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이야기] 웬 잔디? 웬 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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웬 잔디? 웬 탑?

홍순민(중세사 2분과)

경복궁에 수백 채에 달하는 건물들이 있었고, 그 주요 건물들마다 질서 정연하게 명칭이 붙여졌다면, 그 건물들의 공간 배치 또한 정연한 질서를 가지지 않았을 리 없다. 원래 경복궁에 정식으로 들어오는 동선은 정문인 광화문을 들어서서 홍례문을 지나 영제교를 건너 근정문을 들어와 근정전에 이르게 되어 있었다. 그 근정전은 관료들이 왕에게 조하를 드리던 곳으로 그 일대를 외전(外殿) 이라 한다.

근정전에서 더 안으로 들어가면 사정전, 강령전, 교태전을 비롯해서 그 부속건물들이 포진하고 있는 영역이 나오는데 여기가 왕과 왕비가 활동하는 공간인 내전(內殿)이다. 외전과 내전의 동쪽, 동문인 건춘문을 들어서서 만나는 일대에는 자선당, 비현각을 중심으로 하는 세자의 활동 공간이 있는데 이곳을 동궁(東宮)이라 하였다. 또 그 반대편 외전과 내전의 서쪽, 서문인 영추문을 들어선 지역에는 궁궐에 들어와 활동하는 관원들의 관서들이 다수 모여 있었는데 이 영역을 궐내각사(闕內各司)라 한다.

내전의 북쪽 편에는 왕과 왕비 이외의 여러 왕실 가족들, 그리고 그들을 시중드는 궁녀를 비롯한 여러 층의 인물들이 기거하며 활동하는 공간이 있고, 그 뒤편 북쪽 담장에 가까운 지역에는 커다란 연못과 동산이 있어 궁장 안의 후원(後苑)이 되었다. 고종 초년 경복궁이 중건되었을 때에는 후원이 궁장을 벗어나 북문인 신무문을 나서서 백악 기슭으로 연장되었다. 오늘날의 청와대가 들어앉은 그 일대이다. 궁궐은 이렇게 외전, 내전, 동궁, 궐내각사, 생활기거공간, 후원 등으로 공간구조가 짜여 있어서, 각 영역에서는 그에 걸맞는 인물들이 걸맞는 활동을 하였다. 이러한 영역들이 어울려 궁궐 전체는 왕실의 생활 공간이자 국가의 최고 관부로서 정치와 행정, 그리고 문화의 중심지로 제 기능을 발휘하였다.

그러나 지금 궁궐에서 그러한 공간구조를 더듬어 보는 것은 무망한 일이 되어 버렸다. 건물들은 모두 없어지고, 그 터는 널찍널찍한 길과 잔디밭들이 들어 섰다. 오늘날 궁궐에서 가장 인상깊은 것은 아마 잔디밭일 것이다. 그러나 궁궐의 잔디밭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같지만 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우리 고유의 조경법에는 사람 사는 집의 울 안에는 잔디를 심지 않는다. 그런데 궁궐 담장 안에 웬 잔디? 그 잔디는 말하자면 어떤 건물이 헐리고 없어진 자리, 건물의 무덤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 잔디밭들에는 불탑과 부도들이 여기저기 자리잡고 있다. 근자에는 없던 불상까지 새로 등장하였다. 불탑이란 석가님의 사리를 모신 부처의 상징물이요, 불상은 말할 것도 없이 부처님의 형상이다. 부도는 고승들의 사리를 모신 일종의 무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물건들이 있어야 할 곳은 어디인가? 두 말할 필요도 없이 절이다. 그런데 그것들이 어찌 궁궐에 와 있는가? 그것도 불교 국가의 궁궐이라면 혹 몰라도 유교를 지도 이념으로 삼았던 조선왕조의 궁궐 경복궁에 웬 탑? 웬 부도? 웬 불상? 경복궁에 가서 불탑, 부도, 부처를 바로 코 앞에 놓고도 이러한 지극히 당연한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은 의외로 적다. 그저 옛날 궁궐에 옛날 유물들이려니 여기고 지나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이 장면은 결코 그냥 지나칠 수가 없다. 그 안내판을 보면 대부분이 1915, 16년에 경복궁으로 옮겨진 것으로 되어 있다. 1915년. 그 해는 일제가 이곳 경복궁에서 이른바 ‘시정오년기념조선물산공진회’를 연 해이다. 그 공진회를 계기로 경복궁은 본격적으로 파괴되었다. 그것도 모자라 이렇게 불교 유물을 가져다 놓음으로써 경복궁도, 또 원래 그 유물들이 있던 사찰들도 일거에 이중 삼중으로 능욕을 당한 것이다. 이 유물들에는 일제의 간교한 우리 문화 파괴가, 우리의 치욕스런 식민지 역사가 깃들어 있는 셈이다. 능욕과 수치를 당하고서도 아무런 감각이 없다면 그는 성자 아니면 천치이다.

최근에 불교계에서 경복궁에 있는 불교 유물들을 돌려달라는 요구를 하였다. 제 자리에 잘 되돌릴 수만 있다면 원칙적으로 그렇게 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겠다. 그러나 요즈음 유서깊은 옛 사찰들이 어마어마하게 커다란 시멘트 건물로 망가져 가는 현실을 감안하면 원칙론만 고집하기도 조심스럽다. 이런저런 사정을 합리적으로 고려하여 마땅한 조처를 취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