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이야기] 압구정(鴨鷗亭)과 석파정(石坡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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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이야기 11 – 압구정(鴨鷗亭)과 석파정(石坡亭)

대학 시간강사가 학생들과 장기적이고 지속적인 관계를 맺는 일은 애당초 불가능하다. 한 번에 두 시간씩 매주 한 차례, 15주 정도 만나고 나면 그 뿐인데다가, 한 강의실에 수십명에서 백명씩 들어와 앉아 있으니 대개는 학생들의 얼굴은 물론 이름조차 기억하기 어렵다. 그런데도 학기마다 유달리 눈에 띠고 그 탓에 나중에까지 기억되는 학생들이 있다. 두드러진 외모와 현란한 옷차림으로 어디에 앉아 있건 눈길이 가는 학생도 있고, 똘망똘망한 눈초리로 한눈 팔지 않고 쳐다보면서 중간중간 고개를 끄덕거려 강의에 추임새를 넣어주는 학생도 있다. 침이 튀건 말건 한 학기 내내 고개를 바짝 쳐들고 맨 앞자리에 앉아 선생 부담스럽게 하는 학생도 있고, 무슨 죄를 지었는지 아니면 지으려고 하는 건지 모자를 푹 눌러 쓰고 구석진 자리에 앉아 선생 눈길 피하는데 진력하는 학생도 있다 – 그렇다고 이런 학생들이 수시로 수업 빼먹는 것도 아니다. 수업 빼먹는 학생들은 대개 자리에 연연하지 않는다 -. 선생 눈에 띄려고 애쓰는 학생에게나 선생 눈길을 피하려고 고심하는 학생에게나 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닐게다. 어쨌든 눈도장을 찍어두는 것이 나중에 학점 받는데 조금이라도 유리하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알아채고 있는 날카로운 학생들이 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건 대체로 일종의 성품이요 습성에 따른 행동이다. 어디에 들어가든지 으레 구석진 자리를 찾아 앉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확 트인 유리창가나 실내 한복판 자리를 고집하는 사람도 있다. 드러내고 싶은 욕망과 숨고 싶은 욕망은 모든 사람이 아울러 지니고 있는 것이겠지만, 사람마다 그 욕망의 배합비율이 다른 모양이다. 또 강의실같은 데에서는 굳이 맨 뒤 구석자리를 찾아 앉으면서도 노는 자리에서는 남 뒤질새라 앞장 서는 사람들도 있다. 성품 뿐 아니라 때와 장소도 ‘드러냄’과 ‘숨김’의 선택에 작용하는 셈이다.

사람만 그런 것이 아니다. 사람이 짓는 건물 역시 ‘과시와 은폐’의 복잡한 변주를 즐긴다. 다만 도시 건조물의 ‘성품’은 사람의 성품보다 더 적나라하게 ‘권력의 소재’를 반영할 뿐이다. 도시를 장악한 권력이 언제나 장대(壯大)하고 미려(美麗)한 건조물로 자신을 ‘과시(誇示)’해 왔음은 앞에서 이미 말한 바 있다. 그런데 권력이 언제나 한덩어리로 뭉쳐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주로 – 그리고 근대 이후에는 언제나 – 다양한 사회 관계 속에 분산되어 있었으며, 일정한 위계 아래에서 자신을 드러내 왔다. 왕궁(王宮)이나 중심 신전(神殿)이 아닌 한, 랜드마크 구실을 하는 건물들조차 어느 정도는 ‘과시의 유보(留保)’가 필요하다. 한 편을 향해서는 과시적이면서도 다른 편을 향해서는 자신의 존재를 감추는 ‘불가피한 미덕’이 필요한 것이다. 물론 이런 건조물도 많을 수는 없다. 어쨌든 도시내 건조물의 절대 다수는 애써 찾으려도 겉모습만으로는 찾기 어려운 ‘가가호호(家家戶戶)’들에 불과하니까.

