의 옆 면은 경사면에 잔디가 덮여 있는 반면, 그 반대편 남쪽 옆구리, 곧 청계천 쪽의 옆 면은 잔디가 아닌 성벽 흔적이 있다. 도성은 흥인문에서 다시 남쪽으로 이어져 나갔었다는, 지극히 당연함에도 불구하고 흔히들 잊고 있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표징이다. 그 성벽 흔적마저 없었다면 정말로 흥인문은 애초부터 길 한가운데 무슨 기념물로 만들어 세웠던 것이라고 해도 어찌 반박할 도리가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지금 흥인문 남쪽에는 도성의 자취가 전혀 없다. 도성이 지나갔던 자리에는 길과 고가도로와 커다란 상가와, 동대문 운동장과 야구장 등이 들어서 버렸다.

흥인문에서 도성이 이리로 지나갔으려니 하고 짐작을 하면서 흥인문로를 따라 가다보면 몇걸음 가지 않아서 고가도로를 만난다. 유명한 청계 고가도로다. 청계 고가도로. 지금은 서울 한 복판을 가로 지르는 간선도로요, 그 아래는 다시 청계천로가 지나가고, 그 연변은 우리나라 최대의 상가가 형성되어 있다. 그 청계 고가도로, 청계천로 밑에 밑에 무엇이 있을까? 이런 질문을 던지면 젊은 사람들은 수도관이나 전선 케이블 정도를 생각할까 그 밑으로 하천이 흐르리라고 생각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나이 지긋한 분들이야 청계천을 알고 계시겠지만, 그나마 거의가 청계천 하면 더러운 물을 연상할 것이다.

청계천은 더럽다. 지금 그곳에는 생각만 해도 징그러운 온갖 세균들, 오물들, 썩은 가스로 가득 차 있을 것이다. 그 이름 ‘청계(淸溪)’―맑은 시내가 무색하다. 그러나 그 개울이 원래부터 그렇게 더러웠을 리야 있겠는가. 서울서 어린 시절을 보낸 40대만 해도 60년대 초까지도 그곳에서 가재를 잡은 경험이 있다고 한다. 그런 경험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참으로 믿기지 않는 이야기다. 그러나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면, 한말에 우리나라에 왔던 외국인들이 청계천에서 빨래하고 목욕하는 사람들을 찍은 사진들이 적지 않다. 오래지 않은 옛날, 한 두 세대 전만 해도 청계천은 빈 이름이 아니라 실로 맑은 시내였음을 보여준다.

청계천은 서울을 둘러싸고 있는 동서남북의 네 산들에서 흘러내린 물들이 모여 이룬 시내이다. 원래는 그리 깊지도 않고, 자연스레 꼬불꼬불 흘러가는 개울이었던 것을 1411년(태종 11) 8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바닥을 파내는 공사를 하였다. 이 때문에 이름이 개천(開川)이 되었다. 청계천은 인왕산과 백악산 자락에서 발원하여 서울 장안을 서에서 동으로 가로 질러 성밖으로 나가 중량천(中梁川)과 합류하여 한강으로 흘러든다. 한강이 서울을 감싸안고 동에서 서로 흐르는 외수(外水)임에 대해 청계천은 서울의 내수(內水)를 이룬다. 청계천은 그렇게 서울의 산수(山水)가 조화를 이루는 데 없어서는 안될 요소였다.

청계천이 동쪽으로 흘러 나가다가 도성과 만난 곳에는 수문(水門)이 있었다. 청계천 수문은 다섯 간(五間)이었다. 그 오간수문(五間水門) 남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는 다시 목멱산 자락에서 흘러 내려 온 시내가 빠져 나가는 두 간(二間)의 수문―이간수문(二間水門)이 있었다. 그 자리에 일제 시기에 운동장이 들어섰고, 해방 후에는 커다란 상가 건물들과, 고가도로가 들어섰다. 오늘날의 동대문 운동장과 야구장이요, 동대문 주변의 상가, 청계천로와 청계고가도로가 그것이다. 스포츠와 상업과 교통이 발달한 것이야 좋은 일이지만 그것은 맑은 시내, 산수의 조화를 대가로 지불한 값비싼 것임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청계천이 다시 살아나고, 오간수문과 이간수문이 부활할 수는 없는 것일까. 꿈같은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그렇게만 된다면 서울은 한결 더 부드러워질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