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이야기] 액을 막고 비를 부르던 문 : 숙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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액을 막고 비를 부르던 문 : 숙정문

홍순민(중세사 2분과)

백악산 산줄기가 동남쪽으로 매봉우리―응봉(鷹峯)을 향해서 흘러 내려가는 중간에 부엉이 바위―휴암(휴岩) 또는 백련봉(白蓮峰)이라고 하는 큰 바위라고 할까 작은 봉우리라고 할까 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과 백악 사이에 서울 도성의 북문인 숙정문(肅靖門)이 있다. 숙정문은 애초 태조 때 도성을 처음 쌓고 성문들에 이름을 붙일 때는 숙청문(肅淸門)이었다. 숙청문은 태종 13년(1413)에 경복궁의 두 팔에 해당되므로 길을 내지 말아서 지맥을 보존해야 한다는 풍수가의 주장에 따라 폐쇄하였다. 이 때부터 숙청문은 평상시에는 늘 닫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정조 연간 유득공이 지은 <경도잡지>나 헌종 연간 홍석모가 지은 <동국세시기> 등 풍속을 모아 놓은 책들에 ‘숙청문 주변의 골짜기는 매우 맑고 그윽하여 정월 보름 전에 민간의 부녀들이 세 번 이곳에 다녀오는 풍습이 있었는데 이를 액막이―도액(度厄)이라 하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숙청문은 위와 같은 풍습이나, 또 그리로 나가도 외부로 통하는 길이 없는 지형에 있는 것 등으로 볼 때 통행을 위한 문이라기 보다는 도성에 동서남북 네 대문을 내는 데 구색을 갖추기 위해 지은 문이라고 생각된다.

숙청문이 언제부터인가 슬그머니 숙정문(肅靖門)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연산군 10년(1504)에 숙청문을 폐쇄하고 그 오른쪽 곧 동쪽에 새로 문을 만든 일이 있었다. 원래 숙청문은 어땠는지 모르나, 이 때 새로 낸 문은 문루(門樓)가 없이 성벽에 홍예로만 문이 뚫려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연산군이 하도 여러 가지로 광태를 부리던 터라 이 때 원래 숙청문을 폐쇄하고 새 문을 지은 것도 꼭 필요하다거나 수긍이 갈만한 이유가 있어 보이지는 않는다. 아무튼 이 때 본래의 문―숙청문에 대해서 새로 지은 문을 숙정문으로 바꾸어 부른 듯, 연산군 다음 중종 연간에는 북문의 이름이 줄곧 숙정문으로 나온다. 그것이 17세기 이후로 가면 숙청문과 숙정문이 뒤섞여 쓰이기는 하지만, <대전회통>과 같은 공식적인 기록에는 숙정문으로 나오는 것으로 보아 공식 명칭은 숙정문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가뭄이 심해지면 숭례문을 닫고 숙정문을 열었다. 음양오행사상에서 북은 ‘음(陰)’이요, ‘수(水)’로 인식하는 데 따라 양의 기운을 누르고 음을 기운을 북돋우어 비를 부르고자 함이었다. 그런다고 비가 올까? 현대인의 생각으로는 우습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당시로서는 간절한 기원의 표시였다. 그 숙정문은 사람이 다니지도 않고, 후기로 가면서 비를 비는 의식도 시들해지면서 다만 군문들의 담당 구역을 가르는 하나의 기준 정도로나 제 기능을 삼아 그냥저냥 유지되어 왔다. 그러다가 1976년에 도성을 복원하면서 새로 문루를 짓고 ‘肅靖門’이라는 편액을 걸었다.

지금 그 숙정문은 청와대 뒷쪽 산줄기에 있다. 하지만 필자가 직접 가서 확인하지는 못하였다. 다만 ‘북악 스카이웨이’ 팔각정 자리에서 저것이 그것이겠거니 짐작만 하고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