우리나라 불교 사찰들이 ‘숨는 데’ 신묘(神妙)한 능력을 가지고 있음은 ‘전통문화’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거나 하다 못해 등산(登山)만을 즐기는 사람일지라도 다들 아는 일이다. 산사(山寺)가 있다는 표지판을 보고 걸어 올라가다 보면 분명 있을 자리에 다 왔는데도 절이 보이지 않는 일이 허다하다. 절은 대개 바로 그 코앞에 다다라서야 느닷없이, 불쑥 모습을 드러낸다. 안에 들어가 보면 도대체 이 큰 절이 어떻게 숨을 수 있었을까 의심이 들 만큼 방대하고 웅장한 규모인데도 밖에서는 좀처럼 그 모습을 구경하기 어렵다. 선종(禪宗) 사찰들이 산 속에 ‘숨어 든’ 이유를 대개는 속세와 절연(絶緣)하는 데 중심 가치를 둔 옛 선승(禪僧)들의 생각에서 찾는다.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고 공간적 격리는 당연히 심리적 단절을 유도한다. 그러나 여기에는 불교가 세속권력과 융합된 탓에 일상화될 수밖에 없었던 ‘갈등과 마찰’에서 스스로 몸을 빼려는 의지도 작용했던 듯 하다. 황룡사(皇龍寺)의 승려들이 왕궁을 위압하는 절에 몸을 붙이고 있다 해서 의기양양하지만은 않았을 터이다. 적어도 우리나라에서는 종교권력이 세속권력에 대해 ‘과유불급(過猶不及)’의 미덕을 깨닫기까지 심각한 분쟁을 겪을 필요는 없었다. 그런 역사적 경험 탓인지 심지어 새로 개창된 조선왕조가 불교를 일거에 비공식 세계로 내몰 때에도 사찰과 승려들은 별다른 저항 없이 ‘퇴각’하였다. 뒤에 소상하게 언급하겠지만 개항 이후 이 땅에 자리잡은 ‘신흥(新興)’의 종교권력이 자신의 신이 지닌 ‘무한한 권능’을 자랑하듯 도시 공간 위에 거리낌 없이 과장된 모습을 드러내기까지는 서울은 확실히 세속 권력이 일방적으로 우위를 점한 도시였다.

겸재(謙齋) 정선(鄭敾)의 압구정. 한명회가 지은 이 정자는 동호(東湖)의 건너편에서 강 북쪽을 바라다 보고 서 있었다. 그는 비록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던 위세를 자랑했지만, 왕의 권위에 필적하려 들지는 않았다.

세속권력의 중심에는 당연히 왕(王)이 있었다. 왕도(王都)는 왕을 위한 공간이었고, 이 공간 위에 왕은 자신의 권위와 신성성을 드러낼 수 있는 숱한 장소(場所)들을 만들었다. 비단 왕 개인을 위한 것만이 아니라 왕의 친족을 위한 장소들도 궁극적으로는 ‘왕(王)’에게 귀일되는 것이었다. 그러니 궁궐과 종묘, 사직은 물론이요 도성 내외 도처에 들어선 별궁(別宮)이나 누각(樓閣), 정자(亭子)들도 ‘왕과 종친’의 것인 한 아무것도 거리낄 이유가 없었다. 반면에 그 자신 권력자 소리를 듣기는 했지만, 왕의 양해와 뒷받침 없이는 그 권력을 누릴 수 없었던 고관(高官)들은 예전의 중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절제의 미덕’을 깨우쳐야 했다. 세도가들이 사적(私的)인 건조물을 세울 때에는 그가 아무리 ‘나는 새도 떨어뜨릴’ 권력을 쥐고 있었다 해도, 일단은 ‘알아서 기어야’ 했다. 그러면서도 ‘만인지상(萬人之上)’의 권위는 표현해야 했으니, 공간 위에 ‘절제된 과시’를 담는 것이 그리 쉬울 수는 없었다. 세도가 중에는 국법을 어겨 가며 100칸이 넘는 집을 짓는 자도 있었고, 집 기둥에 감히 단청(丹靑)을 칠하는 자도 있었지만, 어쨌든 그걸 공공연히 자랑할 수는 없었다. 그들은 ‘과시(誇示)’와 ‘은폐(隱蔽)’ 사이에서 적당한 절충점을 찾아야 했다.

