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이야기] 복수의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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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이야기 15 – 복수의 하나님

내가 초등학교에 다닐 무렵에는 반공 글짓기 대회니 포스터 그리기 대회니 하는 ‘대회’가 무척 잦았다. 그런데 주제와 소재가 고정되어 있는 이런 ‘창작’ 활동을 통해 무슨 창의력이니 표현력이니 하는 것들을 키울 도리는 없었다. 반공 글짓기에서는 무지막지한 북한 공산집단에 대한 끓어오르는 증오심을 거리낌 없이 표현하고, 입이 찢어지면서도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 써 놓고 보니 이상하기는 하다. 지금 내 입 양쪽을 손가락으로 당기고 보니 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그 때는 그런 의문을 품는 것 조차 불온한 짓이었다 – 를 외친 이승복 어린이를 본받자는 다짐만 하면 되었다. 포스터를 그릴 때에는 도화지 아래 쪽에 먼저 ‘잊지 말자 6.25’나 ‘북괴는 노린다 우리의 빈틈을’ 따위의 글자를 크게 쓰고 검은 배경색을 칠한 다음 ‘붉은색 악마’를 그리면 그걸로 끝이었다. 붉은 악마는 본래가 화마(火魔) 비슷하게 생겨서, 그 아래쪽 글씨를 ‘불조심’으로 바꿔도 별로 어색하지 않았다. 그러니 불조심 포스터나 반공 포스터나 그릴 때마다 똑같은 그림이 되곤 했다.

똑같은 글, 똑같은 그림을 반복적으로 쓰고 그리는 일을 지속해 온 아이들의 색과 형상에 대한 사고가 정형화되지 않는다면 그것이 이상한 일일 게다. 그런 교육을 받고 자라온 나 역시 보통의 기성세대와 마찬가지로 한국 축구 응원단이 ‘붉은 악마’로 자처했을 때 큰 충격을 받았다. 1983년 멕시코 청소년 축구대회 때 한국팀에게 Red Furies라는 별명을 붙인 외국 기자는 한국인의 레드 컴플렉스를 몰랐을 테니 유니폼 색만 보고 그런 단어를 썼다 해서 나무랄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나를 포함한 한국인들에게 그 말은 유니폼 색 이상의 심각한 의미로 다가왔다. 그 단어에서 조건반사적으로 ‘북한 공산집단’을 떠올리지 않으면 한국인이 아니었다. 그랬기에 외국 기자들이 한국 국가대표팀에게 ‘빨갱이’의 딱지를 붙였다는 국내 매스컴의 담대한 보도를 접하고 어색한 심사를 느끼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당연히 그 때만 해도 후일 한국인들이 가슴팍에 ‘빨갱이가 되자 Be the Reds’라는 글자를 새긴 옷을 ’거족적‘으로 차려 입고 이 도시 한복판을 뒤덮으리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제 ‘붉은 색’과 ‘악마’의 이미지는 과거의 정형화된 틀에서 벗어나 있다. 내 아이들은 ‘붉은 악마’와 ‘북한 공산집단’ 사이에서 아무런 연관성도 발견하지 못한다. 학교에서 숙제로 내 준 6.25 기념 글짓기를 할 때에도 날 선 증오감을 담지는 않는다. 한국의 교육현실은 여전히 살인적이지만, 창의력과 표현력이 교육의 새로운 화두로 등장한 이래  정형화된 이념 교육의 틀은 많이 약화된 모양이다. 색과 형상에 대한 오래된 고정 관념은 그렇게 무너져 가고 있다.

그런데 사람을 둘러싼 공간의 이미지는 교과서나 거듭되는 잔소리를 통해 전달되는 이미지보다 더 오랫동안 지속되며 더 강한 영향을 미친다. 인간의 정착 생활이 시작된 신석기 시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특정 지표면과 특정 인간 집단 간의 관계는 거의 고정되어 있다. 인간은 자신을 둘러싼 지표면의 형태나 식생, 그 위에 자신들이 건조한 구조물들과 일상적으로 대면한다. 공간은 참고자료나 부연설명 없이 자신이 있는 모습 그대로를 인간에게 가르친다 – Seeing is Believing, 보는 것이 믿는 것이다 -. 그래서 특정 공간에 대한 특정 인간 집단의 정형화된 사고는 문명 전환기에나 변화하는 ‘고유 문화’ – 장기 지속적인 삶의 태도 – 의 영역에 속한다. 어떤 곳에 집을 짓고 어떤 곳에 경작지를 일구며 어떤 곳에 죽은 자를 묻을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이 내면화된 정형적 사고에 규정되는 직관(直觀)이다. 우리가 방방곡곡(坊坊曲曲)이라 하는 것을 일본에서는 진진포포(津津浦浦)라 한다. 계곡 끝자락에 집을 짓든지 물가 포구에 마을을 만들든지 그거야 사람 마음 먹기 나름이지만 그 마음을 지배하는 것이 바로 공간에 대한 직관적 태도이다.

