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이야기] 정도전의 서울, 이방원의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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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이야기 3 – 정도전의 서울, 이방원의 서울

새 왕조를 연 이성계와 그 일파는 왕이 되자마자 천도(遷都) 문제에 매달렸다. 천도의 이유는 많았고 또 분명했다. 그들은 왕조(王朝)의 성쇠를 왕도(王都)의 지기(地氣)와 직결시켜 온 지리도참적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400여년간 특권적 공간을 만들어 놓고 그 속에 안주해 온 전 왕조의 신민(臣民)들을 안심하고 믿을 수도 없었다. 전 왕조의 귀신들이 차지한 자리 – 종묘(宗廟) – 에 새 왕조의 귀신들을 같이 모시는 것도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역성(易姓) 혁명의 명분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도 새 왕조 개창자들의 이상을 표현하는 새로운 도시를 창조할 필요가 있었다.

당시에도 천도 반대론은 있었다. 민심을 동요케 하고 백성을 피곤하게 하며 많은 물력이 소요될 것이라는 주장, 400여년간 개경이 도읍으로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다 그럴만한 까닭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주장, 전왕조에서도 여러 차례 천도를 시도했지만 결국에는 개경만한 곳을 찾지 못했다는 주장이 이곳 저곳에서 튀어 나왔다 – 오늘날에도 행정 수도 이전을 반대하는 주장의 논거는 600여년전의 그것과 거의 달라진 바 없으니 이를 두고 역사의 아이러니라 해야 할 것인지 – . 그러나 어떤 이유를 내세우든 간에 그 주장의 핵심에는 ‘개경에 쌓아 둔 특권의 구조물이 동요해서는 안된다’는 구 특권층 – 새로 거기에 편입되었거나 그 자리를 빼앗은 사람들까지 포함하여 – 의 요구가 자리잡고 있었다.

새 왕조의 서슬 퍼런 권위로도 반대론을 제압하기가 쉽지는 않았다. 태조 이성계가 몇차례나 강경한 태도를 취한 뒤에야 겨우 천도를 결정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당장은 도읍을 옮긴다는 원칙만 섰을 뿐, 어디에 어떤 도시를 만들 것인가 하는 문제까지 결정된 것은 아니었다. 그 문제는 또 다른 논의를 거쳐야 했고, 이를 둘러싸고 당대의 주역들 간에 힘겨루기가 시작되었다. 때로는 천도 결정 자체를 무효화하려는 시도도 나타났다.

서울 공간의 원형을 얘기할 때 흔히들 ‘풍수지리설과 유교적 이상도시론의 조화’를 들먹이곤 한다. 새 도읍의 입지는 풍수지리설에 따라 정하고 내부 공간의 설계는 『周禮』 「考工記」에 따랐다는 식이다. 도읍지 선정 과정에서 무학(無學이 행한 역할에 관한 얘기들이나 무학(無學)과 정도전(鄭道傳)의 논쟁에 관한 얘기들이 설화가 되어 전하고 있다. 그런데 도시란 애당초 조화로운 공간이 아니다. 그것은 새비지가 말한 바 ‘권력이 흔적을 남긴 사회 갈등과 정치 과정의 물리적 고증물’이다. 권위와 상징의 역전, 재역전은 있지만 그것은 부조화의 공존일 뿐이다. 오랫동안 경복궁과 조선총독부 청사가 공존했던 적이 있었다. 그 때 그 두 건물이 ‘절묘한’ 조화를 이룬다고 생각한 사람이 있었을까. 신도(新都) 조영 문제에 관한 한 무학(無學)과 정도전은 조화롭게 협력한 것이 아니라 서로 대립했고, 결국 승패(勝敗)가 갈렸다. 무학(無學)에 관한 설화가 유난히 많이 전해지는 것도 그 승부의 결과에 대한 집단적 불복의 심성(心性) – 그 무렵 종교 지형의 결정적 변화와 관련하여 – 과 관련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새 도읍의 입지에서 중요하게 고려된 것은 사람에 따라 여러 가지 해석이 나올 수 있는 풍수학 – 관상학이니 작명학이니 하는 것도 있다. 오해 마시길 – 이 아니라 해석이 필요 없는 한강이었다. 한강은 천혜의 방어선이었고 교통로였다. 새 수도의 촉수이자 빨판으로서 한강만큼 효율적인 것은 없었다. 그래서 한강은 풍수학적 가치판단을 종속시켰다. 풍수학의 역할은 한강이 주는 입지적 장점을 해석해 주는 것으로 족했다. 풍수학상 최고의 길지(吉地)로 평가받던 계룡산 아래에서 신도(新都) 건설 공사를 시작했다가 곧 중지했던 것도 그 곳이 사방팔방으로 뻗어 나갈 수 있는 촉수를 갖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정도전이 이겼다. 그가 교조적으로 지키고자 했던 유교적 합리성이 불교적, 풍수학적 신비주의에 승리했다. 그는 승자의 권리를 행사하여 새 도시 공간 위에 자신의 이상을 구현하고자 했다. 그래서 한양 정도 직후의 도시 설계안은 – 비록 그 전모를 확인할 수는 없지만 – 『주례(周禮)』의 가르침을 가급적 충실하게 따른 것이 되었다. 정도전은 새 도시에서 괴력난신(怪力亂神)이 거처할 곳을 아예 없애 버리려 하였다 –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장황하게 쓰겠다 – . 정도전은 종묘와 사직, 궁궐과 관아, 저자와 민가, 학교와 사당만으로도 도시를 만들 수 있다고 믿었다. 세부 위치를 선정하는 문제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그는 새 도시를 공적(公的) 건물과 공적 기관만으로 채우고자 했고, 왕에게조차도 예외를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흔히 중세 도시에는 사적 공간만 있었을 뿐 공적 공간은 없었다고들 하지만, 정도전은 오히려 서울의 모든 공간 요소를 공적으로 분배하고 관리하고자 했다. 그에게 왕은 다만 공(公)의 상징이고 대표이며 주재자일 뿐이었다. 정도전은 서울 성곽을 쌓았고 경복궁(景福宮)을 지였으며, 종묘와 사직, 성균관을 지었고 육조거리를 만들었다. 경복궁 뒤에는 옹색하나마 시전(市廛)도 설치했다. 서울 공간의 원천적 한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뒤틀리기는 했지만, 전조후시(前朝後市) 좌묘우사(左廟右社)나 제후칠궤(諸侯七軌)의 원칙은 그대로 관철되었다.

