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이야기] 종로, 전차(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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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이야기 18 – 종로, 전차(2)


(사진 1) 1900년경의 보신각. 보신각이라는 이름을 굳이 해석하면 황제가 지정한 중앙, 또는 황도(皇都)의 중심이라는 뜻이 될 터이다.

종루를 중심으로 하여 혜정교 앞에서 탑동 어구 – 현재의 교보빌딩 앞에서 탑골공원 – 까지 동서로 뻗은 길은 조선시대 내내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다닌다는 뜻의 운종가(雲從街)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조선 후기에는 선전, 백목전, 청포전, 저포전, 지전 등 육의전의 중심 상전들이 모두 종각 주위에 분포하였다. 종각 앞, 종로 네거리는 이 도시의 상징적 중심이자 상업적 중심이었다. 종각에 보신각(普信閣)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1895년 3월 15일이었다. 서울의 4대문에 인의예지(仁義禮智) – 흥인지문, 돈의문, 숭례문은 이 순서에 맞는데 북문은 숙정문(肅靖門)[처음에는 숙청문(肅淸門)]이었다. 잡설(雜說)이지만, 백악(白岳)의 산세(山勢)가 드세어 음(陰)이 양(陽)을 누르게 될까봐 북문에는 다른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 순으로 이름을 붙였던 고례(古例)에 따라 중앙을 뜻하는 신(信)을 쓴 것인데, 이로써 종각은 서울의 공간적, 상징적 중심으로 공인되었다. 더불어 이 무렵부터 황제가 내탕(內帑)을 들여 만든 각종 시설, 건물들에는 대개 보(普)자가 붙기 시작하였다. 인쇄소 보성사(普成社) – 후일 기미독립선언서를 인쇄한 곳 -, 보성학교(普成學校) – 고려대학교의 전신 -, 보신회사(普信會社) – 지방관이 포탈한 조세를 추징하기 위해 그들의 집을 저당잡고 돈을 빌려주던 가권(家券) 전집회사(典執會社) – 등이 모두 그러하였다.


(사진 2) 1898년 가을의 전차궤도 부설공사. 이미 부설된 레일 위로 침목을 실은 수레를 옮기고 있다. 종로 양편의 가가는 모두 철거되어 있고 전차길 우측에는 전선 없는 전봇대가 미리 서 있다.

서울의 한복판인 종로를 관통하여 서대문에서 청량리까지 이어지는 전차 궤도 부설공사는 1898년 10월 17일부터 12월 25일에 걸쳐 진행되었다. 일본인들은 “경성전기주식회사이십년연혁사”(이후 “연혁사”로만 쓴다)에서 이 전차 부설의 배경을 희화적으로 묘사했는데 그 대강의 내용은 이렇다. 1897년 11월 명성황후의 국장을 치른 이후 고종의 홍릉 행차가 잦았는데, 그 때마다 10만원 안팎의 엄청난 비용이 소요되었다. 이 능행을 돈벌이 기회로 포착한 미국인 콜브란과 보스트윅은 고종을 알현하고 능행길에 전차를 놓으면 이동이 편리하고 경비도 절약될 뿐 아니라 평시에는 시민을 위한 교통수단으로 활용하여 돈을 벌 수 있다고 꼬득인다. 감언이설에 현혹된 고종은 선뜻 전차 부설에 동의하고 총신(寵臣) 이학균(李學均)으로 하여금 콜브란, 보스트윅과 교섭하게 한다. 계약이 체결된 것은 1898년 2월 19일이었고, 이어 이채연(李采淵)을 사장으로 하고 이근배, 김두승 등 종로 상인들을 중역으로 하는 한성전기회사가 출범하였다.


