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이야기] 물장수(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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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이야기 29 – 물장수(1)

전우용(근대사 2분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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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난히 스산했던 1980년 그 해 가을, “달동네”라는 드라마가 TBC 전파를 타고 방영되기 시작하여 이듬해 가을 KBS 1TV에서 막을 내렸다. 드라마의 형식이나 내용에 대한 전문적인 평가와는 별도로, 이 드라마는 여러 면에서 놀라운 성공을 거두었다.

가장 두드러진 성공은 국어사전에 보통명사 하나를 추가한 것이다. 이 드라마가 방영될 때 아직 세상 구경조차 못한 오늘날의 젊은 세대도 대개 ‘달동네’라는 단어를 알고 있다. 두드러지지는 않지만 이 드라마의 더 심층적이고 근본적인 성공은 ‘산동네’에 고착(固着)되어 있던 대중적 이미지를 극적으로 반전시켰던 데에 있다.

  산동네가 고단한 삶에 찌들어 세상을 온통 불평불만 거리로 보는 사람들이 사는 동네였던 데 반해, 달동네는 이름 한 자만 다를 뿐 실상은 같은 동네였음에도, 이웃간에 정이 남아 있고 서로 이해하며 돕는 사람들이 오순도순 모여 사는 동네였다.

  아마도 산동네를 달동네로 바꾼 절묘한 레토릭 뒤에는 ‘불령(不逞)’의 뒤를 ‘불온(不穩)’이 이은 시대, 광주의 ‘사태’와 반정부 ‘모의’가 모두 불평분자들에 의해 촉발되고 격화되었다는 주장이 일방적으로 통용되던 시대, 그래서 “불만 있냐?”가 일종의 협박으로 통하던 시대가 바위산처럼 버티고 있었을 것이다.


사진 1) 1982년의 신당동 달동네. 산동네 또는 판자촌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던 동네들이 1980년 이후 ‘달동네’라는 이름으로 통칭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달라진 것은 이름 뿐, 환경은 그대로였다. 1980년경에는 전기나 수도 시설, 교통편도 그럭저럭 갖추어졌지만, 심각한 불편을 면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달동네”의 나름대로 아름답고 운치 있는 이미지와 ‘산동네’의 너저분하고 힘겨운 실상은 드라마나 영화에 일반적으로 허용되는 정도 이상의 – 하긴 오늘날의 CG 테그놀로지는 가상 현실과 실제 현실의 명백한 차이조차 무력화시키고 있으니, ‘허용치’라는 말이 애당초 가능하지 않을 듯도 하다 – 차이가 있었다.

  6.25 전쟁 이후 서울 인구는 하루가 다르게 늘어 갔다. 하룻밤 자고 나면 없던 집이 생겼고, 몇 일 지나지 않아 집들은 마을을 이루었다. 세계사적으로도 유례를 찾기 어려운 도시 서울의 대팽창은 당시 도시행정이 범상했던 비상했던 간에 그 능력 범위를 ‘아주 훌쩍’ 뛰어 넘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미 서울은 수백년 전부터 포화상태의 도시였기 때문에 집이 있을 만한 곳이 비어 있는 채로 남아 있는 경우는 없었다. 집 짓기 곤란한 곳, 집 지어서는 안되는 곳이 집터가 되고 마을이 되는 상황에서 행정 서비스 운운하는 자체가 사치였다. 새로 만들어진 ‘산동네’에는 도로나 전기시설은 말할 것도 없고 생명 유지에 절대적인 ‘물’ 조차 제대로 공급될 수 없었다.


사진 2) 1993년 경복궁에서 발견된 우물지. 식수원은 인간이 생존하기 위한 절대적 필요조건이다. 궁궐을 지을 때에도 마을을 만들 때에도 먼저 식수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그 점을 미처 생각지 못했기 때문일까. 이 우물 유적은 새삼스러울 정도로 큰 관심을 끌었다.

