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이야기] 시계탑(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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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이야기 25 – 시계탑(02)

                                                                                                           전우용(근대사 2분과)

  하늘의 신(神)이 직접 주재하는 시간을 측정하는 시계와 소리로 그 시간의 어느 시점을 표시하는 종(鍾)은 모두 신성한 물건이었고, 그런만큼 그를 소유하고 지배할 수 있는 것은 신탁(神託)을 받은 권력 뿐이었다.

  깊은 산 속 고찰(古刹)에서 우는 종소리와 도시 한복판에서 우는 종소리가 사람들에게 주는 감흥이 같지는 않았겠으나 정해진 시간에 맞추어 울리는 그 소리에는 거부할 수 없는 – 거부해서는 안되는 – 신의 의지(意志)가 담겨 있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종 치는 시점’을 결정하는 권력은 ‘시간을 주재하는 천신(天神) = 하늘의 뜻’을 잘 살펴 그에 어긋나지 않는 시점을 정확히 선택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이것이 왕궁이나 신전 = 교회에서 천문을 살피고 그 변화를 측정하는 데 그토록 심혈을 기울였던 까닭일 터이다.


(사진 1) 1920년대의 종로 YMCA 앞. 사진 한복판에 경성전기회사(원 한성전기회사) 사옥의 시계탑이 보인다. 준공 당시의 전기회사 시계탑은 도성민의 시선을 집중시킨 랜드마크켰으며 전차 운행과 결부되면서 도시인들에게 근대적 시간과 공간의 상관성을 가르친 교재였다.

  시간에 맞추어 종을 치는 행위가 애초부터 ‘종교적 행위’였던 만큼 그 소리가 구속하는 인간 삶의 영역도 대개는 종교적인 데 국한되었다. 물론 옛 사람들에게 삶의 종교적 –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거개가 ‘미신적(迷信的)’이겠지만 – 영역이 현대인들의 그것처럼 날짜별로나 행위별로 명료히 구분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종 소리는 일상의 노동에는 별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농업 노동을 중심으로 일상을 조직하는 데에는 굳이 시계가 필요 없었던 것이다. 시계 뿐 아니라 그것이 표상하는 시간 자체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농업 노동의 주기는 ‘시, 분, 초’는 커녕 ‘날짜’와도 별 관계가 없었다.

  농민들에게 의미 있는 시간 단위는 절기(節期) 정도였다. 조선 시대 왕실에서는 년, 월, 일을 정확히 표시하면서 기록을 남겼지만, 농촌 사람들은 “갑자년 상강후 칠일”이니 “을축년 백로전 삼일”이니 – 오늘날에도 서예가(書藝家)들은 간혹 제문(題文)에 이런 표현을 쓴다 – 하는 정도만 알면 그만이었다.

  굳이 더 정확한 날짜를 알고 싶다면 달을 쳐다보면 되었다. 마르크 블로흐가 말한 대로 중세의 농민들은 시간에 무관심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에게는 굳이 시간이 아니더라도 복종해야 할 대상이 너무 많았다.

  노동과 별 관계가 없는 종교적 시간, 신성한 시간 – 그러나 본질적으로 인위적인 시간 – 의 힘은 왕궁과 신전 안에서 가장 강했고, 그를 둘러싸고 있는 제한된 공간(= 도시 안)도 그로부터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다.

  도시에서 펼쳐지는 일상은 농촌과는 달리 계절이나 날씨의 변화에 크게 좌우되지 않았다. 종교적 – 혹은 학문적 – 활동이든 수공업적 생산활동이든, 혹은 군사훈련이나 경계 순찰과 같은 활동이든, 도시민들의 일상은 단순하고 반복적이어서 리듬감을 갖지 못하는 지루한 것이었다.

  천체의 리듬이 즉각적으로 반영되지 못하는 일상에 리듬감을 주기 위해서는 인위적인 기준점이 필요했다. 또 도시의 노동은 상대적으로 발달된 분업과 협업체계를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집합과 해산, 출근과 퇴근, 통행금지와 허용 등의 행위를 집단적으로 규제할 수 있는 신호도 필요했다.

  요컨대 시계와 종은 중세에도 도시를 움직이는 핵심 기계장치였다. 다만 중세까지는 시계가 허술한 만큼 그것이 짜놓은 그물도 헐거웠을 뿐이다.


(사진 2) 1900년경 한강에서 인천까지 왕래하던 증기범선. 대한제국기에는 대한협동우선회사 소속선 등 연안해운선뿐 아니라 강운과 해운을 겸하는 배들도 정기적으로 운행했다. 이들 정기선의 시간표는 당시 신문에 꼬박꼬박 실렸으나 정작 그 이용객들이 시간을 정확히 맞출 방법이 있었는지는 의문이다.

