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이야기] 복덕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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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이야기 31 – 복덕방

전우용(근대사 2분과)

  직업에 귀천(貴賤)이 없다는 말은 자본주의 시대가 만들어낸 대표적인 거짓말이지만, 이 말을 곧이 곧대로 믿는 사람들도 오랫동안 성(性)이나 연령에 따른 직업 차별까지 묵살하기는 어려웠다. 남자가 할 일과 여자가 할 일, 젊은이에게 어울리는 일과 늙은이의 ‘소일거리’는 관습적이지만 꽤나 명확히 구분되어 왔다. 그런데 근래에 들어 이 구분선도 급속히 모호해지고 있다.

  최근 알파걸이 새로운 아이콘으로 부각되면서 성(性)과 직업 사이의 관계 – 엄밀히 따지자면 직업적 성취의 문제인 듯 하지만 – 를 재정립하자는 논의가 활발해지고 있는데, 성별(性別) 분업에 관련된 변화가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다.

  자본이 노동력 시장을 확대할 필요가 있을 때면 여성은 수시로 집 밖으로 불려 나왔고, 때로는 그들 자신이 집 밖의 일거리를 간절히 원하기도 했다. 전쟁으로 인한 남성 노동력 시장의 공백을 재빨리 메운 것도 여성들이었다. 관습적으로 유지되어 왔던 성별 분업구도는 그럴 때마다 재정비되곤 했다.


(사진 1) 동화약방의 활명수 제조 공장. 공장 생산품의 최종 가공은 대개 단순하고 반복적인 노동으로 이루어졌다. 그 일은 거의가 여성 노동자의 몫이었는데, 가끔 남성 아동이 끼어 들기도 했다. 사진 맨 앞쪽 좌우에 사내아이들이 보인다.

  우리나라의 경우 자본과 노동의 분리가 본격화되던 초기 국면에서, 집 밖으로 나온 여성들은 두 부류로 나뉘었다. 자신의 성(性) ‘정체성’에 어울리는 일을 하는 여성과, 이런 저런 이유로 남성의 일을 대신하는 – 또는 침범하는 – 여성으로.

  앞의 여성들에게는 대체로 직업 자체에 성(性)을 표현하는 글자가 포함되었고 뒤의 여성들에게는 직업 앞에 ‘여(女)’자를 첨부해서 ‘어울리지 않는 일을 하는’ 여성임을 표시했다. 산파(産婆), 간호부(看護婦), 전도부인, 침모(針母) – 또는 식모(食母) – , 매소부(賣笑婦), 유녀(遊女), 그리고 최근까지 있었던 가정부나 안내양 등은 순연한 여성 직업이었고, 여의사, 여기자, 여선생, 여학생, 여직공, 여점원, 여급(女給), 기타 수많은 ‘여○○’은 남자 일에 ‘끼어 든’ 여자들을 지창했다 – 남(男) 자를 앞에 붙이는 직업은 남자간호사나 남자미용사 말고는 별로 떠오르는 것이 없다 -. 남존여비(男尊女卑)는 이 경우에도 여지없이 관철되어, 여자 일을 하는 여자 보다는 남자 일을 하는 여자가 더 높이 평가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어느 경우든 ‘직업 여성’은 그다지 좋은 의미로 사용되지 않았다. 1970년대 도시 직업 여성의 대종(大宗)이었던 ‘삼순이’ – ‘식순이’, ‘공순이’, ‘차순이’를 통칭하는 말이다. 1980년대 초 민심 수습책의 일환으로 직업명에 들어 있는 비하적(卑下的) 요소를 걷어 내자는 국가적 캠페인이 언론을 총동원하여 대대적으로 벌어졌는데, 그 때 많은 직업명이 다듬어졌다. 구두닦이는 구두광택사로, 청소부는 환경미화원으로, 식모는 가정부나 가사보조원으로, 차장은 안내양으로, 심지어 간호원은 간호사로 바뀌었는데, 그럴싸한 것도 있고 왜 바꿨는지 이유를 알기 어려운 것도 있지만, 이후로 ‘삼순이’에 관한 기억도 희미해져 갔다 – 는 ‘직업 여성’ – 술집 여자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 바로 위에서, 여차하면 그 경계를 넘을 준비가 되어 있는 여성들로 취급되었다.

  이미 1920년대에도 여공의 ‘정조(情操)’는 ‘세루치마’ 한 벌과 교환되는 것으로 의심받았으니 직업에 붙은 이미지는 장소에 부착된 이미지만큼이나 질겼다.