  그 시절 산동네 사람들은 집 지을 수 없는 곳에 집 지은 죄로 마실 수 없는 물도 마셔야 했다. 내가 어릴 적 살던 한강변 산동네 역시 그렇게 만들어진 마을 중 하나였다. 그 곳은 본래 조선 시대 이래 묘지로 쓰이던 야산이었는데, 6.25 전쟁 이후 정부가 전상병(戰傷兵)들을 위한 ‘복지 대책’으로 덩어리 채 – 필지를 구획하지 않은 채 – 나누어줌으로써 마을이 된 곳이었다.

  그래서 이름도 상이용사촌(傷痍勇士村)이었다. ‘다친 사람’들이 ‘죽은 사람’들의 집자리를 빼앗아 차고 앉은 셈인데, 이런 경우에는 풍수(風水)를 따지는 것도 바보짓이다. 그런 마당에 다른 조건이나 형편을 돌아볼 여유가 있을 리 없었다.

  판자조각 따위로 비바람을 간신히 막을 정도의 ‘집’을 짓는 일이 먼저였고, 나머지는 ‘다음’에 – 우선은 ‘급한대로’ 미봉하고 나중 일은 그 때 가서 생각하자는 식의 한국적 개발지상주의는 이런 사회적 토양에 단단히 뿌리를 내릴 수 있었다 – , “형편 보아 가며‘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아무리 피폐한 전후(戰後) 살림이고, 마을의 가장(家長) 대다수가 거동이 불편한 사람들이었다 할지라도, ’물‘은 마셔야 했다. 그들은 부득이 무덤으로 가득 차 있던 야산 꼭대기 바로 아래쪽, 시체 썩은 물이 고여 있을 지도 모르는 곳에 우물을 팠다.


사진 3) 19세기 말의 홍제원. 관영 여관이었던 각 원(院)에도 우물은 필수 시설이었다. 본건물 바로 우측에 지붕을 해 씌운 우물이 보인다.

  우리 가족이 상경(上京)해서 처음 그 마을로 들어갔을 때에는 산동네이기는 하지만 어느 정도 도시 마을 꼴이 갖추어져 있었고, 그 우물은 이미 마른 지 오래된 상태였다. 내 기억 속의 그 우물은 동네 아저씨들이 여름철 ‘개 잡을 때’나 꼬마 아이들이 숨바꼭질 놀이할 때 사용하던 곳으로만 남아 있다.

  나야 물론 꼬마 아이의 일원으로 그 우물을 이용했는데, 다만 본래 무덤이 있던 야산에 만든 우물이어서인지, 아니면 그 우물가에서 죽어간 숱한 개 때문인지, 그도 저도 아니면 우물에 일반적으로 달라 붙어 있던 으시시한 이미지 – 근대초기까지, 문학작품에서건 현실에서건 한국인들은 자살 장소로 자주 우물을 택하곤 했다 – 때문인지, 밤이면 귀신이 나온다는 이야기가 있어 저녁 무렵에는 이 우물가에서 놀지 않았다.


사진 4) 경희궁지 안의 용비천. 우물물 외에 자연 샘을 활용하는 것도 식수 문제 해결의 한 방편이었다. 궁궐 뿐 아니라 산자락 가까운 곳에 있는 민가에서도 계곡수를 흔히 이용했을 것이다.

  내가 그 동네에 살던 무렵에는 수돗물은 그럭저럭 나오는 편이었지만 말 그대로 그럭저럭이어서 물이 끊기는 경우가 잦았다. 그러면 가끔씩 급수차(汲水車)가 올라오곤 했는데, 그 때에는 온 동네 부녀자와 아이들이 ‘빠께쓰’ – 서양의 ‘양(洋)’과 물동이의 ‘동이’를 합친 ‘양동이’라는 합성어는 나중에야 만들어졌다 – 를 들고 나와 급수차 앞에 길게 늘어섰다.