반복학습을 통해 창작에도 ‘정답’이 있다는 사실을 배운 아이는 서정적인 풍경화를 그릴 때에도 정형성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도시는 애당초 풍경(風景)을 갖지 않은 공간으로 취급되었기 때문에, 그는 과거에 살던 시골 마을을 그린다. 먼저 산과 들, 내를 그리고는 아무 고민도 없이 산과 들이 맞닿는 위치쯤에 서너 채의 초가집을 조그맣게 그려넣는다. 다음에 크레파스에 씌어 있는 글자를 따라 – 하늘은 하늘색, 땅은 황토색, 사람 피부는 살색 – 색을 칠해 넣으면 그럴듯한 초등학생용 풍경화가 완성된다 – 사실은 중고등학생이 된 후에도 그림의 정형성은 거의 달라지지 않았다 -. 이념과 주장을 표현하는 포스터나 감성을 표현하는 풍경화나 또래 아이들의 그림은 언제나 대략 비슷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아이들과 젊은이들의 공간적 감수성이 크게 바뀌었다. 강의실 칠판에 아래와 같은 ‘산수화(山水畵)’를 그려 놓고 학생더러 집이나 마을을 그려 넣으라고 하면 사람마다 제각각이다. 나 어렸을 적에는 분명 B가 정답이었는데, 요즈음에는 정답이 없다. 그들은 이미 산수(山水) 사이 어느 곳에나 집과 마을이 있음을 ‘직관적으로’ 알고 있으며, 그 자신이 사는 곳, 살고 싶은 곳에 대한 공간적 준거를 가지고 있다. 공룡같은 아파트 단지는 주변의 산수(山水)를 ‘경관요소’로만 취급함으로써 인간과 공간의 관계를 극단적으로 파편화해 버렸다. 오늘날의 도시 사람들에게 산수(山水)는 조금 큰 ‘풍경화(風景畵) 액자’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 ‘풍경화’에 담긴 ‘그림으로서의 공간’은 아파트 가격에 꼭 그만큼의 영향을 미친다. 오늘날의 서울 집값을 기준으로 하면 아파트 단지 입지에 적합한 자리는 D > A > B > C순이 될 터이다. 지난 수십년 사이에 공간을 바라보는 태도가 완전히 달라진 것이다.

이런 변화는 도시 생활이 이 시대의 표준적 삶으로 자리잡은 탓이다. 그러나 농업경제가 중심이던 시절에는 농민의 감수성이 표준이었다. 농민의 공간적 감수성은 지금에도 초기 철기시대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농촌 마을은 대개 산자락이 끝나고 들판이 펼쳐지기 시작하는 바로 그 지점에 자리잡고 있다. 사람들은 들에서 먹거리를 얻었고 산에서 땔거리를 얻었다 – 산에서도 산나물이나 과실을 얻을 수 있었지만 이는 어쨌든 부수적인 먹거리였다 -. 농민의 노동장소는 주로 들이었고 산은 제한적으로만 이용하는 공간이었다.

1900년경 서울 외곽 북한산 자락의 작은 마을. 산자락이 끝나는 지점에 십여채의 초가가 옹기종기 모여 있다. 주변 경지는 극히 적어 도시적 삶이 지배하는 마을이었을 것으로 보이지만 입지는 전형적인 농촌 마을과 다를 바 없다.

