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이야기] 물장수(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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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이야기 30 – 물장수(2)

전우용(근대사 2분과)

  1903년, 서울에 전차를 놓아 재미를 보았던 미국인 콜브란(H. Collbran)과 보스트윅(H.R. Bostwick)은 고종으로부터 서울 상수도 사업의 특허를 얻었다. 이 무렵에는 콜레라와 식수(食水) 사이의 관계가 명백히 인지되어 있었고, 물은 이미 오래 전부터 ‘상품(商品)’으로 거래되고 있었다.

  한강에서 정수(淨水)한 물을 도성 안으로 끌어들여 ‘팔아 먹는’ 일이 신기할 것까지는 없었다. 더구나 도시의 대팽창을 경험한 서구에서는 이미 상수도가 필수적인 도시 기반 시설이 되어 있었다. ‘문명화된 도시’를 꿈꾸었던 고종에게는 이래저래 마다할 이유가 없는 제안이었다.

  그러나 이 두 미국인들은 브로커 기질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 대한제국 시기에 정부와 황실은 외국인과 계약할 때나 내국인에게 사업권을 줄 때면 언제나 ‘타국인에게 이 권리를 양도할 시에는 권리 자체를 무효로 한다’는 조항을 집어 넣었다. 그러나 외국인들은 대개 이 조항을 거리낌 없이 묵살했고, 고종이 특히 신임하고 의지했던 미국인들이 더 했다. 경인철도와 상수도, 전기, 전차 등이 모두 그런 과정을 거쳐 일본인들에게 넘어갔다 – 2년 후 이 사업권을 영국인들에게 팔아 넘겼다.

  영국인들은 이 사업권을 근거로 대한수도회사(Korean Water Works Co.)를 설립한 후 공사는 다시 콜브란 등에게 맡겼다. 이래저래 시일이 지체되어 상수도 시설 공사가 시작된 것은 러일전쟁 후인 1906년 8월이었고, 정확히 그 2년 후에 준공되었다.


사진 1) 준공 직후의 뚝섬 수원지. 뚝섬 앞을 흐르는 한강물을 끌어들여 정수 처리한 후 대현산 배수지로 송수, 서울 성내와 용산에 수도물을 공급했다. 최초의 정수장을 뚝섬에 둔 이유는 ‘물’ 자체보다는 물을 운반하기 위한 동력에 있었던 듯 하다. 뚝섬은 조선 후기 이래 신탄(薪炭)의 집산지였기 때문에 양수기용 증기 터빈을 가동시키는 데 유리했다.

  콜브란이 수도사업권을 청원한 그 해, 서울의 일본 거류민들도 남산 계곡을 상수원으로 하여 따로 사설 수도를 만들었지만, 이 수도는 워낙 규모가 작았을 뿐 아니라 남산 기슭의 일본인 거류지만을 급수구역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물장수들과는 관계가 없었다.

  그러나 대한수도회사의 수도물은 ‘우물의 도시’ 서울의 물 사정에 근본적인 변화를 이끌어 냈다. 상수도는 우선 콜레라로 인한 피해를 크게 줄여 주었다. 수도가 부설된 지 5년 이내에 서울의 수도물 사용 가구(家口)는 전체의 1/3선에 달할만큼 늘어났고, 수인성(水因性) 전염병의 위협도 그만큼 줄었다.

  그렇다고 해서 물장수 일거리가 당장 줄어들지는 않았다. 당시의 상수도 급수관은 요즘처럼 모든 집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았다. 물은 우물물과 다른 물이었지만, 그 물을 받을 수 있는 곳은 우물과 마찬가지로 한정되어 있었다. 물장수들이나 소비자들에게 문제가 된 것은, 우물물은 ‘공짜’인데 수도물은 공짜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사진 2) 준공 직후의 뚝섬 정수장.

  서울에 수도물 공급이 개시되자 물장수와 ‘물주인’들은 졸지에 ‘생산자’로부터 ‘소매상’으로 그 지위가 바뀌었다. 1908년 6월, 물 관련 영업자 수천명이 모화관(慕華館)에 모여 대한수도회사에 급수권(汲水權)을 배상하라고 요구했다. 수도꼭지로 인해 개개 우물 단위로 구획되어 있던 ‘급수구역’이 소멸할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급수구역은 곧 돈이었다. ‘우물에서 물을 길어 팔 권리증’은 비록 공인된 것은 아니었으나 관행적으로 매매되고 있었다. 그 권리증이 휴지조각이 될 판이니 ‘물주인’들이 들고 일어나지 않을 수 없었다. 물장수들 역시 수도꼭지에서 물을 받을 ‘권리’를 잃을까 걱정했다. 그러나 수백년간 ‘전상매매(轉相賣買)’되어 오던 상업상의 여러 권리증 = ‘주인권(主人券)’은 러일전쟁 이후 모두 무효가 되어 버렸다.

