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이야기] 불먹은 주춧돌, 비운의 동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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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먹은 주춧돌, 비운의 동궁

홍순민(중세사 2분과)

어느 문으로 들어오든 경복궁을 관람하려면 엉뚱한 곳으로 옮겨져 있는 금천교―영제교(永濟橋)를 건너 근정전의 회랑을 뚫고 낸 문으로 해서 근정전으로 들어가게 되어 있다. 그 영제교를 건너다 보면 양쪽편으로 복원공사가 한창이다. 그중 북쪽 편에 짓고 있는 건물의 이름이 자선당(資善堂)과 비현각(丕顯閣) 이다. 자선당은 세자의 공식 활동공간이며, 비현각은 그 부속건물이다. 또 그 주위에는 세자를 교육하고 보필하는 업무를 맡았던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춘방(春坊)과 세자를 경호하는 임무를 띠고 있는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계방(桂坊)이라고 하는 관서 등이 있었다. 그 일대는 광화문에서 교태전으로 이어지는 경복궁의 중심축, 왕이 계시는 내전의 동쪽에 해당된다. 그리하여 그곳을 동궁(東宮)이라 한다. 세자를 가리켜 동궁이라고도 부르는 연유이다.

애초 선초에는 동궁은 경복궁 궁궐 밖에 있었던 것을 세조 연간에 경복궁 안으로 끌어들였다. 그 후 많은 왕들이 이곳을 거쳐갔다. 이곳에서 조선의 왕들은 왕자(王者) 수업을 받고 왕이 되었다. 그러던 동궁은 임진왜란으로 경복궁이 불타 없어질 때 함께 없어지고 말았다. 270여년간 세자들은 동궐 -창덕궁 및 창경궁이나 서궐-경희궁의 동궁에서 생활하였다. 경복궁의 동궁- 자선당은 고종 초년 경복궁을 중건할 때 당연히 함께 복원되었다.

그렇게 복원된 자선당에서 세자 노릇을 했던 유일한 사람이 순종이다. 순종 뒤에 영친왕이 황태자가 되었다고는 하나 그는 경운궁에서 황태자가 되었고 곧 일본으로 유학이라는 명목으로 잡혀 가 그곳에서 굴곡많은 인생을 보내다 1963 년이 되어서 거의 산송장이 되어 돌아왔으니 황태자 역할을 거의 하지 못하였거니와 경복궁의 동궁과는 별 인연이 없다. 하기는 경복궁 중건 뒤에 그 동궁을 사용하였던 유일한 세자 순종도 어엿한 왕인가에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그는 부왕 고종을 따라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겨가 있던 시절, 독을 탄 차를 마시고 거의 반편이 되었다. 1907년 일본의 강압에 의해 고종의 뒤를 이어 황제위에 오르기는 하였으나, 고종은 그에게 대리청정(代理聽政)을 시켰지 황제위를 물려준 것이 아니었는데, 일본 통감과 이완용 등 친일반역자들이 대리청정을 선위 (禪位)로 둔갑시킨 것이다. 아무튼 그렇게 황제가 된 순종은 나라를 빼앗기는 치욕적인 역할을 하고 황제에서 “창덕궁 이왕(李王)”으로 격하되어 창덕궁에서 살다가 죽었다.

그 주인이 이렇듯 수모를 당하는 판에 그 건물들이라고 성할 리 없었다. 일제가 1915년 이른바 “시정오년조선물산공진회”를 경복궁에서 열면서 다른 대부분의 건물들과 마찬가지로 동궁 일곽의 건물들 역시 모두 헐어 없앴다. 그 건물들은 기실은 그냥 없어진 것이 아니라, 일본인들에게 팔려 나갔다. 그중 자선당은 오쿠라라는 사람이 가져다가 동경의 자기 집 정원에 세우고 ‘조선관’이라는 이름을 붙여 사설 박물관으로 삼았다. 그러던 것이 그만 1923년 관동대지진 때 건물은 불타 없어졌다. 기단과 주춧돌만 남은 그 터 주위에 나중에 오쿠라 호텔이 섰다. 자선당 주춧돌은 오쿠라 호텔 구내 정원 벚나무가 가득한 산책길에 버려져 있게 되었다.

그 주춧돌은 1993년에 와서야 목원대 김정동 교수가 발견하여 각계에 알림으로서 다시 세상에 드러났다. 오쿠라 호텔측이 정식 반환 요구가 있으면 반환하겠다는 의사를 밝혔고, 우리나라측에서는 반환을 추진하였다. 삼성그룹에서 해체 및 수송 비용을 부담하여 문화재관리국에 기증하는 형식을 취하여 정면 7칸, 측면 5간의 자선당을 받치고 있던 돌 288개는 1995년 12월 28일 다시 경복궁으로 돌아왔다. 오기는 왔으나 그 돌들은 이미 불구가 되어 있었다. “불을 먹어서” 다시는 제구실을 할 수 없는 상태가 된 것이다. 불을 먹은 채 돌아온 자선당 주춧돌에 겹쳐서 왕으로 번듯하게 서지 못하고 간 세자들, 순종과 영친왕의 환영이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