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이야기] 종각(鍾閣)? 종루(鍾樓)!

0
326

종각(鍾閣)? 종루(鍾樓)!

홍순민(중세사 2분과)

서울은 도성으로 빙 둘러싸여 있고, 도성에는 네 대문과 네 소문이 나 있었다. 그 가운데 숭례문이 제일 정문이었다. 숭례문을 들어서서 성안의 중심부로 통하는 길이 오늘날의 남대문로이다. 옛 서울의 성안의 큰 가로(街路)로는 남대문로 외에 흥인문―동대문과 돈의문―서대문을 연결하는 가로가 있었다. 흔히들 이 가로를 운종가(雲從街)라고 하였다. 구름처럼 사람들이 많이 모여는 가로라는 뜻일 터이다. 이렇게 볼 때 운종가는 오늘날의 종로와 신문로를 합한 셈이 된다. 하지만 엄밀하게 말하자면 운종가는 이 가로의 일부, 곧 운종가와 남대문로가 만나는 지점이 있던 종루(鐘樓)의 서쪽 편 일대만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운종가와 남대문로가 만나는 지점, 다시 말하자면 서울의 중앙부에 종루가 있었다. 정확한 위치와 모양은 차이가 나지만 오늘날의 종각(鐘閣)―보신각(普信閣)이 그것이다. 오늘날에는 종루라는 말을 거의 쓰지 않고 대부분 종각이라 하지만, 종루와 종각은 분명히 구분되는 용어이다. 한자로 루(樓)란 지면에서 한 길 정도 떨어진 마루집이거나, 이층집의 이층을 가리킨다. 이에 비해 각(閣)은 단층의 단촐한 집이거나, 이층집의 일층을 가리킨다.

조선초기에 애초에는 1396년(태조 5) 지금의 인사동 입구쯤에 있던 청운교(靑雲橋) 서쪽에 정면 5간에 2층 짜리 누각을 짓고 종을 걸었었다. 그러다가 서울의 중심 가로을 따라 상가나 관가, 창고 등으로 쓸 대규모의 행랑(行廊)을 짓던 1413년(태종 13)에 종묘 남쪽 길에 고쳐 지었다가, 다시 지금의 종로 네거리로 옮겼다. 이 무렵에는 그 종루에 누기(漏器), 곧 물시계를 함께 설치하여 그것이 알려주는 시각에 따라 종을 쳐 시각을 알렸다.

태종 14년에 이르러 파루(破漏) 치는 시각을 5경(更) 초점(初點)에서 5경 3점으로 늦추고, 밤을 알리는 인정(人定)은 주역의 64괘에 맞추어 64번이나 쳤었는데 하늘의 별자리 28수(宿)에 맞추어 28번만 치는 것으로 고쳤다. 그러나 시각을 재는 누기가 정확치 못한데다가 그 담당자가 착오를 일으키면 관원이나 민간인들의 출입까지도 이르거나 늦는 수가 많았으므로 1437년(세종 19)에는 궁궐 안에 있는 자격루에서 잰 시각을 종루로 전달하기 위하여 지금의 세종로에 쇠북(金鼓)를 설치하였다.

그러다가 1440년(세종 22)에는 기존의 종루를 헐고 동서 5간, 남북 4간의 2층으로 고쳐 지어 위층에 종을 달고 아래 층으로는 인마가 다니게 하였다. 이 종루는 서울 한복판에 높이 솟아 서울의 상징이 되는 장엄한 것이었다. 그 종루의 어간(御間)―중앙 간은 아무나 다니는 것이 아니라 왕만이 지나다닐 수 있었다. 그랬던 종루에 대해서 1459년(세조 5)에는 종각(鐘閣)을 광화문 앞에 지었다. 이 종각은 경복궁 안의 보루각에서 잰 시각을 종루로 알려주는 중간 전달 기능을 하기 위한 것이었다.

위용을 자랑하던 종루는 임진왜란 당시 불타 없어지고, 거기 달려 있던 종은 깨어진 채 흙속에 묻혔다. 임진왜란의 와중에는 그 종을 녹여 다른 데 썼다. 그후 광해군 때 종루를 다시 짓자는 이야기가 나왔지만, 이전처럼 장엄하게 2층의 누각을 짓지는 못하고 단층 종각으로 지었다. 그것을 몇차례 고쳐 지으면서 그 모습으로 전해 왔다.

1895년(고종 32)에 고종이 “보신각(普信閣)”이라는 사액 (賜額)을 내렸다. 이것이 1915년 길을 넓히면서 원래의 위치에서 약간 뒤로 물렸었다. 그 종각은 6.25때 파괴되어 1953년에 다시 뒤로 조금 더 물러 중건하였다. 지금의 종각은 1979년에 중건한 것으로 철근콘크리트조로 된 정면 5간 측면 4간의 2층 누각이다. 그러므로 굳이 따지자면 지금의 것은 “종각”이 아니라 “종루”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