무엇보다도 산의 주인은 ‘죽은 자’들이었다. 우리나라의 무덤이 ‘산소(山所)’가 된 것은 이미 삼국시대 초기의 일이었다. 고구려인들과 초기 백제인들은 죽은 자의 공간과 산 자의 공간을 그 후대 사람들과는 달리 보았다. 그들은 죽은 자를 평지에 묻었고 집은 산 위에 지었다. 유목과 수렵을 중시하던 사람들, 잦은 전쟁을 겪어야 했던 사람들이 보는 공간은 그렇게 달랐다. 그러나 광활한 경작지가 중요성을 더해 가면서 마침내 산 자들은 평지로 내려왔고 죽은 자를 산 속으로 내 몰았다. 공간을 낭비함으로써 자신의 권위를 드러내고자 했던 왕들은 여전히 평지에 무덤을 썼지만, 그래도 산에 무덤을 만든다는 형식은 갖추고자 했다. 그 탓에 인민에게는 본래 있지도 않은 산을 새로 만드는 역(役)이 추가되었다. 산의 이미지가 죽은 자의 공간으로 고착되면서 산에 대한 외경심(畏敬心)이 강화되었다. 물에는 ‘귀신’이 살고 산에는 ‘신령’이 살게 된 것이다.

복원 직후의 석촌동 적석총(1986). 고구려 국내성(집안)에 갔을 때에도 이와 비슷한 무덤을 평지 도처에서 볼 수 있었다. 평지에 쓴 옛 무덤은 무덤이되 ‘산소(山所)’는 아니었다. 정착 농경이 본격화하면서 생명의 원천인 곡식을 생산하는 땅 = 평지는 죽은 자와 거리를 두어야 했고, 산 사람이 평지로 내려 오자 죽은 자는 산으로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조선시대 서울의 건축물 고도제한에 대해서는 앞에서도 언급한 바 있지만, 여기에는 민(民)이 왕보다 높은 위치를 점해서는 안된다는 생각 외에 산 자가 죽은 자의 땅을 침범해서는 안된다는 생각도 작용하였다. 죽음과 친한 종교 건축 = 사찰은 산 속에 들어설 수 있었지만, 죽은 자가 산 자와 너무 가까이 해서는 안되었고 산 자의 눈에 쉽게 띄어서도 안되었다. 이 역시 우리나라 산사(山寺)가 숨어 있는 또 하나의 이유일 것이다. 서울이 산이 많은 도시라 화기(火氣)를 꺾기 위해 높은 곳에 집을 짓지 않았을 뿐 아니라 높은 집도 짓지 않았다는 주장도 있다. 이른바 ‘풍수지리설’의 영향론이다. 그러나 풍수지리설은 산 자의 땅과 죽은 자의 땅에 대한 정형화된 관념 위에 얹힌 사고체계일 뿐이다. 장풍득수(藏風得水)의 명당(明堂)이니 양택(陽宅) 음택(陰宅)의 길지(吉地)니 하는 것은 모두 평지와 산지를 구분하고 난 뒤에야 선택할 수 있었다 – 아무리 용한 풍수쟁이라도 몽골 초원이나 만주 벌판에서 명당과 길지를 짚어낼 수는 없을 터이다 -. 조선 후기 서울 인구가 급증하면서 주택 부족이 심각한 현상이 된 뒤에도 사람들은 천변에 집을 지을 망정 산비탈에 집을 짓지는 않았다.

중림동 약현성당. 1892년 준공. 고딕양식의 얼개를 갖춘 붉은 벽돌조의 교회 건물은 이후 한 세기 동안 한국 교회 건축 양식(樣式)의 기본 모델이 되었다.

산 능선 위에 당당하게 모습을 드러낸 건축물, 그것도 높이 솟은 뾰족탑을 가진 건축물을 처음 세운 것은 프랑스 선교사들이었다. 1886년 조불수호조약이 체결되자마자 파리 외방전교회는 조선 천주교 포교과정에서 다수의 순교자를 낸 장소들을 점유(占有)하기 – 이 무렵 서울의 땅은 원칙적으로 모두 국유지였다. 거래할 수 있는 것은 주택 뿐이었는데, 전교회는 무슨 방법을 썼는지 구릉 위나 택지 주변의 빈 터를 자기 소유로 만들었다. 점유라는 애매한 표현을 쓴 것은 이 때문이다 – 시작했다. 사후(死後) 조선 최초의 순교자 지위를 얻은 김범우 토마스의 집터, 순조 원년(1801) 신유박해 때 천주교도의 피로 물든 새남터 주변, 신유․기해․병인박해 때 역시 40여명의 교도가 처형당한 서문밖 일대 토지가 축차로 천주교회의 소유가 되었다. 땅을 점유한 후 전교회는 이들 ‘성지(聖地)’에 바로 교회 건물을 짓기 시작했다. 이윽고 약현성당(1892), 새남터 신학교와 성당(1892, 1902), 명동성당(1895) 등 뾰족탑 위에 십자가를 세운 붉은 벽돌조의 건물들이 야트막한 구릉 꼭대기, 생각지도 못하던 위치에 낯선 모습으로 등장하였다.