(사진 2) 일제하의 제사 공장. 제사공장과 고무공장의 노동력은 대다수가 여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여공’이었을 뿐 ‘공원’은 아니었다. 소수의 남성 노동자들이 이들을 지휘 감독했고, 그 과정에서 자주 성적(性的)인 억압이 가해졌다. 1930년경 고무여공을 소재로 한 노래 가사 중에는 “얼굴 예쁜 색시라야 감 잘 준다고 / 감독 앞에 헤죽헤죽 아양이 밑천 / 고무공장 큰애기 세루치마는 / 감독나리 사다준 선물이라네”(雪友學人, 「職業夫人 언 파레트 – 고무工女의 生活裡面」 ≪實生活≫ 1-1, 1931.8)라는 것이 있었다.

  이 질긴 고정관념이 깨지기 시작한 것은 굳이 여(女)자를 앞에 붙일 필요가 없는 직업이 많아지면서부터였는데, 이 변화의 출발점은 길게 잡아도 30년 이상을 거슬러 올라가지 못한다. ‘커리어 우먼’을 직역하면 ‘직업 여성’이지만 둘 사이에는 하늘과 땅 만큼의 거리가 있다.

  한 세대 전의 사람들이라면 요즘의 알파걸을 보고 ‘선 머슴’ 같다거나 ‘왈가닥’이라고 했겠지만, 그들 사이에도 역시 시대가 만들어낸 거대한 장벽이 있다. 여성들만 변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뛰어 노는 마당 역시 크게 달라진 것이다.

  이야기가 본지(本旨)에서 벗어나 버렸지만, 성별에 따른 직업 구분은 명료하면서도 극히 차별적이었다. 반면 나이와 직업 사이에는 이토록 명료한 상관 관계는 만들어지지 않았다. 아동 및 청소년과 노인 – 노동력을 상실한 후에도 오랫동안 더 살 수 있는 시대가 열린 것은 아직 한 세기도 채 되지 않았다 – 에게 각각 어울리는 도시 직업은 오래 전에도 있었고 특히 20세기에 들어와 그 수가 늘기는 했지만, 범주로 나눌 수 있을 만큼 일반화된 적은 없었다.


(사진 3) 아동을 ‘작은 어른’이 아니라 ‘어린이’로 구별하여 바라보게 된 것도 근대의 산물이다. 20세기초까지 아이들의 직업활동에서 문제가 된 것은 힘이었지 나이가 아니었다. 나무장수, 짚신장수, 엿장수 등 소지 물품이 무게가 적게 나가거나 축력에 의지하는 것인 경우에는 아이 장사꾼도 적지 않았다.

  예컨대 여관 ‘조바’ – 일본말에서 파생된 것이다. 심부름꾼 정도가 되겠다 – 나 식당 뽀이, 구두닦이, 신문팔이 등은 주로 아이들의 일이었지만 어른도 간간이 끼어들었고, 결국에는 어른 일이 되어 버렸다.

  노인들에게는 복덕방, 대서방, 관상쟁이, 풍수쟁이[지관(地官)] – 묘자리 보아 주는 사람 – 따위가 할당되었는데, 직업이라기보다는 소일거리라 해야 마땅한 일들이었다. 그러나 지금 이들 중 복덕방은 부동산 공인중개사 사무소로, 대서소는 법무사 사무소로 이름이 바뀌면서 전문 용역업체가 되었고 더불어 노인들도 자기 자리에서 밀려 났다.

  나는 복덕방(福德房)이라는 명칭에 대해 그리 유쾌하지 않은 기억을 가지고 있다. 중학교 3학년 때 내 어머니는 아들의 어두운 안색(顔色)을 교정해 보시겠다고 금속테 – 금 메끼칠한 – 안경을 맞추어 주셨다.

  나는 아주 어려서도 자주 애늙은이로 불리곤 했는데, 이 안경은 상황을 돌이킬 수 없이 악화시켰다. 당장 센스 있는 – 그러나 내게는 얄밉기 짝이 없는 – 친구 녀석 하나가 내게 ‘복덕방’이라는 치명적인 별명을 붙여 주었고 – 당시 안경잡이에게 붙는 별명은 보통 네눈깔이나 싸이클 정도여서 복덕방은 무척 파격적이었다 -, 이 별명은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도 내 공식 – 학교 선생님들도 알고 있었다는 의미에서 – 별명으로 끈질기게 붙어 다녔다. 복덕방은 ‘영감’과 동의어였다.

  지난 수십년래 주기적으로 부동산 광풍이 몰아치면서, 부동산 중개업은 사장님이나 아줌마 – 집값이 비싼 동네에는 젊은 남성이 상대적으로 많고 싼 동네에는 중년 여성이 경향적으로 많다 – 의 일이 되었는데 이 변화는 복덕방이라는 명칭 자체의 소멸과 함께 진행되었다.

  복덕방 사장님이나 복덕방 아줌마는 아무래도 어울리지 않는다. 복덕방은 오직 영감에게만 – 할머니도 안된다 – 어울린다. 이 변화는 또한 담당자의 연령 변화에 국한되지 않는다. 명칭과 담당자의 변화 뒤에는 토지와 건물에 대한 오래된 관념의 근본적이고 불가역적(不可逆的)인 변화가 있었다.