경복궁을 들여다 보면 정도전의 생각을 알 수 있다. 조선왕조의 국가권력은 왕권(王權)과 신권(臣權)의 특유한 길항관계 속에서 배분되고 행사되었던 바, 아마도 그것은 새 왕조의 체제를 둘러싼 정도전과 이방원의 대립에서부터 시작되었을 것이다. 정도전은 이 문제에 관한 자신의 생각을 경복궁의 전각 배치 속에 담았다. 경복궁은 궁역(宮域)과 궐역(闕域)이 명확한 경계 위에서 구분된 궁궐이었다 – 임의적이라는 지적을 감수하고, 여기에서는 궁역(宮域)은 왕과 그 일가의 사생활 공간으로, 궐역(闕域)은 왕과 그 신하들이 정무(政務)를 처리하는 공적 활동의 공간으로 구분한다 – . 궁궐의 한 가운데 전각[중전(中殿)]을 경계로 하여 그 앞쪽 – 남쪽 – 으로는 차례로 왕의 침전, 편전, 정전을 배치했다.

경복궁 평면도. 광화문 – 홍례문 – 근정전 – 사정전 – 강녕전 – 교태전으로 이어지는 직선축이 뚜렷하며, 그 축을 경계로 좌우의 권역이 거의 동일하게 배분되어 있다. 경회루는 경복궁 내에서도 랜드마크 구실을 할 정도로 강한 이미지 요소이다.

중앙의 이 축선은 왕(王)의 공간이자 궁역과 궐역의 경계선이었다. 그 왼쪽 – 동편 – 에는 세자궁[동궁(東宮])과 대비전[자전(慈殿)]이 들어서 궁역이 되었으며, 오른쪽 – 서편 – 은 궐내(闕內) 각사(各司)를 들여 놓아 궐역으로 하였다. 중전의 뒤편은 후궁(後宮)으로 왕을 위한 사적 공간이었다. 동궁이니 중전이니 후궁이니 하는 말은 궁궐 내 해당 전각의 위치를 칭하는 말이다 – 물론 모르는 독자는 없겠지만, 노파심에서 그냥 적었다 – .

