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이야기] 서울의 오른편 젖가슴 백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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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오른편 젖가슴 백악

홍순민(중세사 2분과)

도성은 창의문에서 백악(白岳)을 휘감아 돌아 동쪽으로 달려 간다. 백악은 지금의 청와대 뒷산으로 청와대 경호 관계로 일반인은 올라가 볼 엄두조차 내기 어렵게 되었다. 하긴 이 산은 조선시대부터 아무나 함부로 오를 수 있는 범상한 산은 아니었다. 조선초기에는 이 산에 신당이 설치되어 있었다. 처음에는 이곳에서 우리나라 4대 신성한 산―사악(四嶽)의 하나인 삼각산(三角山)에 제사를 드리면서 그에 곁들여 이 백악에도 제사를 지냈다. 그 후에는 백악은 그 격이 떨어져 작은 제사―소사(小祀)를 받는 산으로 되었고, 조선 전기에는 심한 가뭄이 들었을 때 목멱산(木覓山)―남산, 한강과 더불어 기우제를 드리는 곳으로 많이 사용되었다. 그러다가 조선 후기에 들어서 이곳에서 드리던 기우제를 삼각산에서 드리는 것으로 변동이 되어 이곳은 제사를 지내는 장소로서의 신성성은 엷어졌다.

백악은 초기에는 제사를 지내는 신성한 장소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만이 아니었다. 조선의 제1궁궐, 곧 법궁(法宮)인 경복궁을 바로 품고 있는 서울의 주산(主山)이라는 더욱 무거운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백두산에서 지리산까지 달려가던 백두대간(白頭大幹)이 금강산 못미쳐 분수령(分水嶺)에서 그 줄기를 갈라 내보내니 이것이 한북정맥(漢北正脈)이다. 이 한북정맥은 북한산까지 달려와 호흡을 가다듬은 다음 한바퀴 돌면서 여러 봉우리를 만들어 내는데 그 가장 남쪽에 자리잡은 봉우리가 보현봉(普賢峰)이다. 보현봉에서 다시 한 단계 낮아진 산줄기가 지금의 평창동에서 정릉으로 넘어가는 북악터널 위를 달려 내려와 젊은 여인의 젖가슴처럼 봉긋하게 한 봉우리를 이룬 것이 백악이다. 이 봉긋함 때문인지 옛 사람들은 백악을 나무와 같이 위로 솟는 기운, 목덕(木德)을 가진 산으로 보았다.

육조거리―광화문 네거리에서 바라보면 백악은 뒤로 북한산을 배경으로 하고, 서쪽에 인왕산을 오른팔로 거느리고 아기를 안듯이 경복궁을 품고 있었다. 그 모습은 조선시대의 겸재 정선을 비롯하여 일제초기의 심전 안중식에 이르기까지 여러 화가들의 좋은 화제가 되어 주었다. 백악에 들어가 만나는 청풍계(淸風溪) 라든가 삼청동(三淸洞)등 골짜기들은 장안 제일의 경승지로서 가장 사랑받던 곳이었다. 그 백악은 물론 지금도 어디 가지 않고 북한산, 인왕산과 함께 그 자리에 그대로 있기는 있다. 그러나 백악은 그 이름조차도 다분히 편의적이고 멋없는 이름 ‘북악산(北岳山)’으로 더 알려져 있듯이, 때로는 그것도 못되어 ‘청와대 뒷산’으로 불리우고 말듯이, 더 이상 옛 모습 그대로 우리에게 다가오지 못하고 있다.

온통 고층 빌딩들로 숲을 이룬 서울에서 백악을 마음 편하게 바라볼 수 있는 곳이 어딘가 잘 모르겠다. 가장 잘 보이지 싶은 광화문 네거리까지 우정 가서 이리저리 자리를 골라가며 목을 쭉 빼 보아도 편안하고 넉넉하게 백악을 만나기는 힘들다. 조선총독부 청사―지금의 국립중앙박물관이 한사코 가로 막고 나서기 때문이다. 그 조선총독부 청사를 헌다고 하니, 헐고 나면 백악은 다시 옛날처럼 제 모습을 드러내 줄까. 그렇게 넉넉하고 푸근하게 우리를 불러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