(사진 4) 1900년경 서울의 노인들. 20세기 초까지도 남자 나이 40대이면 할아버지가 되어 있었다. 이 시기에는 노동 능력보다 생명이 먼저 소진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노인에게는 따로 일 – 글 읽고 쓰는 것은 노동이 아니었다 – 이 없었다. 특히 서울의 양반 후예들에게 노동은 일종의 금기였다. 그저 길가에 나앉아 곰방대 물고 세태를 논하거나 장기를 두는 것이 일이라면 일이었을 뿐.

  복덕방이라는 말의 유래는 확실치 않다. 당제(堂祭)나 동제(洞祭)를 지낸 뒤 마을 사람들이 모여 앉아 음식을 나누어 먹던 방(房)을 복덕방(福德房)이라 하였고, 이때의 ‘복덕(福德)’은 ‘생기복덕(生起福德)’에서 나왔다고 하는 설명이 일반적으로 통용되고 있다.

  이 설명이 맞다면 그 유래는 까마득히 먼 옛날로 올라가야 할 것인데, 같은 이름으로 다른 실체가 만들어지는 경우도 있는 법이다. 사람들이 모여 함께 음복(飮福)하는 복덕방과 가옥 매매를 중개하는 복덕방은 이름은 같지만 실체와 기원은 아주 달랐다. 앞의 복덕방과 뒤의 복덕방은 귀신과 사람 모두를 ‘불러 들이는’ 것 말고는 별반 유사성이 없었다.


(사진 5) 1972년 광주대단지 – 현재의 성남시 – 에 들어선 수많은 부동산 중개업소들. 이 때에도 이미 대규모 토지 가옥 거래가 이루어지던 지역에서는 복덕방이라는 ‘촌스러운’ 이름 대신 ○○사(社)라는 기업형 이름이 사용되고 있었다. 복덕방은 미로처럼 얽힌 골목길 귀퉁이에 어울리는 이름이었고, 팔구사 부동산 등은 신개발지나 대규모 재개발 지구에 걸맞는 이름이었다.

  가옥 매매를 중개하는 ‘업소(業所)’ 명칭을 복덕방(福德房)으로 쓰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 되지 않은 듯 하다. 우선 이 경우의 ‘방(房)’은 여러 사람이 모여 앉는 방이 아니라 상업 시설 = 점포의 일종이다.

  조선 시대에는 물건을 쌓아 놓고 파는 곳을 전(廛)이라 했고, 한켠에서 만들고 한켠에서 파는 곳, 즉 생산과 판매를 함께 하는 곳을 점(店)이라 했다. 오늘날 전(廛)은 ‘어물전(魚物廛) 망신 꼴뚜기가 시킨다’는 둥 옛 속담을 인용할 때에나 가끔 쓰일 뿐으로 사어(死語)가 된지 오래이고, 점(店)이 애초의 뜻과는 무관하게 상업 시설을 통칭하는 말로 쓰이고 있다.

  양복점이나 일부 양화점은 여전히 생산 가공과 판매를 겸하고 있지만, 철물점이나 잡화점에서 초대형 백화점이나 할인점에 이르기까지 판매만 하는 곳도 모두 점(店)이다.

  한편 방(房)은 매우 적어서 – 노래방, PC방, DVD방, 소주방 등의 ‘방’과는 용례가 다르다. 한국인의 ‘방’ 집착에 대해서는 언젠가 따로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 이 글의 주제인 복덕방 말고는 금은방 정도가 있었을 뿐이다. 이때의 방은 자기 물건이 아닌 남의 물건을 대신 사고 팔아 주는 곳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복덕방은 주인 영감 것이 아닌 남의 ‘복(福)과 덕(德)’ – 집이 아니라 – 을 사고 팔 수 있도록 알선해 주는 곳이다.

  1986년 말, 군사 정권의 폭압에 비례하여 학생운동도 격해져 있던 시절의 세모(歲暮)에, 공부한다는 핑계로 – 사실은 크리스마스부터 정초까지가 제일 무료하고 지겹던 때여서 – 대학원 연구실에 앉아 있던 내 귀에 학부 학생회 간부가 거친 목소리로 외치는 새 해 인사가 들려 왔다. “학우여, 새 해 복 많이 쟁취하자!” ‘쟁취하자’는 하루에도 수십번씩 보고 들어 전혀 귀에 선 말이 아니었지만, 복과 연결되어 버리니 생경하기 이를 데 없었다.

  아무리 세상 모든 것이 싸워서 빼앗아야 할 것으로 보여도 그렇지, 복을 싸워서 빼앗자니. 복(福)은 사람끼리 주고 받거나 빼앗거나 훔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직 신(神)만이 내려 줄 수 있는 것이다.