1993년에 복원된 효사정(孝思亭). 세종대 우의정을 지낸 노한(盧閈)이 지은 정자다. 1993년 동작구 흑석동 한강변 언덕 위에 복원하였다. 주로 노숙인(路宿人)들의 잠자리로 이용되고 있어 쉽게 발길이 가지 않는 곳이지만, 이 곳에서 내려다 보는 한강 풍경 – 특히 야경 – 은 가히 일품이라 할만하다.

조선시대 서울에서 과시와 은폐의 변주를 잘 보여주는 건조물이 바로 누정(樓亭)이다. 조선 초기인 15세기까지 한강변에는 수십개의 누정(樓亭)이 들어섰는데, 그 대다수는 왕이나 왕족이 지은 것들이었다. 화양정(華陽亭), 황화정(皇華亭), 제천정(濟川亭), 칠덕정(七德亭), 유하정(流霞亭), 담담정(淡淡亭), 영복정(榮福亭), 이수정(二水亭), 춘초정(春草亭), 낙천정(樂天亭), 풍월정(風月亭), 태화정(太華亭), 세심정(洗心亭), 희우정(喜雨亭) = 망원정(望遠亭) 등은 모두 왕 – 곧 국가 – 이나 대군(大君)이 지은 정자들로서 기우제(祈雨祭)를 지내거나 수군(水軍) 습진(習陣)을 지켜 보는 등 국가적 행사를 위한 장소였을 뿐 아니라 강안(江岸)과 강상(江上)의 풍광을 구경하기 위한 유상(遊賞)의 장소이기도 했다. 때로는 조선의 고관들과 중국 사신들이 어울려 노는 – 중국 사신을 접대하는 – 장소로도 이용되었다. 이들 정자는 거개가 한강 줄기를 굽어 볼 수 있는 강안(江岸) 언덕 위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런데 보는 사람의 시야가 넓으면 그만큼 노출되는 부위도 늘어나기 마련이다. 정자에 올라 놀면서 강변 행인이나 강상(江上) 어부(漁夫)의 시선을 피할 도리는 없었다. 그 위에서는 굽어보는 만큼 우러러 보였으니 정자가 자리잡은 위치나 서 있는 모양새는 비록 ‘과시적’이었지만, 그 안에서 노는 사람들은 아무래도 ‘스스로 삼가는’ 행태를 보여야 했다. 적어도 강가의 정자에서 ‘관음적(觀淫的) 시선’이 자리잡을 여지는 없었다.

대관(大官)들도 강가에 정자를 지었다. 한명회(韓明澮)가 압구정(鴨鷗亭)을 지었고, 노한(盧閈)이 효사정(孝思亭)을 지었으며 김국광(金國光)이 천일정(天一亭)을 지었다. 그런데 이 중 두개의 정자는 모두 강 건너편에 있다. 내려다 보이는 풍광(風光)에 손색이 있는 것은 아니었으되, 사람들은 이들 정자를 올려다 보기 보다는 쳐다 보았다. 당세의 세도가 한명회의 정자조차도 왕이나 대군(大君)의 정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압구정과 효사정은 그 선 모습은 오만하되 자리잡은 터는 나름대로 겸손한 정자, ‘절제된 과시’를 담은 정자가 되었다. 조선 초기에도 양반 관료들이 산 속에 지은 정자가 없지는 않았지만, 정자라기 보다는 집 옆의 별채에 가까운 것이었고 그 수도 극히 적었다.

그런데 15세기에 활발하던 정자 건축은 16-17세기에 들어 주춤하는 양상을 보였다. 사신 접대니 강상 연회니 해서 종친과 대관들이 정자 위에 올라 떠들썩하게 놀 때마다 민폐(民弊)를 끼치지 않을 도리가 없었으니, 성종은 그를 기꺼워하지 않았다. 그는 강변에 정자를 다시 짓지 못하게 했을 뿐 아니라 이왕에 있던 정자까지도 부숴버리라는 지엄한 분부를 내렸다. 그랬다고 이미 자리잡은 정자가 모두 철거된 것은 아니었지만, 이 지시로 인해 정자의 신축은 크게 줄어들었다. 그리고 그 약발이 채 떨어지기도 전에 두 차례의 대규모 전란(戰亂)이 전국을 휩쓸었고, 그 탓에 17세기까지도 유상(遊賞)을 위한 정자가 새로 만들어지는 일은 드물었다.

