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이야기] 수도(首都), 그 다음 도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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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이야기 2 – 수도(首都), 그 다음 도시는?

얼마 전 서울특별시장이 서울을 ‘서울특별시장’ 명의로 하나님께 봉헌해 버렸다. ‘서울’이라는 말이 본래 신시(神市)를 의미한다고 했으니 본래 신의 것을 신에게 되돌린다고 해서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이 도시가 애초 ‘시장의 하나님’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만 기꺼이 외면한다면. 최근 갈피를 잡을 수 없을 정도로 정신 없이 벌어지고 있는 ‘서울 도시개조사업’조차도 그의 ‘순수한’ 종교적 열정에 말미암은 것이라고 너그럽게 이해해 주어도 좋으리라. 그런데 종교적 권위와 세속 권력은 흔히 융합되어 종국에 가서는 어느 것이 먼저이고 어느 것이 나중인지를 분간할 수 없게 된다. 아마 서울특별시장 자신도 자기 마음 속에 품은 것이 신심인지 욕심인지 구분하기 어려울 것이다.

근대 이전의 도시는 대개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옛 사람들이 왜 성벽을 쌓는 것으로 도시 건설을 시작했는지를 따지는 것은 무의미할런지도 모르겠다. 설혹 그들 자신이 명료한 목적의식을 가졌다 하더라도 그 뒤에 그들 자신도 인식하지 못하는 다른 의도가 숨어 있었을 수도 있다. 몇해 전 ‘탑골공원 성역화 사업’이라는 거창한 이름의 사업 – 내용은 이름만큼 거창하지 않았지만 – 에 자문할 기회가 있었다. 그 자리에서 어떤 분이 공원의 담장을 아예 허물어 버리고 시민에게 좀 더 가깝게 다가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 몇 사람이 거기에 동의했다. 사실 탑골공원에 담장이 있었다면 거기서 3.1운동이 일어나지도 않았을 터이다. 3.1운동 이후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가장 먼저 한 일 중 하나가 탑골공원에 잔뜩 나무 심어 놓고 담장을 두르는 일이었다.

돈의문 밖. 1886년. 성밖에 움막같은 집들이 늘어서 있다. 이 움막에서 사는 사람들은 몇걸음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성 안쪽을 별세계로 느끼지 않았을까.

그러니 담장을 없애는 것이 3.1운동을 기념하기 위한 탑골공원 성역화의 본의에도 맞는 것이라 생각했다. 하다 못해 3.1운동 재현행사를 하더라도 그 쪽이 더 편할 것이고. 하지만 당시 광복회장의 무서운 직관은 그런 낭만적인 생각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 분은 단 한마디만 했다. “성소에는 담장이 있어야 합니다.” 물론 담장을 만든다고 시정 잡배 – 애초 성소(聖所)로 만들어진 도시에 잡배(雜輩)가 우글거리고 세속으로 취급되었던 농촌이 오히려 성스러운 곳으로 뒤바뀌는 극적인 반전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얘기하기로 한다 – 를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 경우의 담장은 다만 성(聖)과 속(俗)의 경계선일 뿐이다. 그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편안한 위요감을 추가로 제공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이 본질일 수는 없다.

공원의 담장이나 도시의 성벽이나 그 본질적 기능은 같다. 구분선으로서의 기능이 본질적이며 방어벽의 기능은 오히려 부차적이다. 서울의 성벽만 하더라도 외침시는 물론이요 내란 때 조차 단 한차례도 방어벽 구실을 한 적이 없다. 과거 보러 온 시골 유생이나 채소 팔러 온 인근 농민들만 공연시리 주눅들게 했을 뿐이다.

 

근대 교통은 성벽을 무용지물로 만들었다. 전차가 다니는 남대문 밖을 ‘개와 소’가 거닐고 있다.