  13세기 말 서유럽에서 기계식 시계가 발명된 이후 시계는 점차 그 정확도를 높여갔고, 그에 비례하여 사람들의 일상에 대한 지배력을 키워 나갔다. 루이스 멈포드는 증기엔진이 아니라 시계가 바로 현대 산업사회의 핵심기계라고 했던 바, 유럽 도시에서는 산업혁명에 앞서 시간혁명이 일어났다.

  기계식 시계에 의존하여 철저히 시간을 지키는 우편마차는 증기 기관차보다 먼저 등장했다. 누적 또는 연속적 변화를 통해 시간을 표시한 물시계나 해시계와는 달리, 기계식 시계는 균일한 반복 – 진자의 반복운동 – 을 통해 시간을 분할하여 표시했다.

  당시의 기계식 시계가 갖추고 있던 세 가지 구성요소, 바늘, 추, 종은 오늘날까지도 벽시계의 기본 구성요소로 남아 있다. 기계식 시계에 의해 시간은 균등한 각 부분으로 분할할 수 있는 것, 그럼으로써 헤아리고 계산할 수 있는 어떤 것으로 변화했다.

  이제 시간은 절약할 수도, 낭비할 수도, 더하고 뺄 수도 있는 사물(事物)이 되었다. 더불어 그 단위도 시간에서 분, 초로 세분화되었다 – 하루를 24시간으로 분할하고 각 시간을 60분으로, 분을 60초로 나누는 것은 고대 이집트와 바빌로니아, 헬레니즘과 로마 문화가 어우러져 만들어낸 관습이다 -.

  시간(時間)이 사물로 변화됨으로써, 신(神)과 시간 사이의 관계도 소원해졌다. 기계식 시계가 표시하는 시간은 기계적 운동의 결과일 뿐, 신의 의지나 계시와는 무관한 것이었다. 물화(物化)된 시간과 시간적 공간적 제약을 받지 않는 동력 – 증기기관 – 은 서로 어울려 도시를 물신(物神)의 공간으로 바꾸어 나가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에 자명종(自鳴鐘)이라는 이름의 기계식 시계가 처음 들어온 것은 1631년의 일이었다. 이 해 정두원이 명(明)나라에서 자명종을 얻어 돌아왔는데, 유럽에서는 이미 15세기부터 시계에 스프링을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때 들여온 자명종 역시 스프링 시계였을 것이다. 스프링 시계는 탈진기를 장치한 추시계보다 작고 정밀했으며 내구력도 강했다.


(사진 3) 18세기 프랑스혁명 직전의 가구용 시계(L.A. 게티박물관 소장). 우리나라에 들어온 자명종도 아마 이런 모양이었을 것이다. 이 시기 유럽의 가구용 시계는 귀족의 신분적 상징이었기 때문에 일종의 ‘보물’이었다.

  하루를 정밀하게 24등분하면서 한 시간 단위로 종 소리를 냈을 이 기계에 대해 조선의 왕공대신들이 어떤 반응을 보였을지는 짐작만 할 수 있을 뿐이지만, 그 후로도 자명종은 여러 차례 들어왔을 것이고, 이윽고 왕실과 그 주변 인물들에게는 낯설지 않은 물건이 되었을 것이다. 어쩌면 이 기계의 작동원리를 이해할 목적으로 뜯어 살펴 본 사람들이 있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서양의 신기한 기계가 간직한 비밀은 오래도록 풀리지 않았다. 또 당시 사람들은 계절에 관계없이 하루를 24시간으로 등분하는 서양식 시간관념을 굳이 받아들일 이유가 없었다. 그 때문에 기계식 시계는 그 안에 내장된 종(鍾) 이외에 다른 큰 종 – 종각의 종 – 에는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했다.

  서양식 시간 구분법이 현실적 힘을 갖기 시작한 것은 개항 이후였다. 1887년 통리아문 장정은 직원의 출근시간을 사시(巳時) 초(오전 9시)로, 퇴근 시간을 신시(申時) 초(오후 3시)로 규정하고 그를 함부로 어길 수 없게 하는 한편, 휴목일(休沐日) – 이 단어만 가지고도 이 시대 사람들이 목욕을 거의 하지 않았다는 통념에 문제가 있음을 충분히 유추할 수 있다. 집집마다 욕조를 들여놓기 전에는 일요일은 일단 목욕부터 하고 쉬는 날이었다 – 을 당시의 외국 통례에 따라 7일 1회로 정했다.