  요즘에도 건물주인은 세입자끼리 주고 받은 ‘권리금’을 인정하지 않는데, 돈에 관한 한 독하기로 유명한 영국인의 대한수도회사가 이를 인정해 줄 턱이 없었다. 대한수도회사는 그 대신 물장수들을 ‘배달 노동자’로 고용하고자 했다. 수도관을 매 가호(家戶)로 연장하는 것보다는 그 편이 싸게 먹혔고, 물장수들의 기존 고객들을 힘 안들이고 새로운 수도물 소비자로 끌어들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진 3) 일제하의 물장수. 사진기 앞이라 그랬는지 ‘위생적으로’ 감싼 머리와 ‘잘 차려 입은’ 옷이 인상적이다. 실제로 버선 신고 물 나르는 일을 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물장수들이 바로 수도회사 ‘피고용자’가 될 수는 없었다. ‘물주인’들은 그들대로 자기 권리를 지키려 들었고, 새로운 돈벌이 기회를 포착한 모리배들은 그들대로 방법을 찾으려 들었다. 그로 인해 애초 물장수들이 자기 권익을 지키기 위해 가입했던 노동야학회가 수상야학회로, 다시 수상영업소나 수상공업소, 또는 수상조합소로 이름과 형식을 바꿔 가면서 물장수를 ‘지배’하고 ‘수탈’하는 기구로 기능했다.

  ‘물장수 조합’은 ‘관행에 따라’ 물장수로부터 과중한 조합비를 징수하고는 그 중 일부를 수도회사에 일괄 납부했다. 명색은 조합이나 실제로는 수도물 판매 기업이었던 셈인데, 요즘 기업 경영의 합리화 수단으로 자주 사용되는 아웃소싱(outsourcing)은 이런 면에서는 ‘첨단 경영기법’ 쪽 보다는 “중세의 잔재(殘滓)” 쪽에 더 가깝다고 해야 할 듯 하다.


사진 4) 1950년대 고아원의 상수도. 학교 등 공공시설이나 교육시설의 수도전은 모두 이런 모양을 하고 있었다. 수도꼭지에 입을 대고 물을 마실 수도 있었고, 수도꼭지 밑에 머리를 들이 대고 머리를 감거나 세수를 할 수도 있었다. 여름철 땀범벅 먼지범벅이 된 아이들에게는 사막의 오아시스같은 고마운 존재였다.

  1911년 2월, 대한수도회사를 매수하여 관영 수도로 바꾼 일제는 수도물을 전용 급수, 공용 급수, 소화용 급수, 선박용 급수, 특별 공용 급수의 다섯 종류로 나누어 판매했다. 이 중 물장수가 취급한 것은 특별 공용 급수라는 것이었는데, 이름은 ‘특별’하지만 실제로 대다수 ‘보통’ 소비자들은 이 물을 이용했다. 물장수의 입장에서 달라진 것은 없었다. 다만 수상조합소가 물값을 거둬 납부하는 곳이 대한수도회사에서 경기도청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그런데 1913년말, 일제 당국은 갑작스럽게 ‘수도급수규칙’을 개정하여 ‘특별공용급수’를 폐지하고 그를 ‘관설공용급수’로 바꾸었다. 수도꼭지는 같은 것이지만, 수도꼭지 ‘열쇠’를 수도물 공급을 신청한 각 집에 직접 나누어 주고, 물장수가 이 수도꼭지에서 물을 받지 못하도록 한 것이다. 물장수들이 독립운동이라도 했기 때문이었을까?


사진 5) 1925년 을축대홍수 직후 식수난으로 물을 받기 위해 늘어선 사람들. 이 홍수로 둑섬과 노량진의 정수장은 물론 시내 우물 역시 대부분 오염되었다. ‘물난리’가 또 다른 ‘물난리’를 초래한 셈인데, 도시에서는 이런 물난리를 극복하기가 쉽지 않다. 인구 30만, 백악과 남산 계속 도처에 천연샘이 남아 구실하고 있던 시절에도 상수원 오염이 이런 난리를 초래했는데, 지금 한강이 오염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수도물이 처음 공급되기 시작했을 때, 사람들이 그 물을 아무 의심 없이 받아들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서울에는 뚝섬 앞으로 흐르는 한강물 말고도 마실 만한 물이 아직 많았다. 더러운 우물도 있었지만 비교적 깨끗한 우물도 있었고, 백악이나 인왕 계곡을 흐르는 맑은 물도 있었다.