성벽은 성안과 성밖을 구분짓는 공간적 경계선이었 뿐 아니라, 그 안의 사람들과 밖의 사람들에 대한 차별을 정당화해 주는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경계선이기도 했다. 석탄도시 = 산업도시가 출현하기 전까지 ‘도시는 농촌이라는 거대한 바다 위에 떠 있는 작은 섬’일 뿐이었다. 도시는 자신의 생존과 확장을 위해 농촌을 수탈해야 했다. 도시가 농촌에 공급할 수 있는 것은 사실상 아무 것도 없었다. 도시는 생산기능을 갖추지 않았을 뿐 아니라, 설령 갖춘 곳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 생산물들은 대부분 도시 내부에서 소비되어 버렸다. 도시는 농촌으로부터 생산물과 사람 = 인재(人材)들을 지속적으로 공급받지 않고서는 살아 남을 수 없었다. 도시와 농촌의 관계는 언제나 일방적이었고, 도시는 농촌에 대한 수탈을 발판으로 해서만 문명을 생산하고 그를 성벽 ‘안쪽’에 집적할 수 있었다. 도시가 인류문명의 눈부신 성취들을 집적해 나가는 동안에도 농촌의 물질세계나 사회적 관계는 거의 진보하지 못했다. 청동기 시대에 발명된 ‘반월형 석도’는 오늘날까지도 ‘낫’에 머물고 있을 뿐이다. 도시는 복잡한 분업적 관계망을 조직하고 발전시켜 나갔지만, 농촌의 분업관계는 오늘날에도 수백년 전 상태에 머물러 있다.

도시는 발달된 관료제의 촉수를 뻗어 농촌을 수탈했을 뿐이니 도시와 농촌은 애초 경쟁상대가 아니었다. 도시의 경쟁 상대는 오직 다른 도시였을 뿐이다. 농촌이 도시를 공격하고 약탈하는 경우가 없지는 않았으나 – 그러나 대규모 농민반란이 승리한 예는 거의 없었다 – 도시의 적은 대개 다른 도시였다. 도시는 다른 도시를 파괴하거나 흡수했으며, 때로는 그를 남겨 둔 채로 일정한 위계하에 재배치했다. 그래서 여러 ‘울’ – 또는 ‘벌’ – 사이에 우뚝 솟은 ‘울’, 서울은 중앙권력과 함께 출현했다.

그런데 ‘여러 도시 중 으뜸가는 도시’라는 말을 쓸 수 있을 만큼 우리가 과연 여러 도시를 동시에 키워낸 적이 있었는지는 의문이다.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를 차례로 멸한 뒤 사비성과 평양성은 폐허가 되어 버렸다. 신라는 그 대신에 5소경을 따로 만들었지만, 그것이 과거 사비성이나 평양성만한 규모였을 가능성은 없다. 과장된 것이 분명하기는 하지만 경주에 10만 금입택이 있었다는 기록 자체가 그 판도 안에 다른 도시가 성장할 가능성이 없었음을 보여준다. 그 경주는 또 어떻게 되었는가, 고려시대에 한 때 동경(東京)이라는 그럴싸한 이름을 얻었지만, 조선시대에는 이미 ‘고도(古都)의 흔적’ 말고는 남은 것이 없는 상태가 되어 있었다. 다만 고려시대 이래 지금까지 평양만이 ‘제2의 도시’로 남아 있는 정도이다. 그나마 평양이 규모 있는 도시로 남을 수 있었던 데에는 조선왕조의 변방 정책이 크게 작용했다. 조선왕조는 서북과 관북 일대에 생산물과 인재(人材)를 모두 빨아들이는 흡착판을 갖다 대지 않았다. 조선왕조는 오히려 서북 일대의 인재가 서울로 들어올 수 있는 길을 막아 버렸다.

물론 세계의 고도(古都)는 거의 모두가 거대한 무덤들과 폐허더미로만 자신이 ‘존재했었음’을 입증하고 있다. 도시에 집적된 문명이 어느 한 순간에 파괴되어 버리거나 심지어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조차 완전히 사라지는 경우도 있다. 아즈텍이나 잉카 문명처럼. 문명은 영속적으로 발전해 온 듯 보이지만, 그것을 담는 용기(容器)인 도시는 결코 영원할 수 없었다. 문명의 결정적 진보와 발전은 자주, 오래된 도시가 소멸하고 – 혹은 그 힘을 잃고 – 새로운 도시가 성장하는 과정과 중첩되었다. 왕조교체를 문명의 발전과 등치시킬 수는 없지만, “옛날부터 역성수명(易姓受命)의 인군(人君)은 반드시 도읍을 옮겼다”는 이성계의 말도 그같은 경험을 토대로 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중세 이후로는 도시 자체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경우는 드물었다. 고대 도시들은 땅 속에 묻혔지만, 중세 도시들은 ‘왕의 도시’= 수도(首都)에 대항해서 나름대로 살아갈 길을 찾아 나갔다. 정교 분리를 통해, 정치적 분권화를 통해, 때로는 농촌과 교역할 수단을 찾아냄으로써, 중세의 도시들은 자생력을 키워 나갔고 수도(首都)와 병존(竝存)하면서 조금씩 세력을 키워 갔다.