이후 첨탑이 달린 붉은 벽돌조 건물은 한국 교회 건축의 기본 모델이 되었다. 또 구릉이나 언덕 위, 하늘에서 가장 가까운 곳이 최적의 교회 입지로 여겨졌다. 시골 마을에서조차 “동구 밖에 기차 정거장, 언덕 위에 하얀 예배당”(조영남, 내 고향 충청도)은 정해진 패턴이었다 – 시골 예배당 자리가 대개는 옛 서낭당 자리였음을 여기에서 부언할 필요는 없을 터이다 -. 내가 어릴 적 살던 서울 변두리 동네에도 높은 언덕 위에는 조야(粗野)한 고딕 양식의 붉은 벽돌 예배당이 서 있었다.

당시 천주교회가 그 자리에, 그 높이의 건물을 지은 것은 한편으로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 죽음도 불사한 순교자들을 기리기 위해서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순결한 성도들을 무참히 학살한 조선 왕실과 정부를 능멸하기 위해서였다. 조선 사람들의 처지에서 본다면 이들 건물은 죽은 자를 기리는 건물이되 산 자의 공간과 너무 가까이 붙어 있는 건물이었고, 도성 안에 있으면서 왕궁을 위압하는 건물이었다. 모양이나 재질도 낯설었지만 무엇보다 그 ‘위치’와 ‘방향’이 충격적이었다.

1903년의 명동성당. 야트막한 구릉 위에 하늘을 찌르는 모습으로 서 있다. 첨탑 위의 십자가는 경복궁 광화문을 정면으로 향하고 있다.

유목민적 기질을 오랫동안 보존해 온 서구인의 공간관은 우리의 옛 고구려인과 비슷했던 것 같다. 그들은 구릉 위나 산 능선에 집을 짓는데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다. 그들은 더 멀리 조망할 수 있는 고지(高地)를 오히려 좋아했다. 개항 이후 도시 서울에 정착한 외국인들은 대개 고지대에 집을 지었고, 야트막한 초가집들을 내려다 보며 문명과 인종의 우열(優劣)을 장소의 높낮이와 결부시켰다. 하늘이 만든 자연과 인간이 만드는 건조물 사이의 관계에 대해 오랫동안 조선 사람들이 유지해 온 정형적 태도는 그들에게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했다. 여기에 한 가지 더, 프랑스 선교사들이 지은 교회 건축은 좌향에 대한 세속적 금기도 깨어 버렸다.

에리히 프롬은 근대 심리학 지식을 원용하여 서양 기독교의 주조(主調)가 ‘사랑’ 보다는 ‘복수와 처벌’에 있음을 설파한 바 있다. 그는 ‘어머니’가 자식에 대한 무한하고 조건 없는 ‘사랑’을 체현한 존재임에 반해, ‘아버지’는 자기를 닮은 자식, 자기를 따르는 자식에게만 편파적인 사랑을 베푸는 존재요, 자기 뜻을 거스르는 자식에게는 단호한 처벌을 마다 않는 존재라고 보았다. 어머니는 사랑의 어머니이되 아버지는 처벌의 아버지이다. 동양적 가족윤리가 제시하는 ‘엄부자모(嚴父慈母)’ 역시 이와 비슷하다. 프롬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데에서 ‘부성(父性)의 신격(神格)’을 찾았다. 그는 자신을 믿고 따르는 자는 사랑하되 그렇지 않은 자에게는 가혹하고 잔인한 신이었다. 노아 시대와 소돔과 고모라의 시대, 모세 시대의 인류로서 그를 거스른 자들은 모두가 참혹한 징벌을 받았다. 더구나 그의 징벌은 현세에서 그치지 않았다. 영원히 지속되는 무한공포의 징벌이었다. 프롬은 서양 기독교에서 ‘사랑의 하나님’을 본 것이 아니라 ‘징벌과 복수의 하나님’을 보았다.