석파정(石坡亭). 철종대 김흥근(金興根)이 지은 것인데 후에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이 우격다짐으로 빼앗았다. 백악 뒷편에 숨어 있어 요즘처럼 모든 산 자락이 집으로 뒤덮인 시절에도 찾아내기가 쉽지 않다.

 

정자 건축이 다시 활기를 띤 것은 18세기 중엽 이후였다. 그런데 이 시기에 정자가 자리잡는 위치나 정자를 세우는 사람들의 신분은 15세기와는 크게 다른 경향을 보였다. 강가보다는 산 속에 자리잡는 정자가 늘어났고, 왕이나 종친보다는 세도가문이 짓는 정자가 많아졌다. 특히 못쓰게 된 경복궁의 서쪽과 뒤쪽, 인왕(仁王)과 백악(白岳)의 풍치 좋은 계곡 – 이른바 장동(壯洞)이라 하는 곳으로 안동 김씨의 도성내 근거지가 되었다 – 에는 도처에 세도가들의 정자가 들어섰다. 아무리 ‘인자요산 지자요수(仁者樂山 知者樂水)’라지만, 18,19세기 지배층 문화가 15세기의 그것보다 인후(仁厚)해진 탓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왜 그랬을까? 우선은 강변 풍광(風光)이 달라진 데에서 이유를 찾을 수 있을 듯 하다. 언제나 그렇듯이 자연경관을 망치는 제일 가는 요소는 사람이다. 인류는 아직껏 자연을 완벽히 보존하면서 그와 어울려 살 수 있는 방법을 발견하지 못했다. 18-19세기 인구 증가는 주로 한강변에 집중되었다. 이 때에도 강변 마을은 한성부(漢城府)의 관할 하에 있었지만, 늘어난 인구로 인해 이미 성내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지닌 위성도시가 되어 있었다. 이 일대의 지역 사회는 더 이상 문벌(門閥)이나 학식(學識)이 권위를 갖는 사회가 아니었다. 여기에서 ‘힘’은 시서화(詩書畵)에 능한 사람이 아니라 ‘돈’ 많은 사람이 지니고 있었다. 18세기 이후 서울 외곽의 강변 지역에서 먼저 자본주의적 도시문화가 형성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 탓에 강변은 더 이상 고즈넉이 앉아 유유히 흐르는 강물을 완상(玩賞)할 수 있는 장소가 아니었다. 그곳은 말 그대로 ‘시장바닥’이었다. 시장 바닥에 정자를 지어 보았자 오가는 장돌뱅이들이 쉬어 간다는 핑계로 들어앉아 술추렴이나 하는 장소로 쓰일 것은 뻔한 일. 누가 제 돈 들여 그런 자선사업을 하겠는가.

그러나 이유가 거기에만 있었던 것은 아닌 듯 하다. 나는 이 시기의 정치 문화가 공적 관계보다는 사적 관계를 중심으로 전개된 것도 정자의 입지에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본다. 국가의 공식적인 관직체계에 분배되어야 할 권력이 몇몇 세도가문의 유대체계 안으로 흘러가 버리고, 세도가들이 왕권을 허구화시킨 채 사적 관계를 통해 ‘국가의 대사(大事)’를 결정하는 행태가 일반화되면서, 그런 행태를 담을 수 있는 공간적 담보가 필요했던 것은 아닐까. 그래서 외부에 잘 드러나지 않으면서도 그 안에서 함께 어울리는 사람들 사이에는 일종의 ‘공범의식’을 형성할 수 있는 아늑하고 안전한 공간, 곧 ‘아지트(Agit)’로 사용할 수 있는 산 속 정자가 다수 만들어졌던 것 같다.