  나 역시 여남은 살 무렵부터 물이 가득 든 작은 빠께쓰를 들어 날라야 했는데, 그 일이 녹녹치는 않았다. 급수차 앞에서는 분명히 물을 가득 채운 빠께쓰였지만, 집에 돌아왔을 때에는 대개 그 안에 물이 반 정도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어린 마음에도 가벼워진 빠께쓰가 즐겁기 보다는 흘러 버린 물이 아까워 속이 상했었다.
  물은 도시의 크기를 규정하는 여러 요소 중에서도 가장 일차적인 요소이다. 사람들에게 먹고 씻을 물을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없는 곳에는 결코 대도시가 만들어질 수 없다. 대도시는 커녕 군대가 일시 주둔하는 곳에도 물은 반드시 있어야 했다.

  신라 시대 호암산(虎岩山) – 서울 금천구 시흥동에 있다 – 꼭대기에 산성을 쌓으면서 거대한 우물 – 한우물 – 을 만들어 놓은 것이나 제갈량이 울며 마속(馬謖)을 참(斬)한 것이 모두 ‘물’ 때문이었다. 상수도가 없었다면 로마도 없었다.

  서울을 비롯하여 한반도에 만들어졌던 중세 이전의 대도시들은 다행히 별도의 상수도 시설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우리나라가 지금은 비록 ‘물부족 국가’이지만, 예전에는 금수강산 어디에서나 맑은 물을 충분히 얻을 수 있었다.


사진 5) 우물가. 김홍도 그림.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조선 후기까지도 물 긷고 운반하는 일은 전적으로 ‘여자’의 몫이었다. 호방한 선달 차림으로 물을 마시는 남자는 바가지에 풀잎 띄워 건네주는 젊은 아낙에 대한 ‘개국설화’의 한 장면을 흉내내는 듯 하다. 물 긷는 두레박은 나무통이고 물 옮기는 물통은 질그릇 = 동이이다.

  화강암반 위로 흐르는 물이나 그 아래 지층을 흐르는 지하수는 석회암이나 그밖의 바위 사이로 흐르는 물 보다 맑고 깨끗하다. 화강암 투성이 땅에서 살아온 우리나라 사람들은 정교한 석조(石彫) 예술을 발전시키지 못한 대신 맑은 물은 풍부히 쓸 수 있었다.

  화강암 돌산들로 에워싸인 중세 서울에는 도처에 우물이 있었고 – 서울 재천도를 단행한 직후, 태종은 다섯집에 한 곳씩 우물을 파도록 했다. 이 지시가 그대로 이행되었다면 재천도 직후라는 시점을 감안해도 서울에는 2,000~3,000개의 우물이 있었을 것이다  – , 집 안 마당 한 귀퉁이에 우물을 만든 대가(大家)도 적지 않았다.

  서울의 우물은 로마의 상수도보다 나은 우수한 품질의 ‘상수(上水)’를 공급해 주었다. 오랫동안 서울은 ‘우물의 도시’였다. 20세기에 들어와 우물 사용자의 비중은 급격히 줄어들었지만, 그래도 1950년대까지는 새로 만들어지는 우물도 많았다.

  그러나 가까운 곳 어디에나 우물이 있었다고 해서 오늘날 수도꼭지 틀 듯이 쉽게 물을 얻을 수는 없었다. 땅 바닥 깊숙이 고여 있는 물을 길어 올려서는 동이에 담아 부엌이든 안방이든 사랑방이든 물을 필요로 하는 곳까지 옮기는 일이 필요했다.


사진 6) 19세기말의 명동성당 입구. 한 가운데 물동이를 이고 가는 여인네가 보인다. 당시 외국인들은 지게 진 남자와 물동이 인 여자를 특히 신기하게 보았는데, 이 운반문화가 한국인의 평균신장이나 정형회과적 질환에 미친 영향도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조선 중엽까지, 서울에서 물 길어 옮기는 일은 나무하는 일과 더불어 가장 중요한 노비 노동의 영역이었다 – 노(奴)는 땔나무를 운반하고 비(婢)는 물을 운반했다 – . 태종은 민무휼(閔無恤) 민무회(閔無悔) 형제의 노비를 모두 빼앗으면서도 나무하고 물긷는 노비만은 남겨 두었다.