(사진 3) 운종가 한복판, 보신각 맞은 편(현 YMCA 옆 장안빌딩 자리)에 한성전기회사 사옥이 들어섰다. 고종과 콜브란이 50대 50으로 합작하여 설립한 회사이지만 초대 사장은 이채연(李采淵)이 맡았고, 중역진은 이근배, 김두승 등 유력한 시전 상인들로 구성되었다. 간판을 단 회사로는 아마도 이 회사가 처음일 것이다.

한성전기회사는 전차 부설뿐 아니라 한성 오서내 전등, 전화의 가설, 운영권까지 독점하였다. 전차 선로 공사는 정부와 황실의 적극적인 지원 덕에 순조롭게 이루어져 불과 두달여만에 완성되었고, 바로 장안의 일대 명물이 되었다. 사월 초파일, 전차 개통 당일에는 전차를 보거나 타기 위해 시민들이 몰려들었고 선로 전체가 사람들로 메워져 전차는 거의 달리지 못할 지경이었다. 그런데 정작 능행길에 이용할 목적으로 전차를 놓은 고종 자신은 객차가 상여(喪輿)처럼 생겼다 하여 한 번도 타지 않았다.


(사진 4) 1900년경 원래의 자리에 신축한 한성전기회사. 첨탑이 달린 2층의 르네상스식 건물로서 첨탑에는 시계가 걸렸다. 전차의 운행은 기계적으로 세분화된 시간이 자연적, 생체적 시간을 압도하는 데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태엽 시계는 천자(天子) = 황제만이 하늘의 운행을 관장할 수 있다는 오래된 시간관에 변화를 가져다 주었고, 거리와 시간 사이에도 새로운 정합성(整合性)을 만들어 내었다.

일본인들이 “연혁사”에서 소개한 내용은 오늘날 전차 부설의 경위에 대한 상식이 되어 있다. 그런데 이 글에는 몇가지 납득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우선 이 설명대로라면 이 땅 최초의 전차, 서울 지하철 1호선의 원형이 만들어진 배경은 고종과 명성황후 간의 사적 관계 속에 용해되어 버린다. 고종이 죽은 명성황후를 그리워한 탓에 능행이 되풀이되었고, 그것이 전차 부설의 직접적 배경이 된 셈이니까. 일본인들이 만들어 놓은 문헌에 그려진 고종과 왕비(황후)는 언제나 한결같다. “무능하고 나약한 혼주(昏主) 고종과 탐욕스럽고 꾀 많은 여걸 민비”. 일본인들은 고종을 10살에 왕이 되어 대원군 손아귀의 여의주 노릇이나 하다가 이른바 “친정(親政)”이라는 것을 하게 된 이후에는 여편네 치마폭에 감싸여 살면서 홀아비가 될 때까지 아내를 엄마처럼 생각하고 산 – 심지어는 아내가 죽은 후에도 그를 못잊어 애타게 그리워 한 – 정신적으로 미성숙한 사람으로 묘사하고 싶어 했다. 이런 이미지 메이킹은 무척 성공적이었던 데다가 다른 측면에서 비슷한 내용을 전한 당대 지식인들의 글도 남아 있어서 오늘날 고종에 대한 일반적 이미지로 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고종이 정말 그러했고 전차는 정말 그 때문에 놓인 것일까.


(사진 5) 1897년 명성황후 국장. 고종은 왕비가 죽은 후 2년이나 지난 뒤, 대한제국을 선포한 이후에야 비로소 ‘황후의 예’로써 장사지냈다. 대안문을 나선 행렬은 종로를 관통하여 청량리까지 이어졌는데, 그 전에 이미 종로길은 깨끗하게 정비되어 있었다. 이 국장 행렬은 대한제국기 서울 시민이 기억하는 행렬 중 가장 대규모의 것이었다.