그러나 조선시대 이 땅에서는 서울 외에 성장의 ‘증거’를 확보한 도시를 찾아 볼 수 없다. 조선 후기에 들어와 몇몇 포구나 장시를 중심으로 ‘소도시’로 성장할 가능성을 보여준 곳이 없지는 않았지만, 옛 도시는 – 평양이든 개성이든 – 대체로 정체되어 있었다. 유독 서울만이 천도 후의 급팽창에 이어 17세기 이후에 새로운 도시적 활기를 보여 주었을 뿐이다. 조선 시대 내내 서울은 사실상 유일한 도시였고, 다른 도시의 발전 가능성을 봉쇄한 채 모든 경제적 사회적 자원을 독점하면서 커 나갔다. 특히 조선 후기 서울의 빠른 변화는 ‘경향(京鄕) 분리’현상 – 달리 말하자면 지방의 배제와 소외가 되겠지만 – 과 더불어 진행되었다. 조선 사회의 생산력 수준이 서울 외에 다른 도시의 성장을 뒷받침할 정도가 되지 못할 정도로 낮았기 때문에 이같은 상황이 빚어진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보다는 지방세력의 발호를 견제하기 위한 조선 사회의 지속적 노력과 그로 말미암은 조숙한 중앙집권성에 기인한 바 컸을 것이다. 더불어 국가의 공인을 받지 못한 민중세계의 종교가 도시를 벗어나 농촌과 산간으로 밀려난 점도 지방 도시의 성장을 방해했던 것 같다. 지방 도시는 사실상 자체의 배후지를 갖지 못한 채, 서울의 촉수로서만 기능했다. 그리하여 서울은 조선 후기 생산력 발전의 성과를 거의 독점적으로 향유했다. 19세기 서울의 경화사족(京華士族)과 왈짜패들이 흥청망청 근대적 소비문화의 싹을 틔우고 있던 바로 그 시점에, 민란(民亂)의 시대도 함께 열렸다.

재작년에 대한민국 제2의 도시인 부산에서 열린 학술행사에 참여한 적이 있었다. 그 자리에서 한 분이 이런 말을 했다. “이처럼 모든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자원이 서울에만 집중되고 있는데도 지방에서 민란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신기할 정도입니다.” 부산에서조차 이럴 정도이니 다른 지방 도시에서야 오죽하겠는가? 일제 강점과 해방, 한국전쟁 등 역사적 격변을 거치면서도 서울은 자신의 지위를 잃지 않았다. 오히려 지방의 인적, 물적 자원을 빨아들이는 속도와 범위는 더욱 커졌고 결국은 거대한 블랙홀이 되어 버렸다. 서울은 한 번 빨아들인 것은 사람이든 물질이든 되뱉지 않았다. 급기야는 스스로 자신의 중력을 감당할 수 없을 정도가 되어 ‘빅뱅’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어 있다.

요즈음 행정수도 이전 문제로 나라가 한참 시끄럽다. 신문들은 다투어 ‘천도’라는 표현을 쓰면서 서울과 수도권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들고 있다. 물론 그 불안감은 단지 재산가치가 감소되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에 불과한 것이지만, 그것을 전부로 알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태반인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다시 한 번 반복하거니와, 중앙 행정부처가 몽땅 옮겨간다고 해도 서울은 서울로 남을 것이다. 오늘날 국가 권력은 더 이상 신(神)이 아니다. 그러니 ‘물신(物神)의 도시’서울의 지위가 흔들리는 일은 없을 것이다. 오히려 서울은 자신의 무게를 덜어냄으로써만, 그동안 자신이 일방적으로 독점해 온 것을 지방과 나눔으로써만, 자신의 잔명(殘命) – 얼마나 많이 남아 있는지는 모르지만 – 을 보존할 기회를 더 많이 얻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