  조선시대에도 ‘물 사치’가 있었던 모양이어서 권세 있고 돈 있는 사람들 중에는 밥 해 먹는 물, 마시는 물, 글씨 쓰는 물, 씻는 물을 다 구별해 쓴다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었다. 물에 대해 까다로웠던 사람들에게 ‘표준화된’ 수도물을 팔아 먹기 위해서는 수도물이 ‘괜찮은’ 물이라는 사실을 널리 알리는 동시에 그 유통로를 장악, 확대할 필요가 있었다.

  대한수도회사나 일제의 관영 수도가 한동안 ‘물장수’들을 그대로 두었던 것은 그들이 장악한 유통망에 접근하기 위해서였을 뿐이다. 수도물에 대한 사회적 신뢰가 어느 정도 쌓였다고 판단한 시점에서, 일제는 물장수를 간단히 버렸다. 오늘날 비정규직 파견 근로자를 쓰는 기업가의 ‘합리적’ 태도와, 이 시점에서 일제가 보인 태도는 완전히 같았다.


사진 6) 1950년대 말 정동 구 러시아공사관 앞. 물장수가 지던 지게를 어린 소년이 힘겹게 지고 언덕을 오르고 있다. 한영수 작.

  물장수는 우물물을 먹던 소비자에게 수도물을 알리는 데에는 도움이 되었으나, 관영 수도의 ‘마진’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당시 수도물 값은 정액제(定額制)도 아니고 종량제(從量制)도 아닌 어중간한 방식으로 책정되었다.

  수도물을 사서 먹는 소비자는 ‘지게’ 단위로 물값을 지불했으나 물장수들은 급수구역의 크기에 상관 없이 매달 일정액을 수상조합에 납부했고, 조합은 이 중 상당액 – 물장수들의 주장에 따르면 그 액수는 물장수가 납부하는 금액의 60% 이상에 달했다 – 을 횡취(橫取)한 후 나머지를 경기도청에 냈다.

  이런 요금 체계 하에서는 물장수의 급수구역이 커지고 수도물 소비자가 늘어나더라도 수도 사업자에게는 별 ‘메리트’가 없었다. 수도 관리권을 쥐고 있던 경기도청이 보기에는, 수도물 소비 가구의 증가는 오히려 ‘물 낭비’였다. 1913년 말의 수도급수규칙 개정은 그 ‘낭비 요인’을 없애고 수도물 수용가구로부터 직접 물 값을 거둬 들이는 데에 목적이 있었다.


사진 7) 1992년 낙동강 ‘페놀’ 방류 사건 이후 수원지에 대한 관심이 부쩍 늘었다. 한강에서 잡힌 ‘기형어’들은 신체의 80%가 물로 이루어진 ‘사람’도 물의 복수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음을 생생히 보여 주었다.

  이익단체의 압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민주 정체(政體)’에서라면 이런 ‘낭비’도 끌어 앉고 갈 수밖에 없지만, 식민지 지배자들은 많은 것을 고려할 필요가 없었다. 100여년 이상 급수권(汲水權)에 붙어 있던 ‘권리금’이나 수도물 장수가 되기 위해 지불했던 ‘조합비’는 일장훈시만으로 허공에 날려 보낼 수 있었다.

  물장수들이 조합이나 소비자와 빈번히 마찰을 빚었던 것도 조합 해산의 명분을 세워 주었다. 1914년 초여름, 경기도장관은 수상조합 간부들에게 해산비로 38,000원을 주고 조합을 해산하도록 지시했다. 각 경찰서에서도 관내 물장수들을 불러 모아 소액의 ‘은사금(恩賜金)’ – 일본의 한국 강점 후 친일 귀족과 소수 양반들, 극소수 환과고독(鰥寡孤獨)에게 ‘천황(天皇)’ 명의로 지급한 돈의 이름도 ‘은사금’이었다. 이름은 ‘은혜를 베풀어 주는 돈’이지만, 실제로는 다 빼앗고 나서 생색내기 위해 엉뚱한 데다 눈꼽만큼 돌려 주는 돈이었다. 비근하지만 우리 말로는 “개평‘ 정도가 적당할 듯 싶다 – 을 나누어주고 자진 해산을 지시했다.