후원을 제외하고 보면 경복궁에서 궁역과 궐역은 기계적 균형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곳곳에 궁역보다 궐역을 더 많이 배려한 흔적이 보인다. 경복궁 내에서 가장 큰 건물은 당연히 근정전(勤政殿)이다. 그러나 개념상 가장 큰 건물은 근정전 서편의 40칸(전면 10칸 측면 4칸) 짜리 수정전(修政殿)이다. 세종 때 집현전(集賢殿)으로 썼던 이 건물에 가장 큰 건물이라는 상징성을 부여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 뒤에 바짝 붙어 있는 경회루(慶會樓)를 보면 이유가 짐작된다. 경회루(慶會樓)는 글자 그대로 ‘기쁠 때(慶) 모이는(會)’ 곳이다. 왕과 신하가 ‘함께’ 즐기는 연회장이었다. 태종이 대규모로 증축한 이후로는 주로 외국 사신을 접대하는 데 썼다고 하지만, 본래 기능은 ‘왕과 신하의 합동 연회장’이었다. 왕권(王權)에 위축되지 않는 신권(臣權)을 표상하기 위해 수정전(修政殿)을 그토록 크게 짓고 그 뒤에 경회루(慶會樓)를 만든 것은 아닐까. 정도전이 만든 경복궁은 임란 때 타버렸고, 대원군이 중건한 경복궁도 일제 강점기에 폐허가 되어 버렸다. 그런 상태에서 경복궁의 모습을 얘기하는 것이 무리일 수밖에 없지만, 아무리 상상력을 발휘해도 경복궁의 후원이 창덕궁 후원보다 나았을 것 같지는 않다. 왕이 전유하는 공간에 대한 배려는 아무래도 창덕궁에 비해 부족했던 듯 싶다.

 

창덕궁 전경. 꼬불꼬불 휘돌아 가며 전각이 배치되어 있어 경복궁의 직선적 경관축과

뚜렷이 대조된다.

1398년, 정도전이 죽었다. 정도전이 새 도시 공간 위에 구현하고자 했던 꿈도 아울러 사라졌다. 새 임금 정종은 다시 개경으로 거처를 옮겼다. 종묘와 사직은 한양에, 왕궁은 개경에 있는 어정쩡한 양경(兩京) 시절이 한동안 지속되었다. 1400년 왕위에 오른 이방원은 1405년 거처를 다시 한양으로 옮겼다.

이방원은 정도전이 한양 공간 도처에 새겨 놓은 꿈을 다 지워버리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장소를 모욕할 수는 있어도 그 흔적을 지울 수는 없는 법이다. 장소 위에 새겨진 역사는 누적될 뿐 대체되지는 않는다. 이방원은 정도전의 집을 사복시(司僕寺) 마굿간으로 바꿔 버렸고, 신덕왕후 묘의 신장석을 광교 교각의 초석으로 삼아 버렸지만, 장소가 남긴 흔적은 어쨌든 이방원보다 훨씬 오래 살아 지금껏 버티고 있다.

이방원은 서울로 환도하자 마자 창덕궁을 짓고, 종로에 행랑을 건설했으며, 개천을 준설했다. 창덕궁과 시전으로 인해 전조후시(前朝後市) 좌묘우사(左廟右社)의 격식은 여지없이 무너졌다. 종묘에 붙어선 궁궐, 조정 관아에 잇대어진 저자가 만들어진 것이다. 그는 격식에 구애되지 않는 절대적 권력을 바랐다. 그에게는 왕의 사(私)가 곧 공(公)이었다. 그는 자신이 생각하는 새 왕조의 권력구조를 새 궁궐에 표현했다. 그래서 창덕궁은 경복궁과 전혀 다른 궁궐이 되었다. 창덕궁에서 궁역과 궐역을 구분하는 것은 쉽지 않다. 궐내 각사는 왕의 전각에 종속되어 있다. 왕이 전유하는 후원은 무척 넓고 잘 가꾸어져 있지만, 신하들을 위한 공간적 배려는 찾아 보기 어렵다. 창덕궁에서 신하는 독립된 권역을 가질 수 없었다. 신하는 어디까지나 왕의 종복(從僕)일 뿐이었다. 이방원은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공간을 꾸몄다.

정도전의 서울과 이방원의 서울은 부조화된 채로 서울의 원형을 구성했다. 다른 생각, 다른 꿈이 한 공간에서 공존했다. 그 공존은 조선 왕조 600년간 계속된 왕권과 신권의 길항관계를 표현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정도전과 이방원이 뜻을 맞춘 대목도 있었다. 그리고 사실은 그 지점이 중세 도시 서울의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을 만들어냈다. ‘억불(抑佛)’. 이에 관한 얘기는 다음으로 넘기겠다.

 

 

필진 : 전우용 | 등록일 : 2004-08-02 | 조회 : 47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