  천신(天神)이 내려 주면 천복(天福)이고 지신(地神)이 받쳐 주면 지복(地福)이다. 어떤 사람은 타고 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한참 살다가 받기도 한다. 로또 당첨이 ‘쟁취’할 수 있는 것이었다면, 우리나라 인구는 많이 줄었을 터이다.

  반면 덕(德)이란 사람이 베푸는 것이다. 내 중학교 때 한문 선생님은 이 글자를 “두인변에 십사일심”으로 가르치셨다. 열 네명을 한 마음으로 묶을 수 있는 ‘어떤 것’이 곧 덕(德)이라는 것이다. 얼핏 요즘 유달리 강조되는 리더십이나 카리스마, 친화력 등이 이와 비슷할 것 같기도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아무래도 부족한 ‘어떤 것’이 덕(德)이다.

  논어(論語)에는 “덕불고필유린(德不孤必有隣)”이라는 문구가 있다. 보통 덕이 있는 자에게는 사람이 많이 따른다는 뜻으로 의역하는데, 한걸음 더 나아가면 덕은 이웃 사이에서 쌓고, 이웃으로부터 받는 것이다. 우리 옛말에 팔백금으로 집을 사고 천금으로 이웃을 산다는 말도 같은 맥락이다. 이쯤 해 두자.

  복덕방(福德房)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지복(地福)과 인덕(隣德)을 알선해 주는 업소이다. 그래서 복덕방 주인은 풍수쟁이를 겸해야 했고, 동네 사정도 꿰뚫어야 했다. 어느 집에 살던 누가 언제 입신양명해서 떠났는지, 혹은 어느 집에서 멀쩡히 잘 살다 급살 맞은 사람이 나왔는지, 어느 집 주인이 성질이 고약해서 늘상 이웃에게 폐를 끼치는지, 어느집 천정에서 물이 새고 어느 집에서 연탄가스 중독 사고가 자주 일어나는지 등등을 다 알아야만 비로소 온전한 복덕방 주인의 자격을 갖출 수 있었다.

  그러고 보면 오늘날의 ‘공인중개사’ 보다 ‘복덕방 주인’에게 요구되는 자질과 능력이 훨씬 더 많았던 셈이다. 평당 가격으로 완벽하게 환산되는 오늘날의 아파트도 집주인이 망해 나갔다면 값이 깎이기는 하겠지만, 그걸 일부러 알리는 ‘공인중개사’는 거의 없고, 그걸 아는 ‘공인중개사’도 드물다.


(사진 6) 1989년 행당동 어느 골목 모퉁이. 구멍가게와 복덕방을 겸한 집. 비록 낡고 허름하지만, 이 복덕방 주인은 양쪽 두 골목을 주름잡고 있었을 터이다. 김기찬 사진집.

  토지 가옥의 매매를 알선하는 사람을 한자어로는 가쾌(家儈)라 했고 우리 말로는 ‘집주름’이라 했다. ‘주름잡는다’는 말은 바지 주름 잡는다는 뜻이 아니라 동네 사정을 훤히 꿰뚫어 안다는 뜻이다. 한동네에 오래 머물러 살면서 가가호호의 내밀한 사정까지 손금 보듯 하는 사람들만이 주름을 잡을 수 있었다. 영감이 아니고서야 그런 능력을 어떻게 구비할 수 있겠는가.

  박지원은 ‘광문자전(廣文者傳)’에서 평생을 파락호로 살던 광문(廣文)이 늙으막에 집주름 노릇 하며 사는 모습을 묘사했다. 그의 삶은 왕년(往年)이 다 소비해 버렸고 남은 것은 여생(餘生) 뿐이었으나, 그는 왕년(往年)이 만들어 준 경륜과 이웃의 신망(信望) 덕에 소일거리나마 잡을 수 있었다.

  조선 왕조 개국 직후, 집보다는 빈 터가 많았던 서울은 굳이 집주름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러나 수도(首都) 꼴이 잡히고 집들이 빼곡이 들어찬 뒤로는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 살러 오는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살 집을 찾아 주는 사람이 필요하게 되었다.

  세조 때에 오가작통법을 시행하면서, 각 통의 통수로 하여금 집주름 노릇을 겸하도록 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 얼마 전까지만 해도 다른 동네로 이사하는 경우에는 통장 도장을 받아 전입신고를 해야 했다. 일차적으로는 일제의 통반제가 남긴 유제이지만, 더 거슬러 올라가면 여기에서도 맥을 이을 수 있다 -.

  그 때부터 개항 이후까지 오랫동안, 집주름은 집주름이었을 뿐, 복덕방 영감은 아니었던 듯 하다. 복덕방이라는 당당한 간판 – 이라기 보다는 천조각 – 을 내걸고 영업하는 집주름은 개항 이후로도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에야 나왔다.

  개항 이후 서울에서 집을 구하는 외국인들이 늘면서 집주름의 일이 늘었고, 덩달아 집주름도 늘었다. 더구나 이들 외국인들이 집을 보는 태도는 한국 사람들과는 많이 달랐다. 그들은 땅에서 복(福)을 구하지도 않았고, 이웃에게 덕을 보려는 생각도 없었다.