사진 8) 1978년 팔당 수원지 공사현장. ‘한강의 기적’은 동시에 ‘한강의 오염’이기도 했다. 서울 인구가 늘어나면서 수도물 수요도 늘어나, 뚝섬, 노량진, 구의 등 서울에 가까운 정수장만으로는 그 수요를 채울 수 없었다. 팔당 수원지는 현재까지 서울과 수도권 인구 대다수의 식수원으로 기능하고 있지만, 인근의 음식점, 모텔, 축산농가, 산업시설 등으로 인해 계속 더러워지고 있고 앞으로도 그 추세가 바뀔 것 같지는 않다.

  이 조치로 수상조합은 해산되었지만, 물장수가 사라지지는 않았다. 바뀐 규정에 따르면 수도물 수용가(受用家)는 도청에 물값을 내고 수도꼭지 ‘열쇠’를 받은 후 필요할 때마다 수도꼭지 있는 곳에 가서 물을 받아 와야 했다.

  그런데 물 긷는 일은 ‘천한 일’이라는 뿌리 깊은 인식이 남아 있었던 데다가, 물 길어 올 사람이 없는 집도 있어서 – 가난한 집에서는 수도물을 쓸 수 없었다. 수도물을 쓰는 조선 집들은 일본식 표현으로 ‘중류 이상’이거나 여관, 음식점 등이었는데, 영업소의 경우 물 긷는 일을 따로 맡길 일꾼까지 두기는 어려웠다 – 모든 집이 규칙대로 직접 물을 받아 쓸 수는 없었다.

  ‘자기 열쇠’ 들고 수도물을 받아 ‘파는’ ‘수도물 장수’는 공식적으로 사라졌지만, 그 대신 ‘남의 열쇠’ 들고 수도물을 받아 ‘배달하는’ ‘수도물 배달꾼’이 생겨났다. 그리고 이는 그야말로 ‘말장난’일 뿐이다. 사라진 사람이 바로 새로 나타난 사람이었다. 또 이런 시스템에서는 열쇠 주인 집 뿐 아니라, ‘열쇠 없는 집’에도 ‘몰래’ 물을 배달할 수 있었다. 우물물을 길어다 파는 물장수도 오랫동안 명맥을 유지했다. 그 탓에 1920년대 초반까지도 경성부내의 ‘물장수’는 1천명에 달했다.

  세간에 오랫동안 전해 온 이야기 중에 ‘북청 물장수’에 관한 것이 있다. 서울 물장수의 태반이 북청 출신이었고, 그들이 남달리 근면하고 성실해서 대개 성공을 거두었다는 이야기인데, 어떤 이는 물장수가 처음 출현할 때부터 북청 청년들로 구성되어 있었다고까지 주장한다.

  그런데 19세기 초에는 ‘북청 고학생’이라는 존재는 없었다. 북청 출신 고학생들이 물장수의 주축이 된 것은 ‘수도물 배달꾼’과 ‘우물물 장수’들이 활동했던 1920년대의 일이었을 게다. 이후 물장수는 지속적으로 그 수가 줄어들기는 했지만, 1970년대초까지도 서울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 1960년까지도 서울의 상수도 보급율은 50%에 불과했다. 그 비율은 1970년에 85%로 늘어났지만, 문서상의 보급율과 체감 보급율에는 많은 차이가 있었다. 물이 안 나오는 때가 많은데 집 마당에 수도꼭지만 있으면 뭐하나 – . 내가 다닌 고등학교는 신개발 주택지에 있었는데, 그 때만 해도 집에 ‘수도물이 안나와’ ‘사이다’로 밥을 해 먹고 도시락까지 그 밥으로 싸 오는 사는 친구들이 있었다. 덕분에 나는 ‘사이다 밥’ – 맛은 끔찍했지만 – 도 얻어 먹어 보았다.

  서울에서 물장수가 ‘완전히’ 자취를 감춘 것은 1970년대 말 쯤이었던 듯 하다. 그 때에 가서야 서울 어느 집에서든 수도꼭지만 틀면 콸콸이든 졸졸이든 물은 흘러 나왔다. 그 얼마 전 ‘중동 붐’을 계기로 그 때까지 까맣게 모르고 있던 아랍 지역에 대한 정보를 새로 얻은 사람들은 아랍 사람이 비록 석유는 풍족하게 쓰지만 물은 ‘사 먹는다’는 사실에 위안을 얻기도 했다.

  마실 물에 특별히 주리지 않았던 경험 때문인지, 아니면 서울살이 경험이 일천한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인지, 사람들은 자신이 물을 사 먹는다는 사실을 수시로 잊어버리곤 했다. 수도요금에 “수도세”라는 당치 않은 이름을 붙인 것도 어쩌면 그런 무의식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 마찬가지로 쓰레기 버리는 데 돈 내야 하는 것도 ‘당연한’ 일로 받아들이기까지는 시간이 걸렸다. 그래서 쓰레기 수거 요금 역시 “오물세”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 .

