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이야기] 신무문이 열리는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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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무문이 열리는 날

홍순민(중세사 2분과)

“명성황후조난지지”에서는 더 이상 갈 곳이 없다. 서편은 일본식 건물이요 동편은 나즈막한 동산이 철조망으로 닫혀 있고, 북으로는 경복궁의 담―궁장이 가로 막고 있다. 하는 수 없이 갔던 길을 되돌아 나오는 수밖에 없다. 어디를 구경할 때 갔던 길을 되돌아 나오는 것은 그리 재미있는 일이 아니다. 그런데도 지금 경복궁의 관람 동선은 그렇게 되어 있다. 원래는 그럴 리가 없을 텐데… 여염집에서도 대문이 있으면 뒷문이 있게 마련인데 하물며 이 큰 궁궐에 이쯤에 문이 없다면 얼마나 불편하겠는가. 당연히 경복궁에도 이 부근 어디쯤에 북문이 있어야 할 것이다. 물론 경복궁에도 북문―신무문(神武門)이 있었다. 있었던 것이 아니라 지금도 여전히 있기는 있다. 지금 신무문은 한창 철거 작업을 하고 있는 경복궁 서북 모퉁이의 군부대 영역에 포함되어 있다. 그러기에 일반인들은 드나들 수 없었던 것이고, 따라서 없다고 느끼게 된 것이다.

신무문은 경복궁 궁장 북변의 중앙에 있지 않고 서쪽으로 치우쳐 있다. 전통공예미술관으로 쓰고 있는 건물의 서편, 야트막한 군부대 담장을 넘겨다 보면 그곳에 옛 건청궁에 속했던 건물인 협길당과 집옥재가 남아 있고, 다시 그 뒤편으로 신무문이 보인다. 신무문을 보려면 그러나 경복궁 안에서보다는 북쪽 담장 밖으로 돌아나가는 것이 좋다. 청와대 앞길, 청와대 정문과 마주보는 지점에 신무문은 서있다. 석축에 홍예문이 하나 나 있고, 그 위에 정면이 3간, 측면이 2 간 되는 문루를 지었다. 남문인 광화문이나 서문인 영추문이 1960년대말에 철근 콘크리이트로 새로 지은 것인데 비해 이 신무문은 동문인 건춘문과 함께 고종 초년에 중건한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신무문은 애초에 경복궁을 처음 지은 태조 연간에는 목책을 설치한 정도였다. 그 뒤에 문을 없애고 성벽을 쌓았던 것을 1433년(세종 15)에 정식으로 문을 내었다. 신무문이란 이름은 그 때 붙인 듯 하다.

고종 초년에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신무문도 함께 제 모습을 되찾았다. 그 뿐 아니라 신무문 밖으로 크게 후원을 설치하면서 신무문은 왕이 자주 드나드는 문이 되었다. 신무문 밖 후원에는 왕이 머물 수 있는 융문당(隆文堂), 융무당(隆武堂)을 비롯하여 옥련정(玉蓮亭) 등의 건물들이 있었고, 또 경농재(慶農齋)와 그 주변 건물들 앞에는 왕이 직접 농사를 지어보는 적전(籍田)도 있었다. 또 그 윗부분 높은 지대―경무대(景武臺)는 왕이 친히 군사훈련을 점검하기도 하고, 연회를 베풀기도 하는 곳이었다.

1894년 창덕궁으로 이어하였다가 다시 경복궁으로 돌아 온 고종은 정전을 피하고 건청궁에 기거하였다. 그곳에서 1895년 왕비가 일본인들에게 무참하게 시해되는 치욕윽 겪은 뒤, 늘 신변의 위협을 느끼며 살았다. 이러한 숨막히는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 고종은 왕태자와 함께 1896년 2월 11일 새벽 변복을 하고 궁녀의 가마를 타고 신무문을 빠져나와 정동의 러시아 공사관으로 갔다. 이른바 아관파천이다. 그 이후 신무문으로는 더 이상 왕이 드나들지 않았다.

일제는 남산 자락에 있던 조선총독부를 경복궁 광화문 안에 지으면서 총독 관저를 신무문 밖 경복궁 후원에 지었다. 해방 뒤 이승만 대통령 때 그곳을 대통령 관저로 쓰면서 이름을 경무대로 바꾸었다. 그 뒤 박정희 대통령 때는 다시 이름이 청와대로 바뀌어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그러면서 언제인가, 1968년 김신조일당 침투 사건 이후인가부터 그 청와대 앞길은 일반인들이 통행할 수 없는 길이 되었다가, 문민정부 들어서서 개방한 덕에 이제는 다시 다닐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곳과 경복궁을 연결시켜 생각하는 이는 거의 없다. 백두산에서부터 벋어내려온 산줄기가 마지막으로 호흡을 고른 봉우리 백악, 그 백악에 안겨 있는 경복궁. 그 백악과 경복궁이 얼싸안고 있는 모습을 현장에서 확인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제 군부대도 철수하였으니 신무문이 활짝 열렸으면 좋겠다. 광화문으로 들어가 경복궁을 휘둘러 보고, 신무문을 나서 백악을 바라보았으면 좋겠다. 그 너머로 저 멀리 백두산까지 바라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