  그 전까지 서울의 관라들에게 어느 만큼의 주기로 휴일이 주어졌던가는 과문한 탓에 알지 못하지만 – 당제(唐制)는 5일 1휴였다고 하는데, 이 무렵 각종 관청의 일기류를 들여다 보면 사람마다 근태(勤怠)가 달라 하루도 쉬지 않고 출근하는 사람이 있었는가 하면 결근을 밥먹듯 하는 사람도 많았다 -, 이 때부터 외국과의 교섭을 담당했던 통리아문에서는 서양식 주일제를 공식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보통은 7일 1휴제가 유대교와 기독교의 산물인 것으로 알고들 있으나, 사실은 바빌로니아 태음력의 소산이다. 바빌로니아 사람들은 달의 변화하는 모습을 기준으로 구획한 7일 주기를 중요시했고, 각 주기의 마지막 날은 ‘악의 날’로 정하여 특별한 터부를 부과했었다. 유대인이 바빌로니아 유랑을 겪으면서 이 주기를 받아들였고, 그것이 7일에 한 번의 안식일로 바뀐 것이다.

  또 매 주기마다 해와 달, 화성, 수성, 목성, 금성, 토성의 이름을 붙인 것은 각각의 날을 이 별들이 지배한다는 로마인의 믿음에 따른 것이었다. 이 주기가 애초에 달의 모양을 기준으로 만들어진 것인 만큼, 태음태양력이라 해야 할 시헌력(時憲曆)에 익숙해 있던 조선 사람들에게도 그다지 어색하지는 않았을 듯 하다.

  물론 통리아문에서 7일 1휴제와 9 to 3의 출퇴근 시간제를 택했다고 해서 그것이 전체 관직사회로까지 파급되지는 않았겠지만, 중국 연호와 다른 연대 표기법, 시헌력과 무관한 달 수 구분법, 요일제와 7일 1휴제, 하루 24시간 구분법 등 시간에 대한 새로운 관념은 이를 계기로 서서히 확산되어 갔다.

  1894-95년 ‘갑오을미개혁’ 와중에서 결행된 연호 제정과 태양력 – 그레고리우스력 – 채용은 천하의 주인이 곧 시간의 지배자라는 오래된 관념을 한 축으로 하고, 이미 일본이 채용하고 있던 서양식 역법을 다른 한 축으로 한 ‘시간개혁’이었다.

  그러나 이 개혁 이전에 이미 양력과 요일제, 24시제는 서울의 도시생활 한 귀퉁이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지금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지만 조선의 관료제는 전문관료제가 아니어서 상당한 품계(品階)를 가진 관료들은 이 부서 저 부서로 다니며 순환근무하는 것이 상례였다.

  통리아문과 그 속사(屬司)에 근무한 경험을 가진 사람들은 갑오 을미년의 ‘시간개혁’이 있기 훨씬 전부터 서력(西曆)과 요일제, 24시제를 알고 있었고, 일부는 그에 익숙해져 있었다.

  왕도(王都) 서울에서 관료군은 그 수적(數的) 비중에 관계없이 도시 문화를 주도하는 지위에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알고 적응해 간 ‘시간’은 그들의 하인과 겸종(傔從), 가족 및 친지들과도 어렵지 않게 친해질 수 있었을 것이다.

  물론 변화된 시간을 안다고 해서, 또 그에 적응할 수 있다고 해서 바로 그 지배를 받게 되는 것은 아니다. 최근까지도 태양력은 도시에서만 압도적 우위를 점했을 뿐이고, 요일제나 24시간제 역시 도시민들에게만 유의미한 것이었다.


(사진 4) 대한의원 시계탑(1908). 마등산 언덕배기, 옛 경모궁지에 들어선 대한의원 시계탑은 병원 내부에서 이루어지는 의료행위의 기준 시간을 알렸을 뿐 아니라, 서울 주민들에게 시계의 존재를 알리는 구실을 하였다. 당시의 도시 건축 환경에 비추어 볼 때 이 시계는 분명 남산 자락에서도 보였을 것이다.

  일제 강점 초기까지도 요일제나 24시제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는 도시민이 많았다. 일본인들은 일요일에 쉬지 않는 종로 상점, 시간에 관계 없이 문을 닫는 조선인 상점을 대놓고 조롱하곤 했다. 십이지신(十二支神)과 무관한 날짜들, 천문시계나 생체시계와 늘상 어긋나는 기계 시계는 아직 도시민 전체의 일상을 완벽히 지배하지 못했다.

  근대 서구의 시간관이 기계식 시계를 매개로 사람들의 의식 속에 깊이 파고들기 위해서는 어디에서나 눈만 돌리면 시계를 볼 수 있는 환경 – 굳이 사람마다 시계를 갖고 있지 않더라도 – 이 필요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