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이야기] “명성황후조난지지”의 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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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조난지지”의 평화

홍순민(중세사 2분과)

1895년(고종 32년) 8월 20일 새벽, 일본 공사 미우라(三浦梧樓)가 이끄는 일본 공사관 직원, 일본군, 일본 낭인, 조선 신식군대인 훈련대 등이 작전을 개시하였다. 작전명 “여우사냥”. 그들은 경복궁에 난입하여 이 건물 저 건물을 모조리 뒤진 끝에 경복궁의 뒤쪽 끝 건청궁의 한 건물인 곤령합(坤寧閤)에서 명성왕후를 찾아내어 찔러 죽였다. 그리고는 그 시신을 그 옆의 녹산(鹿山)으로 끌고 가 석유를 끼얹어 태우고는 그 뼈를 그 앞 연못에 던져 버렸다. 이른바 “을미사변(乙未事變)”, 다시 말해서 명성왕후 시해사건이다.

1894년 조선에 대해 독점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는 문제를 놓고 청나라와 일본이 벌인 한 판 전쟁에서 예상을 뒤엎고 일본이 이겼다. 일본은 당연히 조선을 좌지우지하려 들었다. 이에 대해 이번에는 국제적으로는 러시아를 중심으로 하는 서양 각국이, 국내에서는 명성왕후(明成王后)가 중심이 되어 제동을 걸었다. 이러한 상황 전개를 바꾸어보려 했던 일본측의 비상 수단이 명성왕후 시해사건이다.

지금 우리가 보는 저 누런 건물, 건청궁이 헐려 없어진 자리에 들어선 전통공예미술관 건물의 동편 그늘에 비석이 둘 서 있다. 들어가면서 먼저 보이는 것이 명성황후순국숭모비(明成皇后殉國崇慕碑). 명성황후-대한제국이 서면서 명성왕후에서 명성황후로 격상된 이름-을 걸출한 여걸로 다시 세우려는 의도로 세운 비석이다. 현대식으로 큼지막하게 만든 비석의 뒷면에는 그것을 세우는 데 공을 세웠다는 사람들 이름이 주욱 새겨져 있다. 아무리 보아도 여기 한 자리 끼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이름들, 친일 행적이 거론되는 모모하는 인사들의 이름이 꽤 눈에 띈다.

더 안쪽에 있는 작은 비석에는 “明成皇后遭難之地(명성황후조난지지)”라고 한자로 쓰여 있다. 이승만 대통령의 글씨이다. 그 앞 작은 건물에는 일본인들이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장면과 그 시신을 불에 태우는 장면을 그린 기록화가 두 점 모셔져 있다. 글쎄 이런 글씨나 그림 자체가 잘 된 것인지 어떤지 눈이 짧은 나로서는 잘 모르겠다. 다만 흔히 그런 글씨나 기록화가 그렇듯이 이 글씨, 그림에서도 아, 그렇구나 그랬겠구나 하는 사실 확인 외에 별다른 감동을 받지는 못한다.

왜 그럴까? 나만 그런가? 유심히 둘러보아도 이곳에 와 보는 이가 매우 드물다. 사생대회나 백일장에 동원된 학생들, 김밥을 먹는 어린이들, 다리쉼을 하는 노인들, 데이트하는 젊은이들도 저 만큼 향원지 주위에만 맴돌 뿐이다. 근정전, 경회루 일대에서는 적지아니 눈에 띄는 외국인 관광객들 역시 이곳에서는 만나보기 어렵다. 그나마 혼자 아니면 둘이 짝을 이루어 다니는 서양 관광객들은 간간히 나타나지만, 일본인 관광객들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대개는 이런 곳에 이런 것이 있는 줄조차 모르기 때문이다. 또 드물게나마 와서 보는 이들도 그다지 큰 감동을 받는 것같은 눈치는 아니다.

이 일대는 풍경은 늘 이렇듯 적막하고, 평화롭다. 그러나 그 평화는 웬지 무언가가 빠져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지울 수 없게 한다. 무엇이 빠졌을까? 명성황후의 원혼이 떠도는 이곳을 덮고 있는 저 평화는 어디서 오는 것인가. 치욕적인 사실을 망각한 데서 오는 평화. 그 평화는 긴장과 각성의 결여에서 태어난 것이고, 그것으로부터 무지와 무관심이 대물림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인근의 군부대를 철수하고, 앞으로 이곳까지도 옛건물을 복원한다는 계획은 수립되어 있다지만, 그 바탕에 어떻게 복원을 한다는 것인지, 왜 복원을 한다는 것인지 장기적인 정책 의지와 역사 인식이 얼마나 든든하게 깔려 있는지… 쉽게 납득할 수 있는 설명을 찾아듣기 어렵다. 우리 스스로가 이러니 외국 관광객들에게 이곳을 둘러보라고, 특히 일본 관광객들이 이곳에 들러 “을미사변”, 더 나아가서는 당신네들 식민통치의 실상을 되새기고 반성과 사과를 해보시라고 말 할 수 있는가? 경복궁 답사의 마지막 장면은 이곳 궁궐이 역사의 현장임을 일깨우며,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줄곧 무거운 질문을 던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