이 땅에 처음 세워진 천주교회들은 ‘복수의 하나님’이 무도한 세속권력에 희생된 ‘하나님의 성도’들을 어떻게 위로하는지, 또 그들에게 어떤 미래를 예비해 주었는지를 명료하게 보여주는 가시적 증거물이었다. 약현성당도 명동성당도, 십자가가 달린 뾰족탑을 경복궁 정문, 광화문 쪽으로 세웠다 – 미심쩍으면 구글어스로 확인해 보기 바란다. 그래도 모르겠으면 서울역사박물관에서 펴낸 “문화유적 지표조사 종합보고서”에 수록된 도면을 보면 된다 -. 하늘에서 내려다 보면 마치 두 대의 쇠뇌로 경복궁을 겨누는 형국이다. 아마도 구약시대의 하나님이었다면 ‘그의 종들이 폭군의 처소를 향해 쇠뇌를 겨누고 있는 모습을 보시고 무척 흡족해 하셨을 것’이다.

1920년대의 예장동. 일본인들이 지은 새 건축물들이 남산 자락을 깊숙이 파고들었다. 사진 우측 중간부에 원 통감부, 조선총독부 건물이 도시 전체를 내려 보며 서 있다.

명동성당이 건립된 지 111년. 한국에서는 또 한 분의 추기경이 나왔고 천주교회보다 훨씬 많은 개신교회가 세워졌다. 이제 밤에 남산 서울타워에 올라가 서울 도심부를 내려다 보면 어느 방향에서나 밤하늘의 별처럼 빛을 발하는 수많은 붉은 십자가들을 찾을 수 있다. 하나님의 복수는 멋지게 성공했다. 명동성당이 경복궁을 겨눈 쇠뇌였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당시에도 적었고 지금은 더더욱 없다. 아마도 경복궁에 살던 고종과 수시로 궁을 드나들던 대관들은 처음부터 그 사실을 알았을 게다. 그들이 명동성당 건축에 그토록 자주 불쾌감을 표시하고 항의한 것도 그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러나 어쨌든 명동성당은 그 자리에 그 모양으로 섰고 왕조가 몰락한 후에도 오랫동안 왕궁을 능가하는 랜드마크 구실을 했다.

옥수동 재개발아파트 단지(1987), 뒤쪽의 남산 능선부는 이 아파트 뒤편에 사는 사람들에게만 온전히 보인다. 남산 경관을 독점한 아파트 주민들은 무척 흡족했겠지만, 나머지 시민들은 산을 ‘볼 권리’마저 박탈당했다.

높은 언덕 위에 높이 솟은 건물은 한편으로 동양의 세속 전제 권력에 대해 서양의 신성 권력이 결국 승리했음을 알리는 상징이었다. 서구적 공간관이 ‘복수의 하나님’을 매개로 한국적 공간관을 패퇴시키고 서울을 점령한 셈이다. 더불어 이는 천년 넘게 지속되어 온 이 땅 사람들의 공간관에 결정적인 파열구(破裂口)를 내었다. 약현성당과 명동성당 건축의 종교적 후예들만이 아니라 세속의 후예들 역시 산자락을 파고 들어 갔다. 하늘이 만들어낸 자연의 선을 인간이 만든 건축물의 선이 침해해서는 안된다는 오랜 금기는 여지 없이 깨져 나갔다. 더불어 그래도 ‘경관(景觀)’만은 함께 누릴 수 있었던 서울 사람들의 ‘시각적(視覺的) 유대’ – 도시에서는 시감각이 모든 것을 지배한다 – 역시 붕괴되었다. 자본주의적 가치법칙은 경관의 소비에도 관철되어, 소비할 수 있는 자와 소비할 수 없는 자를 나누었다.

물론 사람들이 서울 안의 야산들을 거리낌 없이 택지(宅地)로 취급하기까지에는 조금 더 시간이 필요했지만, 이는 어쨌든 ‘시간 문제’에 불과했다. 남산 자락, 안산(鞍山) 자락에 들어차 있던 산소(山所)들이 자취를 감추고 그 자리를 집들이 대신 차지하면서 서울은 빠르게 ‘근대화’되었다. 그리고 이제 서울 도심부에서 온전히 조망할 수 있는 능선은 없다.

※ 나는 명동성당과 약현성당의 좌향에 관한 얘기를 서울시립대 건축과 김성홍 교수에게 들었다. 그는 석사과정 학생이 알아낸 것이라고 했는데, 그 학생의 이름은 아예 듣지 못했다. 그 얘기를 듣고 지도를 살펴 보고 나서 “아뿔싸”를 외칠 수밖에 없었다. 아관파천 이후 고종이 경복궁을 버리고 새로 경운궁을 정비한 데에는 명동성당을 보고 싶지 않았던 심리가 작용했을런지도 모른다는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