  그들은 넓은 마당,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은 깨끗한 기와 건물, 가급적 통풍이 잘되는 언덕배기의 집을 원했고, ‘집 자체의 역사’는 고려하지 않았다. 집의 역사를 아는 집주름보다는 경제적 가치에 민감한 집주름이 필요했다.

  집주름이 익숙해 있던 집의 가치와 외국인들이 원하는 집의 가치가 충돌했지만, 집주름은 어쨌든 알선 중개인일 뿐이었다. 사려는 사람이 따지지 않는데, 알선 중개인이 흉가니 폐가니 따질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점차 집을 구성하는 여러 가치 중 계량할 수 있는 가치들이 전면에 나서기 시작했다.

  집을 복이나 덕이 아니라 돈과만 직결시키는 태도가 전면화한 데에는 대한제국 황실이 ‘기여‘한 바도 컸다. 1901년말, 내장원(內藏院)은 서울시내 집주름들을 모아 들여 한성보신사(漢城普信社) – 일명 한성회사 – 라는 회사를 설립했다.

  회사의 영업 목적은 주택 담보 대부업이었는데, 느닷없이 이런 회사가 생긴 데에는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다. 이 해는 극심한 흉작이어서 안남미(安南米)를 수입하고서야 겨우 그럭저럭 쌀값을 안정시키고 기민(飢民)을 구제할 수 있었다. 개항 이후 조선이 쌀을 수입한 것은 1888년에 이어 이 해가 두 번째였다.

  당장 쌀 부족만 문제가 아니었다. 흉작으로 인한 조세 감면 등으로 인해 국가 재정도 파탄지경에 이르렀다. 당장 국가적 사업으로 추진되던 양전지계사업 등을 축소 조정해야 했을 뿐 아니라 관리들의 봉급조차 지불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다급해진 탁지부는 내장원에 손을 내밀었고, 내장원은 탁지부에 돈을 꾸어 주는 한편으로 새 나간 세금을 추징할 방도를 찾았다.

  그런데 이 무렵의 지방관은 관리라기보다는 사업가에 가까웠다. 그들은 오늘날 대중적 인기를 끌고 있는 CEO형 단체장의 원조라 할 수 있을 정도로 다방면에 걸쳐 사업을 벌였고, 큰 수입을 얻었다.

  민영휘(閔泳徽)가 평안감사 시절에 긁어모은 돈만 가지고도 일제 강점기까지 조선인 최고의 갑부 소리를 들었을 정도이니, 그밖에 자잘한 관찰사나 군수 나부랭이까지 매거(枚擧)할 필요는 없을 터이다.

  당시 지방관들이 돈을 긁어모으는 수법을 내 임의로 대별하면 고전형, 근대형, 범죄형 정도로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고전형이란 멀쩡한 사람을 죄에 옭아 넣어 돈을 뜯어내거나 하는 것인데, 농민전쟁을 겪은데다가 사법제도도 개편된 뒤였기 때문에 예전처럼 함부로 할 수는 없었다.

  막강한 배경을 가진 자이거나 관찰사급이라도 이런 짓을 하기 위해서는 눈치를 좀 보아야 했다. 그래서 이런 식의 ‘침학(侵虐)’은 전 시기보다는 많이 줄었던 듯 하다.

  근대형이란 조세 징수 방식의 개혁과 화폐 제도의 문란에 편승하여 다양한 금융 기법을 개발하고, 그에 입각하여 돈을 ‘버는’ 방식이다. 대한제국 시기 지방관 수입의 대부분이 여기에서 나왔던 바, 관직의 시장 가격 – 매관매직의 가격 – 도 이를 기준으로 형성되었던 듯 하다.

  당시 전환국(典圜局)에서는 백동화라는 악화(惡貨)를 다량 남발하였는데, 그 액면가치와 시장가치 사이에는 현격한 차이가 있었다. 그러나 정부가 발행한 화폐인 만큼 정부의 수입 지출에서는 액면가로 인정받았다. 지방관들은 이 점을 이용하여 백성들로부터 조세를 거둘 때에는 엽전으로 걷고, 중앙에 상납할 때에는 백동화로 냈다.

  예를 들어 보자. 백동화의 액면가가 엽전 5냥이고 시장가가 2냥일 경우 지방관은 우선 엽전으로 1만냥을 걷는다. 이걸 시장가로 백동화와 교환하면 액면가 2만5천냥으로 늘어난다. 지방관은 그 중 1만냥만 중앙에 상납하면 되므로 나머지는 몽땅 – 환전 수수료 조로 나가는 돈은 있었겠지만 – 자기 것으로 할 수 있었다. 차익의 규모를 단순비교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오늘날의 환치기다.