왕비가 살해된 것은 1895년 10월 2일이었고, 황후의 예로 국장을 치르고 홍릉에 안장한 것은 대한제국 선포 후인 1897년 11월 27일이었다. 문제가 된 고종의 홍릉행차는 당연히 이 이후의 일이다. 그런데 그로부터 채 석달도 되지 않아 한성전기회사가 출범하였다. 이 짧은 기간 동안에 “엄청난 경비”를 낭비할만큼 잦은 능행을 할 도리는 없다. 설사 능행이 잦았다 하더라도 거기에 소요되는 비용 중 가마를 메거나 깃발을 드는 역군들에 지급되는 몫은 무시해도 좋은 정도였다. 이 역(役)은 대개 시전상인들이 담당하였는데, 그들에게 따로 역가(役價)를 지급하지는 않았다. 조선 후기 이래 능행 비용에서 가장 많은 몫을 점한 것은 가가(假家) – 임시로 지은 가건물을 말하는데, 주로 상업용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이 말이 변한 ‘가게’가 곧 상업점포를 지칭하는 의미로 변하였다 – 철거 및 개건비였다.

언제부터 종로 양측에 가가(假家)들이 들어섰는지를 정확히 알 도리는 없다. 아마도 1791년 신해통공(辛亥通共)으로 육의전 전관(專管) 물종을 제외한 여타 소소한 물종의 자유방매가 허용되면서 소상인들이 임의로 가건물을 짓기 시작했던 것 같다. 이 무렵 가가(假家)들로 가득찬 운종가에는 그 가가만큼이나 많은 여릿군(餘利軍) – 오늘날의 호객꾼, 속어로 삐끼이다. 소비자를 상인에게 데려다 준 댓가로 이익금의 일부를 받는다 해서 여릿군이라고 했고, 종로 좌우에 줄 지어 늘어서 있다 해서 열립군(列立軍)이라고도 불렸다 – 들이 늘어서서 지방에서 올라온 어리버리한 소비자들에게 바가지를 씌우곤 했다. 그리고 어느 사이엔가 가가(假家) 터에 대한 권리가 물권화(物權化)되어 전상매매(轉相賣買)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 오늘날 포장마차 권리금과 같다 -.

원칙대로라면 – 원칙이라는 말 자체가 근대적 합리성의 범주 안에서만 구체적 의미를 갖는다는 점을 감안하자 – 국중(國中)의 대로(大路)요 법으로 정해진 노폭(路幅)을 가진 종로 좌우에 들어선 건물은 모두 불법이었다. 당연히 이들 건물에 대해 국가권력이 취해야 할 ‘옳은’ 태도는 눈에 띠는대로 철거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또 옳다고 해서, 법에 정해져 있다고 해서 그냥 밀어붙일 수만도 없는 것이 나랏일이다. 소민(小民)과 세민(細民)에게 – 엄밀히 말하자면 가가(假家) 주인이나 포장마차 권리자가 영세민들로만 구성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사실이야 어찌 되었든 이런 일에는 ‘오죽하면’이라는 형용어가 붙게 마련이고, 그래서 이들을 거리에서 내쫓으면 횡포한 권력으로 취급받는다 – 먹고 살 길을 열어 주는 것은 왕도(王道)의 기본이었다. 깍정이들에게조차 살 길을 열어주는 것이 왕이 일인데, 그깟 길이야 일시적으로 침범하면 어떠랴. 왕이 길을 쓰고자 하면 알아서 철거한다는데. 그 마음씀이 갸륵하지 않은가. 그래서였는지, 다시 어느 시점에선가는 왕실에서 가가 철거 및 개건비를 ‘보조’해 주는 관례가 생겨났고, 이윽고 그 액수가 눈덩이처럼 늘어나게 되었던 것이다.


(사진 6) 1896년 이전의 종로. 도로 양편에 초가로 얼기설기 엮은 ‘구멍’만한 가가(假家)들이 듬성듬성 늘어서 있다. 동대문에서 서대문 방향으로 찍은 사진인데 도로 한복판으로는 장작을 진 소떼행렬이 유유히 지나고 있다. 운종가 부근의 가가는 이보다 더 많았을 것이다.