  그 시대에는 양반이 직접 나무하고 물 긷는 일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으며, 그 탓에 양반 부녀가 ‘직접 물 긷는다’는 말은 주로 가난한 과부(寡婦)의 참상(慘狀)을 상징하는 말로 쓰였다. 사가(私家) 뿐 아니라 관청에서도 노비의 기본 임무는 나무하고 물긷는 일이었다.

  신수(薪水) – 땔나무와 물 – 는 중세 도시 생활을 지탱해 주는 핵심 물자였으며, 그 탓에 나중에는 관리들의 봉급을 신수비(薪水費)라 칭했다.

그런데 조선 후기나 말기 어느 시점에서인가 물 길어다 주는 일을 전문으로 하는 한 무리의 남자 운반 노동자, 속칭 ‘물장수’ 또는 ‘수상(水商)’이 출현했다. 물장수는 개항 이후 외국인의 카메라에 포착된 서울의 직업인 중에서 상당한 비중을 점하지만, 이상할 정도로 공식 기록에는 잘 나타나지 않는다. 그 탓에 지금으로서는 이 특이한 – 개항기 외국인의 눈으로 보았을 때 – 직업이 언제 처음 출현했는지를 알 도리가 없다. 이럴 때는 어쩔 수 없이 ‘역사적 상상력’을 동원하여 추정하는 수밖에.


사진 7) 19세기말 우물가의 물장수들. 나무 물통 두개를 물지게 양끝에 매달고 물을 길어 배달하는 물장수가 등장한 것은 18세기말에서 19세기초 사이로 추정된다. 물긷는 일이 애초 ‘천역(賤役)’으로 취급되어 왔을 뿐 아니라, 이 일이 본래 ‘여자의 일’이었기 때문에 물장수는 서울 주민 중에서도 가장 낮은 대우를 받았던 모양이다. 반상 구별의식이 크게 옅어진 1930년대에도 물장수에 대한 ‘하대(下待)’와 관련한 이런저런 분쟁이 끊이지 않았다.

  우선은 임진 병자의 양란(兩亂) 이후 서울 성내에 노비 인구가 급감하고 부역 체계가 바뀌었던 점을 꼽아야 할 터이다. 임진왜란 당시 서울 노비들 스스로가 장례원(掌隸院)의 노비 문서를 불태웠을 뿐 아니라, 다수가 전쟁 중에 도주했고, 남아 있었거나 돌아온 노비들 중 일부는 훈련도감 등의 군대에서 새 일거리를 얻었다.

  물론 물 긷는 일은 주로 비녀(婢女)들 몫이었기 때문에 이런 사정이 당장 물 공급 체계의 변화를 초래하지는 않았겠지만, 노비 수의 감소는 결국 노비가 담당하던 천역(賤役)을 양민(良民)에게 덤터기 씌우지 않을 수 없게끔 했다.

  또 전란 후 서울에 새로 입성한 사람들 중에는 지방 유민(流民)으로서 아무 일이든 가리지 않고 하는 사람들이 많았으니, 이들 돈 받고 남의 역(役)을 대신 지어 주는 사람들에게는 ‘역(役)’이 곧 ‘업(業)’이었다. 상전이 ‘시켜서’가 아니라 ‘돈 받고’ 물 길어다 주는 일이 낯설지 않은 분위기가 만들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사진 8) 물장수가 지고 있는 게의 멜대는 그대로이지만 물통은 양철통으로 바뀌었다. 양철통은 이후 그 크기에 따라 두레박, 물통, 물단지 등 다양한 용도로 쓰였다.

  둘째로는 인구 증가와 소비생활의 변화에 따라 ‘물사정’이 악화되었던 점을 들 수 있다. 앞서 “똥물, 똥개”에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18세기 초반에는 도성내 간선 하수도였던 개천이 갑작스럽게 폐색(閉塞)되었다.

  인구 증가에 따른 오물투기(汚物投棄)의 증가, 목재 남벌(濫伐)에 따른 근교 산림의 황폐화, 농업지대 확장에 따른 배수 기능의 약화가 동시에 작용하여 개천의 폐색과 오염을 초래했고, 이는 우기(雨期)의 범람으로 이어졌다. 그 결과 상당수의 도심부 우물에도 개천의 오물이 역류하여 흘러들었을 것이다.