  그들은 중앙 상납분 1만냥도 바로 상납하지 않았다. 일단 돈이 너무 무거웠다. 지방 여행을 결심한 외국인들은 돈을 지게에 지고 운반할 인부를 따로 고용해야 할 정도였다. 더구나 활빈당(活貧黨)과 명화적(明火賊)이 도처에 숨어 있는데, 돈 지게 행렬을 천리길에 내보낼 이유는 없었다.

  이는 또 다른 돈 벌이 길에 나서는 데 더 없이 좋은 핑계였다. 당시 상인들은 전국에 걸친 네트워크를 만들어 놓고 있었다. 그들에게 조세 상납을 맡기면 되었다. 물론 장사꾼에게 공돈은 없다. 지방관이 선이자를 떼고 장사꾼에게 조세 상납을 대행시키면 – 더불어 자기 돈도 맡겼다 -, 장사꾼들은 그 돈으로 물건을 사고팔고 하면서 서울까지 올라간다.

  서울에 도착해서 탁지부에 세금을 바치고 나면 나머지는 장사꾼 몫이다. 이름 하여 ‘외획(外劃)’이라는 것인데 – 간단히 예를 들자니 비근(卑近)해졌다. 거꾸로 장사꾼이 세금을 대납(代納)하고 지방관에게 청구하는 경우도 있었다 -, 지방관의 입장에서 보자면 여지없는 오늘날의 대부업이다.

  그러나 사업에는 언제나 위험이 따르게 마련이다. 장사꾼이 중간에 큰 손해를 볼 수도 있었고, 지방관이 교체되는 틈을 타 돈을 떼어 먹을 수도 있었다. 이렇게 되면 지방관으로서는 본의 아니게 납기(納期)를 어길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이미 자기 것이 되어 버린 돈을 대신 내는 양심적인 지방관은 드물었다. 아예 대 놓고 하는 범죄형 착복도 있는 마당에, 연체쯤은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았다. 정부와 황실은 이런 폐단을 줄이기 위해 은행도 설립하고 상납 독촉에도 열심이었지만, 연체는 줄어들지 않았다.


(사진 7) 대한천일은행사옥. 1899년 황실과 관료, 상인들의 합작으로 설립된 대한천일은행은 조세금 취급을 통해 외획(外劃)으로 인한 폐단을 줄여 보려 하였으나, 탁지부 고문 브라운의 반대 등으로 실패하고 일반 은행 업무만을 담당하였다.

  1901년 내장원이 탁지부에 돈을 꾸어 주고 나서 서울의 집주름을 모아 한성보신사를 설립한 것은 고의로든 아니든 세금을 연체한 지방관 – 전직 지방관을 포함하여 – 들로부터 밀린 세금을 추징하기 위해서였다.

  내장원경 겸 탁지부대신서리 이용익(李容翊)은 세금을 연체한 지방관들을 잡아 가두고는 세금을 즉납(卽納)하지 않으면 사형도 불사한다고 엄포를 놓았으나, 지방관들은 그들 나름대로 억울하게 느낄 만한 이유가 있었다.

  우선은 지방관 노릇하면서 벌어들인 돈이 다 자기 것은 아니었다. 관직 사는 데 들어간 돈은 건져야 하는 것 아닌가. 더구나 이 때 관직 매매의 ‘주범’은 다름 아닌 황제였다.


(사진 8) 1923년경의 복덕방. 주점 옆에 방 한칸을 빌어 복덕방이라 쓰인 현수막(?)을 걸어놓고 있다. 그 옆에는 토지가옥 중개라고 쓰인 글귀도 보인다. 복덕방 영감님은 무료한 모양으로 들어가지도 나오지도 않은 어정쩡한 상태로 앉아 있다.

  스페인의 역사철학자 오르테가는 “인간에게 본성이란 없다. 그에게는 오직 역사가 있을 뿐이다”라는 명언(名言) – 내 기준에서 – 을 남겼다. 매관매직은 ‘무조건’ 나쁘다거나 고종이 ‘천성적으로’ 돈을 밝혔다거나 하는 식으로 설명해 버리면 여기에 역사가 끼어들 여지는 별로 없다.

  17-18세기에는 유럽 각국에서도 조세 징수 – 청부 또는 대행 – 회사가 속출했던 바, 근대적 금융기관과 세무 관료제가 정비되기 전까지는 조세 청부업자가 할 일이 많았다. 그래서 언제나 조세 청부권은 거액에 거래되었다.

  대한제국의 경우에는 당대의 화폐제도나 금융제도와 관련하여 조세의 징수 상납 과정에서 생기는 과외 수입이 특히 많았다. 대한제국의 관직 가격은 아마도 이 과외 수입분에 연동되었을 것이다. 물론 이름만 잠시 올려 주어 죽은 뒤의 묘비를 꾸밀 수 있게 해 주는 ‘명예형’ 매관매직도 있었다. 이런 관직은 대개 궁내부 소속 기관에서 팔았는데, 수입을 얻을 수 없는 관직이었기 때문에 값도 쌌을 것이다.