그런데 콜브란이 전차 부설을 건의하던 당시에는 이미 가가 철거 및 개건에 돈을 들일 이유가 없어진 뒤였다. 1896년 9월 30일, 내부(內部)는 종로와 남대문로변에 늘어선 가가(假家) 일체를 철거하되 노폭에 여유가 있는 곳에 지은 일부 가가를 양성화하는 것을 골자로 한 ‘한성내 도로의 폭을 개정하는 건’을 발포하였다. 19세기 이래 간단 없이 제기되어 왔던 도로 정비, 도시 공간 개조를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이에 따라 서울 도심부에 가득 차 있던 가가는 대부분 철거되었고 영업장소를 잃은 가가 상인들을 수용하기 위한 장소로 선혜청(宣惠廳) 옛 창고 등 각처가 새로이 배정되었다. 명성황후의 국장이 치러지기 전에 이미 종로 대로는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이사벨라 버드 비숍은 불과 몇 년 사이에 이 길이 변화한 모습을 보고는 “과거 동방에서 가장 더러운 거리 – 그녀는 서울을 보기 전까지는 북경보다 더러운 도시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고 한다 – 가 이제 가장 깨끗하고 현대적인 거리로 바뀌었다”고 찬탄했다. 종로가 바뀐만큼 종로를 지나는 능행에 드는 비용도 이전보다 크게 줄일 수 있었다. 그러니 돈을 아끼려 전차를 놓았다는 말은 믿기 어렵다.


(사진 7) 전차 궤도 부설 후의 종로. 대로 양편을 메우고 있던 가가는 깨끗이 철거되었고 도로 한복판에서 약간 북쪽(사진 오른쪽)으로 치우쳐 궤도가 부설되어 있다. 궤도 옆에으로는 전봇대가 나란히 늘어서 있다. 대로 양편의 행랑은 일직선으로 곧게 늘어서 국초 건설당시의 모습을 되찾았다. 사진 중앙부에 돌출한 양식 가건물은 전차표 판매소이다.

다음으로 일본인들의 기록은 ‘능행(陵幸)’이 갖는 정치적, 상징적 의미를 애써 묵살하고 있음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능행은 왕이 자신의 선조를 추모하는 사적(私的) 행위에 머무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먼저 장안(長安) 백성들에게 그 자체로 존엄한 왕의 실존을 알리는 퍼레이드였으며, 더불어 왕이 백성에게 전하고자 하는 정치적 메시지를 담은 시위였고, 나아가 일반 백성에게 직접 왕을 대상으로 발언할 기회를 주는 소통의 통로였다. 굳이 심각한 의미부여를 하지 않더라도 이 행렬은 별다른 오락거리를 갖지 못했던 서울 시민들에게 훌륭한 볼거리를 제공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사진 8) 시흥환어행렬도(始興還御行列圖). 정조가 능행길에 시흥 행궁으로 들어서는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백성들은 땅에 엎드리지 않은 채로, 행렬을 편안히 구경하고 있는데, 심지어 엿장수 떡장수까지 돌아다니고 있다. 왕에게는 ‘빠르고 편안하게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 보다는 ‘수많은 수행원을 거느리고 이동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정치적으로 더 중요했다.