  18세기말 준천(濬川)의 시행으로 범람은 멈추었지만, 일단 오염되었던 우물이 쉬 정화(淨化)될 수는 없었다. 가까운 우물을 쓸 수 없게 된 사람들은 더 먼 곳에 있는 우물을 찾아야 했고, 그런만큼 물동이 하나 머리에 달랑 얹고 종종 걸음으로 왕래할 수밖에 없었던 여자들에게 물 긷는 일은 ‘고역(苦役)’ 중의 고역이 되어 버렸다. 이제 그 일은 ‘남자의 일’로 바뀌어야 마땅했다.


사진 9) 나무 물통의 크기는 ‘관습’에 의해 규정되었지만, 기본적으로는 만드는 사람 마음에 달려 있었다.

셋째로는 ‘질병의 세계화’와 관련하여 19세기 중반부터 조선이 콜레라의 침습(侵襲)을 겪기 시작했던 사정을 고려해야 한다. 1492년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은 수만년간 서로 격절(隔絶)된 채 다른 세계에서 살아왔던 인간 집단 사이에 교류의 통로를 열었다. 이후 범지구적 차원에서 인간과 물자의 교류가 확대되었는데, 그 당연한 결과로 세균과 질병 역시 함께 이동하였다.

  잘 알려진 대로 16세기 신대륙의 원주민 인구 격감은 주로 유럽에서 전파된 천연두에 말미암은 것이었다. 콜레라 역시 19세기초까지는 인도 주변에 한정된 질병이었으나 영국인을 매개로 세계 도처로 확산되었다.

  조선에 콜레라가 처음 침투한 것은 1821년으로 추정되는데, 이 질병은 그 이전까지 반복적으로 발생해 왔던 역병들과 일정한 균형상태를 이루었던 조선 사회를 크게 동요시켰다. 당시 사람들이 이 치명적인 역병(疫病)의 원인을 알 지는 못했지만, 경험은 지식의 중요 원천이다. 사람들은 역병을 거듭 겪으면서 이윽고 이 질병이 ‘물’과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것이고 그런 만큼 ‘깨끗한 물’에 대한 수요도 늘어났을 것이다.


사진 10) 1915년 조선물산공진회 당시 경복궁내에 설치된 미국 스탠다드 석유회사의 광고탑. 개항 이후 일제 강점기까지 록펠러의 스탄다드 석유회사는 한국에서 소비되는 석유의 대부분을 공급했다. 이 회사는 그 후 셸, 텍사코 등 여러 회사로 분할되었는데, 분할된 상태에서도 지금껏 세계 석유시장을 지배하고 있다.

  이런 사정에 비추어, 나는 서울에 전업적 물장수들이 등장한 것은 18세기말에서 19세기초 사이였다고 본다. 20세기 초에 그들의 수는 서울에서만 1,000여명을 넘어섰다. 물장수 사진이 특별히 많이 남아 있는 것은, 그들이 외국인의 눈에 ‘희한한 존재’로 비쳤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 수 자체가 많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데 조선 시대와 대한제국 시대의 모든 ‘영세상인’들이 그러했듯이 이들 물장수 역시 ‘독립 자영업자’는 아니었다. 객주에 예속된 선상(船商)이나 행상(行商)이 그랬던 것처럼 수상(水商) 역시 처음에는 남의 부탁을 받고 물지게를 지기 시작했을 터이지만, ‘물 받아 먹는’ 집이 늘어나고 ‘물 파는’ 일이 ‘이문(利文) 남는 일’이 되면서 어느 사이엔가 서울 골목골목은 ‘급수권(汲水圈)’으로 분할되어 버렸다. 돈 있고 권세 있는 사람들이 급수권(汲水圈)을 사들이거나 임의로 설정하여 물장수들을 지배했다.

