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이야기] 비켜가는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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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순민의 서울기행’은 한국역사연구회 중세2분과 홍순민 회원이
<서울시청뉴스> 제59호부터 제113호까지에 연재하였던 ‘서울 600년’을
전재하는 것입니다. 전재를 허락해주신 홍순민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

비켜가는 문

홍순면(중세사 2분과)

 
우리는 서울-본래의 서울에 들어올 때 문을 통과하지 않는다. 숭례문(崇禮門, 남대문), 흥인지문(興仁之門, 동대문)은 그저 국보 1호, 보물 1호로 길 가운데 앉아 매연을 마시고 있을 뿐 그 누구도 그리로 지나가지는 못한다. 다만 옆으로 비켜갈 뿐이다. 문을 두고 그 옆으로 비켜 가면서도 이것이 어색하다는 생각을 하지도 않는다. 참 기이한 일이다.

서울을 가리키는 이름들 가운데 경성(京城), 도성(都城), 한성(漢城), 황성 (皇城) 등이 있다. 이런 이름들에 ‘성(城)’ 자가 붙은 까닭은 서울이 성으로 둘러싸여 있기 때문이다. 도성이란 말은 서울을 가리키는 뜻으로 쓰이기도 하지만 좀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서울을 둘러싸고 있는 성곽을 가리키는 말이다. 본디 서울은 북쪽에 백악(白岳), 남쪽에 목멱산(木覓山), 동쪽에 타락산(타酪山), 서쪽에 인왕산(仁王山) 이렇게 네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분지이다. 외적을 막고, 또 안과 밖을 구별하기 위해서 서울을 둘러싸고 있는 네 산의 능선 바로 조금 바깥쪽을 따라 빙둘러 성곽을 쌓은 것이 도성이다. 이 공사는 개경에서 한양으로 천도한 지 이태 뒤인 1396년(태조 5)에 이루어졌다. 그 뒤 1422년(세종 4) 에 토성(土城)을 석성(石城)으로 고쳐 쌓았고, 1704년(숙종 30)부터 약 5년여에 걸쳐 서울 주변의 채석장에서 돌을 떠다가 성을 고쳐 쌓는 공사를 진행하여 성의 모습이 크게 바뀌었다. 그 뒤로도 여러차례 크고 작은 보수 공사를 해오면서 도성을 가꾸어 왔다.

이렇게 만들어진 도성은 1898년 전차가 놓이면서 흥인문(興仁門, 동대문)과 돈의문(敦義門, 서대문) 주위의 성곽이 일부 헐렸다. 도성 수난사의 시작이다. 그러나 전차를 놓기 위해서 도성을 조금 헌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요, 발전을 위한 희생이지 딱히 수난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1907년 순종이 일제의 압박에 의해서 강제로 왕이 된 지 열하루 만인 7월 30일에 설치된 이른바 ‘성벽처리위원회’ 라는 것은 전혀 이야기가 다르다. ‘내부, 탁지부, 군부 세 대신의지휘 감독을 받아 성벽의 훼철과 기타 이에 관련한 일체 사업을 처리’하기 위한 이 위원회가 설치되면서 도성은 본격적으로 허물어져 나가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그 해 10월 16일 일본 황태자 嘉仁親王이 서울에 오는데 그는 남대문을 통과하지 않았다. 비켜갔다. 그로부터 도성은 서울을 지키지 못하였고 도성문들은 사람들이 통과하는 시설이 아니라 길 한가운데 떨어져 앉아 있는 천덕꾸러기가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