능행의 정치성은 조선 후기에 특히 두드러졌는데, 예컨대 정조가 한강 도하(渡河)라는 번거로움을 무릅쓰면서 장조(莊祖) – 사도세자, 정조의 생부 – 의 능을 굳이 수원에 쓴 것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서였다. 그는 이 장엄한 행렬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과시하고 사도세자의 죽음과 관련된 기억을 되살리고자 하였으며, 더불어 빠르게 변화하고 있던 한강변과 그 이남 지역의 실태를 직접 확인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래서 왕의 능행은 호화롭고 웅장하다는 점에서는 과시적이면서도 잡인(雜人)의 접근에 개방되어 있다는 점에서는 포용적인 이중적 성격을 띠었다. 억울한 사연을 지닌 사람들은 궁궐 앞에 나아가 신문고를 치는 대신에 왕의 능행길 옆에서 바로 징이나 꽹과리를 침으로써 왕에게 직접 호소할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요컨대 능행은 왕의 정치적 의도와 백성의 정치적 사회적 요구가 만나는 한마당의 굿판이었다. 그런만큼 능의 위치나 노정(路程)의 결정 등에는 정치적 고려가 담길 수밖에 없었다. 그랬을진대 황제의 능행을 단지 황후에 대한 그리움의 발로였다고 심상히 보아 넘길 수 있을 것인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종로와 전차, 지하철 1호선의 역사는 고종의 ‘못 다 이룬 사랑’이 남긴 한갓 에피소드가 되어 버릴 것이다.

고종이 설령 바보였다 해도 능행에 각인된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의미를 몰랐을 턱이 없다. 아니 오히려 그는 선왕(先王)들이 만들어 온 “국장(國葬)과 능행의 정치학”에 대한 식견이 무척이나 깊었다. 그랬기에 왕후가 죽은 지 2년 동안이나 장례를 치르지 않다가 제국을 선포한 다음에야 황후의 예로써 국장(國葬)을 치렀던 것이며, 그랬기에 굳이 동대문 밖 청량리에 능을 썼던 것이고, 그랬기에 종로를 관통하는 – 고종이 홍릉에 행차할 때에는 이미 전차 부설 공사가 진행 중이었다 – 능행길에 올라 시민들의 오감(五感)을 직접 자극했던 것이다.


(사진 9) 한성전기회사와 보신각. 우측 끝에 있는 것이 보신각이고 좌측 중앙부에 보이는 서양식 첨탑을 단 건물이 한성전기회사이다. 1905년경.

대한제국을 역사적으로 어떻게 자리매김하건 간에 이 ‘나라’는 적어도 한 가지 점에서만은 한국사 전체에서 확실히 특이한 위치를 점한다. 대한제국 선포 이후 고종이 강제로 양위되기까지 10년간, 이 ‘나라’는 국모(國母)가 없는 나라였다. 이 땅에서 왕조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수천년간 남자가 왕위에 있으면서 그 공식적 배우자가 지정되어 있지 않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심지어 64세에 홀아비가 된 영조도 그 다음다음해에 15살 먹은 어린애를 계비(繼妃)로 들였다. 그런데 아직 강건한 40대의 고종은 곤위(坤位)를 비워둘 수 없다는 숱한 간언(諫言)을 묵살하면서까지 계비(繼妃)를 맞아 들이지 않았다. 을미사변 직후 한 때 간택작업이 진행되기는 했지만 아관파천 이후 곧 무효화되었다. 그리고는 더 이상 황후 간택과 관련된 조치는 나오지 않았다. 고종은 왜 사상 유례가 없는 이같은 짓을 저질렀을까? 사실 고종은 황후를 새로 맞아들이는 일과 관련해서는 아무짓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때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무엇인가를 하는 것보다 더 큰 사태를 빚기도 한다. 고종이 새 황후를 만들지 않은 것은 국모(國母)가 없는 기형적인 나라를 ‘만드는’ 엄청난 짓이었다.


(사진 10) 사직에 제례를 드리러 가는 황제의 행렬. 어던 이유의 행차이든 간에 황제의 행차는 그 자체로서 장엄하고 화려한 퍼레이드였다. 중국의 역대 황제들은 대군을 거느린 친정(親征)의 유혹에 쉬 빠져들곤 했지만, 대한제국의 황제는 그런 행렬에 관한 기억과 전례(前例)를 갖지 못했다. 그렇더라도 자신의 엄청난 ‘권위’와 ‘힘’을 때때로 보여줌으로써 도시민들에게 ‘황제의 실존’에 관한 인상을 각인시키는 일이 필요하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