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이야기] 동궐(東闕) : 창덕궁과 창경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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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궐(東闕) : 창덕궁과 창경궁

홍순민(중세사 2분과)

창덕궁(昌德宮)을 흔히 비원으로 부르는 것은 잘못된 것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전혀 틀렸다고 하기에는 좀 주저되는 바가 없지 않다. 왜냐하면 “비원”이란 창덕궁의 후원을 가리키는 것이기에 서로 연관이 있다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창덕궁을 창경궁(昌慶宮)으로 아는 것은 영락없는 잘못이다. 그럼에도 창덕궁과 창경궁을 혼동하는 예가 아주 흔하다. 학생들을 창덕궁으로 모이라고 하면, 자신이 없는 학생들은 확실하게 찾아갈 요량으로 종로 3가역 쯤에서 택시를 탄다. 그러면 창덕궁이 아닌 창경궁으로 데려다 주는 경우가 적지 않다. 모르긴 몰라도 택시 기사께서도 창덕궁과 창경궁을 구별하지 못하고 가까운 창덕궁을 지나쳐 먼 창경궁으로 데려자 주는 과잉 친절을 베푼 것이리라. 택시 기사 분들도 이러하니 일반시민, 더구나 학생들이야 오죽하랴 싶다.

창덕궁과 창경궁은 엄연히 서로 다른 궁궐이다. 창덕궁은 1405년(태종 5)에 완공되었고, 창경궁은 1484년(성종 15)에 완공되었다. 두 궁궐은 원칙적으로는 서로 독립된 궁궐이지만 공간상으로는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붙어 있다. 또 그 남쪽으로는 종묘(宗廟)가 잇닿아 있다. 창덕궁과 창경궁, 종묘는 응봉―지금의 성균관대학교 뒷산에서 흘러내리는 산자락에 함께 몸을 비비며 안겨 있는 폭이다.

지금은 창덕궁과 창경궁 사이의 담장에 있는 문들이 모두 닫혀 있어 둘 사이의 관계가 잘 드러나지 않지만 옛날에는 이 문들을 통하여 서로 왕래하게 되어 있었으며, 두 궁궐은 뒷편의 후원―”비원”을 공유하고 있었다. 크게 보아서는 창덕궁과 창경궁은 하나의 궁궐로 활용되었고, 창경궁이 창덕궁에 부족한 생활 주거 공간을 보완하는 기능을 갖고 있었다. 그러므로 조선 후기에는 흔히 두 궁궐을 합쳐서 동궐(東闕)이라 불렀다.

창경궁은 지금은 창덕궁 정문 돈화문에서 동쪽으로 뚫린 길―율곡로를 따라 궁궐 담장을 에돌아 한 모퉁이를 돌아 가면 나타난다. 그러나 이 율곡로는 1920년대 후반 일제가 창덕궁·창경궁과 종묘를 갈라놓기 위하여 일부러 낸 길이다. 옛날에는 창덕궁에서 내부로 통하지 않고 밖으로, 정식으로 창경궁으로 가자면, 돈화문을 나와 파자교―오늘날의 단성사, 피카디리 극장 앞―를 건너 운종가를 따라 동쪽으로 종묘 정문 앞을 지나 배오개(梨峴)―오늘날의 종로4가 교차로―에서 왼편으로 꺾어 북쪽으로 지금의 창경궁로를 타고 주욱 올라가야 했다. 가다 보면 오른편으로 함춘원(含春苑)을 지나 경모궁(景慕宮)―오늘날의 서울대학교 병원―이 나오는데 그 맞은 편이 창경궁이었다.

창경궁의 정문은 홍화문(弘化門)이다. 경복궁의 정문 광화문이나 창덕궁의 정문 돈화문이 남향을 하고 있는 데 비해 홍화문은 동쪽을 바라보고 있다. 그렇게 홍화문이 동향을 한 이유는 꼬집어 말하기는 어려우나 우선 지형상 그렇게 되는 것이 자연스럽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응봉에서 흘러 내리던 산자락이 남쪽으로 벌린 곳에 창덕궁이 들어 앉아 있다면 그 한 갈래가 동쪽으로 머리를 돌린 곳에 넓은 터가 열려 있기 때문에 창경궁의 정전인 명정전과 정문 홍화문도 동쪽을 바라보게 된 듯하다. 또 다른 이유를 생각해 보자면 창경궁은 애초부터 제일의 공식 궁궐인 법궁(法宮)이나 제이의 공식 궁궐인 이궁(離宮)으로 지어진 것이 아니라, 이궁인 창덕궁을 보조할 목적으로 지은 궁궐이기 때문에 창덕궁에 기댄 형국을 취하여 동향으로 앉힌 것이 아닌가 추론해 볼 수 있겠다.

아무튼 창경궁은 어엿한 궁궐로서 조선시대 내내 그 면모를 지켜왔다. 그러던 것이 일제시기에 들어서서 왕이나 왕실가족이 사는 궁(宮)에서 온갖 동물들과 화초들이 들어앉아 구경거리를 제공하는 놀이터―원(苑)으로 전락하였다. 참으로 치욕적인 일이었다. 그 창경원이 1980년대 중반에야 다시 창경궁으로 돌아왔다. 이름을 되찾고 동물원을 내보내고 극히 일부나마 건물을 복원하였지만, 혹 우리가 여전히 창경원으로 부른다거나 혹 창덕궁과 구별조차 하지 못한다면 창경궁도 창덕궁도 섭섭하기가 이를 데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