나중에 상세히 언급하겠지만, 조선시대에도 건축물의 ‘고도제한(高度制限)’이 있었다. 왕궁 담장 너머로 보이는 곳에는 왕의 것을 제외한 인공적 구조물이 들어설 수 없었다. 감히 궁궐을 굽어보는 위치에 건물을 짓는 것은 바로 ‘대역부도(大逆不道)’의 죄를 범하는 일이었다. 그러니 산 속에 정자를 지을 때에는 선승(禪僧)들이 즐겨 쓰던 방법을 따르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이 시기의 산 속 정자들은 안에서는 수려한 산세와 계곡을 흐르는 물, 그 곁에 웅장하게 솟은 암반을 볼 수 있되, 밖에서는 쉬 눈에 띄지 않는 곳에 들어섰다. 왕의 눈을 피할 수 있다면 다른 사람의 눈도 피할 수 있는 법. 이제 산 속 정자는 밀회(密會)와 밀담(密談)에 더 없이 좋은 장소가 되었다. 재상(宰相)과 장수(將帥), 각사(各司) 당상(堂上)들이 시를 읊고 고사(古事)를 논(論)한다는 핑계로 아무아무개 대감의 정자에 무시로 모여 들었다. 남산의 귀록정(歸鹿亭)이니 홍엽루(紅葉樓)니 노인정(老人亭)이니 하는 곳에서, 백악 인왕 일대의 옥호정(玉壺亭)이니 취운정(翠雲亭)이니 부암정(傅巖亭)이니 석파정(石坡亭)이니 하는 곳에서, 이들은 ‘사적’인 모임을 갖고 ‘국사(國事)’를 주물렀다. 반대 당파를 완전히 꺾어버리기 위한 모의가 진행되기도 했을 것이고, 누구 누구를 비변사 당상에 올리자는 담합이 이루어지기도 했을 것이며, 심지어는 누가 다음 번 왕이 되는 것이 좋겠는가를 두고 중지(衆智)를 모으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니 18-19세기에 다시 꽃피운 정자 문화를 양반들의 격조 높은 풍류생활과 관련해서만 이해해서는 곤란하다. 근대의 요정(料亭) 문화와 오늘날의 호텔 밀실 문화의 원류는 바로 이 시기 정자 문화에 있었던 것이다.

너무 일찍 잠잠해졌지만 얼마 전 소위 ‘안기부 X-File’이 세상을 발칵 뒤집어 놓은 일이 았었다. 그게 공개될까 전전긍긍하는 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온 국민이 그 내용을 알고 싶어 안달이었다. 그런데 언론과 정치권 일각에서는 희한한 논리로 그 공개를 막으려 애를 쓰고 있다. 그들은 ’공인(公人)이라도 사생활(私生活)은 보호해 주어야 한다‘느니, ’자료 자체가 불법적이니만큼 공개해서는 안된다‘느니, ’도청을 당한 것만으로 이미 피해를 입은 셈인데, 거기에 또 다른 고통을 주어서는 안된다‘느니 하면서 어떻게든 ’X-File’에 대한 국민적 관심을 희석시키려고 난리다. 그러나 사실 나부터도 그네들의 음식 기호나 이성(異性) 취향, 그밖에 사적(私的)인 소소한 문제들 – 그들 부모의 건강이 어떤지, 자식들이 공부는 잘하는지 등등 – 에 대해서는 별다른 관심이 없다. 내가 알고 싶은 것은 단지 그들이 ‘사적’인 욕심을 채우기 위해 ‘국가적’ 문제를 누구와 어떻게 요리하고자 했는가 하는 것 뿐이다. 평소에는 고개를 뻣뻣이 쳐들고 거들먹거리면서 대중 앞에 나서서 자신의 존재를 ‘과시’하던 자들이, 굳이 남의 눈을 피해 밀실에 모여 앉아 자금을 분배하고 여론을 조작해 놓고서는 이제와서 그를 ‘은폐’하려 안깐힘을 쓰는 꼴이 한편으로 가엾기까지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