  황제가 조세징수권을 가진 관직을 판 것은 지방관들이 얻는 부수입을 전제로 한 행위였다. 이 부수입이 민폐(民弊)에 기반한 것임은 두 말할 나위 없지만, 당장 그걸 시정할 방법도 없었다. 어차피 악화(惡貨) 남발 자체가 민폐의 주범이었고 재정 악화의 근인(根因)이었다. 당장 돈 찍어서 쓸 때야 좋았지만, 가치 없는 돈을 액면가로 인정해서 받을 때는 속이 쓰렸을 터. 중간에서 증발한 돈을 환수할 방법을 강구할 필요가 있었다.

  이 시기에는 지방관들이 편법으로 – 불법이 아니라 – 얻을 수 있는 수입이 늘어난 만큼 관직값도 비싸졌는데, 옛 관행대로라면 그 돈은 세도가문으로 흘러 들어가게 마련이었다. 황제의 매관은 그 돈을 가로채는 행위였고, 자신이 발행한 돈의 가치 손상분을 일부 보전하는 행위였다 – 오해는 말아 주었으면 좋겠다.

  나는 고종의 매관매직을 미화할 생각은 눈꼽 만큼도 없다. 다만 당대의 역사적 경제적 사정과 관련하여 달리 해석할 부분이 남아 있음을 말한 것 뿐이다 -. 지방관들은 이미 황제에게 돈을 냈으니 따로 세금 낼 이유가 없다고 주장하고 싶었겠지만, 그들이 지불한 관직 값은 ‘근대형’ – 또는 편법적 – 수입을 얻을 권리에 대한 댓가였지, 그로써 불법적 수입이나 조세금 착복까지 포괄적으로 허용받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니 이에 대해서는 억울함을 가슴 속에 묻어야 했을 뿐, 대 놓고 항변할 수는 없었다.


(사진 9) 일제 강점기의 복덕방 영감. 복덕방이라 쓰인 현수막 옆에 토지가옥소개업이라 쓰인 목판을 걸고 길가에 나 앉아 있다. 쭈그려 앉은 채로 나무를 깎고 있는데 어느 게 본업이고 어느 게 부업인지 알기 어렵다.

  그들이 내놓을 수 있었던 두번째 변명거리는 ‘가진 돈이 정말로 없다’는 점이었다. 한 때 KBS의 “좋은나라운동본부”라는 프로그램에는 상습적 탈세자들을 추적하여 세금을 추징하는 코너가 있었다. 그 때마다 모자이크된 얼굴들은 변조 처리된 음성으로 한결같이 “부동산만 있을 뿐 현금이 없어 세금을 낼 수 없다”고 강변했다.

  100여년 전의 조세 포탈자들도 똑같은 말을 했다. 사실 화폐 가치가 하루가 다르게 떨어지는데 아무리 몽매한 ‘전자본주의적’ – 이들이 관직에 있을 때 벌인 ‘사업’과 관련해 본다면, 이런 표현은 전혀 사리에 맞지 않는다 – 인간이라 하더라도 현금을 움켜쥐고 있었을 턱이 없다. 돈은 이미 땅이나 집으로 자태를 변환시켜 놓은 상태였다. 이용익이 이 사정을 모를 리 없었다. 그는 그 나름의 방식으로 이들의 하소연을 들어 주기로 했다. 집을 저당 잡고 돈을 꾸어주는 것.

  한성보신사는 – 보(普)자는 보신각(普信閣), 보성사(普成社), 보성학교(普成學校) 등 내장원 돈으로 만든 시설들에만 쓰였다는 점은 이미 앞에서 말했다 – 이 일을 위해 만들어진 회사였다. 내장원은 지방관들에게 꾸어준 돈이 제 때 회수되지 않는 경우 저당잡은 집을 내다 팔아야 했고, 그를 위해서는 집주름이 필요했다.

  어느 지방관이 집을 숨겨 두고 돈 없다고 끝까지 오리발을 내밀 경우에는 그게 사실인지도 조사해 보아야 했다. 집주름은 이 일에도 요긴했다. 그래서 한성보신사는 주택 담보 대부만을 한 것이 아니라 주택 실소유자 조사, 주택 매매 등도 겸했다. 집주름들이 제 세상을 만났고 보너스로 회사 형태의 조직도 얻었다. 토지 가옥 매매 중개업이 독립된 직업으로 인정받게 된 것도 이 때부터였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이 일은 러일전쟁 무렵까지도 마무리되지 않았던 모양이다. 매물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오면 집값이 떨어질 것은 뻔한 일. 그런 손해를 감수하면서 무리하게 빨리 내다 팔 이유는 없었을 것이고, 그러다 보니 서울에는 내장원이 소유했거나 저당잡은 집이 많았을 것이다.