  이 시기가 아마도 서울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싼 값에 큰 힘 들이지 않고 마실 물을 얻을 수 있었던 짧은 기간이었을 것이다. 그로부터 갓 10여년이 지난 후부터 한국은 “물 부족” 국가라는 홍보가 시작되었다. 같은 무렵, 수도물이 ‘먹는 물’로는 적합하지 않다는 생각도 널리 퍼져 나갔다.


사진 9) 1990년의 팔당 수원지.

  건강한 신체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던 무렵, 물과 관련된 이야기도 덩달아 늘어났다. 물이 약처럼 – 좋은 물을 약(藥)처럼 취급하는 태도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그 역사가 길다 – 취급되기 시작했고, 전국의 소문난 약수터 주변이 ‘물 퍼올리는’ 공사로 몸살을 앓기 시작했으며, 수도물 가공 기계인 ‘정수기’가 시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내 외가는 약수로 유명한 초정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데, 몇 해 전 들렀을 때 보니 내가 어렸을 적 가재 잡던 집 앞 개울이 거의 말라 있었다. 땅 속에서 서울 사람들을 위해 “초정리 광천수”를 마구 퍼 올린 탓에 지표수를 떠받치는 지하수가 고갈되어 버린 것이다.

  서울이 지방으로부터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이 된 것은 이미 오래 전이지만, 이제는 땅 속에 숨어 흐르는 물까지 빨아들이는 지경에 이르렀다. 더불어 다시는 볼 수 없으리라 생각했던 – 근대화 과정에서 수많은 도시 직업이 나타났다 사라지곤 했는데,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는 경우는 드물었다. 그런데 최근에는 경제 사정 탓인지 ‘정서’ 탓인지 여러 직업이 소생(甦生)하고 있다. 뻔데기 장수, 뽑기 장수가 다시 모습을 드러낸 지는 꽤 오래 되었고, 최근에는 아이스케~키를 외치고 다니는 사람까지 보았다. 이러다 인력거꾼까지 재등장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 ‘물장수’도 다른 모습으로 다시 나타났다. 트럭이 물지게를, 플라스틱통이 양철통을 대체했지만, 가정집으로 사무실로 물을 배달하는 사람들은 지금도 예전 모습 그대로이다.


사진 10) 수도물은 서울 주민의 기본 식수가 된 지 20년도 채 안되어 불신의 대상이 되었다. 수도물을 안심하고 먹자는 캠페인이 여러 차례, 간헐적으로 벌어졌지만, 이제 수도물을 그대로 먹는 서울 사람은 거의 없다. 1995년 수도물 먹기 캠페인의 성격을 띠고 개최된 서울상수도기자재전.

  100여년 전의 서울 사람들은 서울 땅 아래에서 솟아 나오는 “우물 물”을 마셨다. 1908년부터 서울 앞을 흐르는 “한강 물”이 그를 대체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무엇보다도 “위생” 문제 때문이었다. 그 수도물이 우물물을 ‘완전히’ 구축(驅逐)하는 데까지는 70년 가까운 시간을 필요로 했다.

  그러나 수도물은 식수 구실을 한 지 30년도 지나지 않아 “위생”과 “건강”에 좋지 않은 물로 의심 받기 시작했다. 이제 서울 사람들은 여러가지 물을 마신다. 수도물을 재차 정수 처리한 물, 시골 지하수를 가공한 물, 그 물에 다시 화학처리나 약품처리를 한 물, 무슨 처리를 어떻게 했는지 모르지만 어쨌든 좋다는 물 – “생명의 물”이라고 광고하는 다양한 상품들이 있지만, 그걸 다 기억하기는 어렵다 – , 심지어 깊은 바다 속에서 퍼 올렸다는 물까지.

  거대 도시는 자기 영역 내의 물만으로는 결코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의 삶을 지탱해 줄 수 없다. 도시가 커지는만큼 식수원도 멀어지고 광대화, 입체화되지만, 더불어 위험도도 높아진다. 오염된 우물은 안 쓰면 그만이지만, 거대 상수원이 일단 오염되면 어쩔 도리가 없다. 더구나 지금 서울은 지하철과 인공 하천으로 인해 지하수가 고갈되어 비상시 대체 상수원을 찾을 수 없는 도시가 되어 있다. 재앙은 대개 눈앞에 닥치기 전까지는 보이지 않지만, 그 예고자는 언제나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