  물장수들은 가가호호에서 징수한 물값의 일부를 ‘물주인’ – 내가 임의로 만든 표현이다. 다른 물종들처럼 물에도 주인(主人)이 있었겠으나, 20세기 사료(史料)에는 ‘자본인’이라는 근대적이고 세련된 용어로 표현되어 있다 – 들에게 분세(分稅)로 내야 했다.

  물장수가 지게 단위로 물값을 받았는지 월정액(月定額)으로 받았는지는 알 수 없다. 아마도 한 집에 한 번씩, 하루 두 통의 물을 매일 배달했던 듯 한데, 이 경우 지게 단위든 월정액이든 큰 차이는 없었을 것이다. 다만 물장수마다 사용하는 물통의 크기가 달랐을 것은 분명하다.

  도량형(度量衡) 문제는 개항 이후 오랫동안 조선 정부와 외국 사이 ‘통상 마찰’의 핵심에 있었지만, 결국은 제대로 해결되지 못했다. 1880년대 개항장의 ‘두형균평회사(斗衡均平會社)’도, 대한제국 시절의 평식원(平式院)도 도량형 통일을 빌미로 장사꾼들 등치는 일을 주로 했을 뿐, 두승(斗升)을 통일하는 데에는 실패했다.

  그렇다고 이를 전근대적 성격으로 몰아부쳐서는 곤란하다. ‘믿을 수 있는 저울’을 모토로 디지탈 전자 저울이 나온 것이 이제 겨우 20여년이고, 아직도 횟집이나 재래시장에서는 기계식 저울로 대충 무게를 다는 일이 비일비재하니까.

  저울눈과 됫박 속이는 기술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아주 오랫동안 장사꾼의 ‘기본 소양’에 속했다. 다만 물은 무색투명하기 때문에 물통의 크기에 장난을 칠 수는 있었으되 담고 따르는 과정에서 속임수를 쓸 수는 없었다.


사진 11) 양철 석유통으로 바뀐 물장수의 물통. 1890년대.

그런데 개항 이후 얼마 되지 않아 물장수들로서는 ‘본의 아니게’, 물통 규격을 통일해야 하는 일이 벌어졌다. 개항 직후부터 미국산 석유가 수입되기 시작했는데, 석유는 한국인의 등화용(燈火用) 연료를 바꾸어 놓고 착유용(窄油用) 작물 생산을 격감시켰을 뿐 아니라, 그 용기(容器)만으로도 한국인의 일상생활에 근본적이고 불가역적(不可逆的)인 변화를 야기했다.

  양철 석유통은 이른바 ‘깡통’ – CAN의 일본식 발음 ‘깡’과 한자 ‘통(桶)’의 합성어이다 – 시대의 서막을 열었다. 그 후로 거의 한 세기 가량, 한국인들은 됫박이나 두레박 보다 빈 깡통에 더 익숙한 삶을 이어왔고, 그를 ‘중간재’로 하여 숱한 물건을 만들어 썼다.

  해방 직후에는 심지어 깡통으로 버스 차체까지 만들었다. 이 석유 깡통에 최초로 접근한 사람들이 바로 물장수들이었다. 양철 석유통은 그 때까지 물장수들이 쓰던 나무통보다 가벼운 데다가 물이 새지도 않았으며 수명이 길었고 규격 또한 일정했다.

  물장수의 물지게에 매달려 가가호호를 돌아다닌 양철 석유통은 후일 새로운 도량형 ‘표준’ – 공교롭게도 당시 조선에 수입되던 석유는 대부분 미국 ‘스탠다드’ 석유회사 제품이었다. ‘표준’ 회사 석유통이 물통의 ‘표준’이 된 것이다 – 이 뿌리내릴 토양이 되었다.


사진 12) 1950년대 공용 수도꼭지에서 물을 받아 가는 ‘여자 아이’들. 일제 말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물긷는 일은 ‘여자아이’의 일로 다시 바뀌었다. 물표를 내고 수도에서 물 긷는 방식은 이 땅에 최초로 상수도가 도입되던 무렵 그대로이다. 한영수 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