  러일전쟁 이후 일본이 가장 먼저 손을 댄 것이 내장원 재산이었고, 이 때 서울의 주택 시장에도 모종의 변화가 생긴 듯한데, 현재로서는 짐작만 할 수 있을 뿐이다. 일제 강점기 서울에서 가장 많은 주택을 소유한 사람은 송병준(宋秉畯)이었는데, 한성보신사가 러일전쟁 이후 예종석(芮宗錫) – 송병준의 재산 관리인이었다 – 과 최정규(崔晶圭) – 일진회 간부였다 – 의 수중에 떨어진 것과 관련하여 생각해 보면, 한성보신사가 저당 잡은 집의 일부는 일진회 소유로 넘어갔던 듯 하다.

  1909년, 최정규가 보신사 사장 명의로 사원 2,000명을 대표하여 – 당시 서울 가구가 5만호쯤 되었으니 복덕방은 25집에 한 곳 꼴이었다 – 합방 청원서를 내는 일이 발생했다. 대다수 집주름은 이에 반발하여 최정규를 쫓아 내고 유길준(兪吉濬)을 사장으로 앉혔는데, 최정규를 따라 나간 집주름도 꽤 있었던 모양이다.

  앞의 그룹은 경성보신합명회사로 개칭하여 1910년대 초까지 영업을 계속하였고, 뒤의 그룹은 일단 가쾌조합을 만들었다가 1911년 가쾌주식회사로 조직 변경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그 후 일제 강점기 내내 집주름의 회사는 따로 만들어지지 않았다. 주택 담보 대부업이나 신탁업 회사는 여럿 만들어졌지만, 이들 회사에 집주름이 끼어들 여지는 없었다.

  한성보신사야 어찌 되었든 집주름들은 러일전쟁 이후 일본인들이 ‘신부(新附)의 영토’ 조선에 쏟아져 들어옴으로써 다시 호황을 맞았다. 특히 관리들의 이주가 집중된 서울에서는 고급 주택에 대한 수요가 많았다. 그 집들은 나라가 망한 마당에 서울에 살 이유가 없어진 관리들이 공급했다.

  조금 뒤에는 예전 같으면 서울살이를 꿈도 꿀 수 없었던 지방 졸부들이 살 집을 찾았고, 공부하러 상경한 유학생들도 하숙집을 찾아 다녔다. 자본주의화가 빠르게 진전되면서 집의 상품화 속도도 빨라졌다.

  집주름들이 복덕방 세 글자를 써 넣은 천 조각을 내 걸고 길가에 쭈그려 앉아 집 살 손님을 기다리게 된 것도 이 무렵의 일이었던 듯 하다. 그 후로 오랫동안, 이들은 복덕방 영감으로서 골목 한 귀퉁이에 작은 방 한 칸 얻어 놓고, 같은 또래의 동네 사람들과 장기도 두고 화투도 치고 수다도 떨다가 하숙방이나 셋방 구하러 오는 사람을 만나면 앞장 서 길을 나서곤 했다. 운수 좋은 날에는 막걸리 한 되 받아다 동네 친구들 먹이기도 하면서.


(사진 10) 1948년의 복덕방 영감. 허가 번호 제 106호, 남대문구 토지가옥소개업조합에 소속된 복덕방임을 알리는 현수막만 있을 뿐 정작 방(房)은 없다. 노인은 빗자루, 솥뚜껑 등 가재도구도 늘어 놓고 있지만, 어느 쪽 일이든 소일거리였던 모양으로 표정과 자세는 느긋하다.

  그러나 이제 복덕방 영감은 과거의 존재, 역사 속으로 사라진 존재가 되어 버렸다. 2005년말 현재 서울의 부동산 중개업소는 26,000여곳에 달하여 160집에 한 곳 꼴이지만, 그 안에는 이제 영감님들이 없다. 오늘날의 영감님들은 복덕방 대신 아파트 경비실이나 주차 관리실에서 소일거리를 찾는다.

  동네 골목도 더 이상 노인들을 환영하지 않는다. 그들은 경로당이 아니면 탑골공원이나 종묘공원 앞에서 장기를 두어야 한다. 노인들의 소일거리 하나와 더불어 좋은 집이 담아야 했던 오래되었지만 소중한 가치 하나도 속절없이 사라졌다. 포근한 경관과 다정한 이웃들, 복(福)과 덕(德).


(사진 11) 1986년 제1회 공인중개사 시험. 복덕방 영감님들이 자격증을 따기 위해 시험장에 앉아 있다. 이들은 아마도 수십년만에 처음으로 시험지를 받아들었을 것이다. 회차가 거듭될 수록 시험문제는 어려워졌고, 노인 합격자는 줄어들었다. 1990년대에는 영기발랄한 젊은이들이 공인중개사 시험 대열에 합류했고, 곧바로 합격자 명단에서 노인들이 이름을 완전히 지워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