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이야기] 돌아 온 흥화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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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 온 흥화문

홍순민(중세사 2분과)

광해군 말년 경덕궁―경희궁이 거의 완공될 무렵, 그 규모는 당시 법궁으로 쓰이던 창덕궁이나 창경궁, 그리고 이궁으로 짓고 있던 인경궁에 비해서는 상당히 작았다. 그러나 인조 이후 조선후기 내내 이궁으로 쓰이면서 자연히 궁궐로서 규모를 갖추어 나아갔다. 그러다가 고종 초년 경복궁이 중건되면서부터 왕이 임어(臨御)하지 않는 궁궐이 되었다. 그렇지만 고종황제가 경운궁(오늘날 흔히 덕수궁이라고 부르는 궁궐)에 계실 때인 1901년(광무 5년)에는 경운궁과 경희궁을 연결하기 위하여 오늘날 신문로를 넘어가는 구름다리―雲橋를 놓았던 사실로 미루어 볼 때 그 때는 경희궁이 아직 볼썽 사나운 빈터는 아니었고 대체로 궁궐로서 면모를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일제는 통감부 시절인 1907년(융희 1) 경희궁 자리에 일본인 자녀들이 다닐 통감부중학교를 세우기 시작하였다. 통감부중학교는 1910년 통감부가 조선총독부로 바뀌면서 조선총독부립중학교로 개칭되었고, 그것은 다시 1915년 경성중학교, 1925년 경기도로 관리자가 바뀌면서 경성공립중학교로 개칭되었다. 통감부중학교 부지를 조성하면서 지형이 높은 곳을 깎아 낮은 곳을 메꾸었다. 그 부지는 1910년 조선이 일제에 병합됨과 동시에 국유로 편입되었고, 1922년에는 그곳에 전매국 관사를 지으면서 2만 5천여 평이 떨어져 나갔고, 1927년에는 남쪽 도로에 면한 지역을 쪼개 팔기도 한 결과 1930년대 중반에는 4만여 평만이 남게 되었다.

이렇게 경희궁 자리에 일본인 학교가 들어서는 과정에서 경희궁의 전각들은 대부분 헐려 없어져 1910년 당시 남아있던 건물은 숭정전(崇政殿), 회상전(會祥殿), 흥정당(興政堂), 흥화문(興化門)과 회랑 일부, 황학정(黃鶴亭) 등 뿐이었다. 그 때까지 살아 있던 이 건물들의 운명도 그러나 일제의 마수 앞에서는 결코 순탄치 못하였다. 숭정전은 경희궁의 정전(正殿)이다. 말하자면 경복궁의 근정전, 창덕궁의 인정전, 창경궁의 명정전에 해당하는 건물로서 왕이 대소 신료들의 조하를 받던 곳이다. 그 숭정전이 일제 초기에는 일시 그곳에 세워진 중학교의 교실로 이용되다가 1926년 3월 조계사(曹谿寺)에 매각되었다.

회상전은 숭정전 동북쪽 옆으로 조금 낮은 자리에 있던 왕의 침전(寢殿)인데 숭정전과 마찬가지로 소학교 교실이나 교원양성소 교실, 기숙사 등으로 사용되다가 1928년 조계사에 팔려 주지의 거실이 되었다. 조계사란 일본 불교 종파인 조동종(曹洞宗)에 속하는 절이었다. 해방후 그 조계사 자리에 동국대학교가 들어서면서 지금 숭정전은 동국대학교의 정각원(正覺院)이라는 법당으로, 물론 법당 기능에 맞게 내부 모양이 크게 바뀐 채로 남아 있다. 대신 경희궁 터 본래의 자리에는 근년에 새로 승정전이 복원되었다. 어느 것을 숭정전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경희궁 건물들의 기구함을 가장 단적으로 드러내 보여주는 것이 경희궁의 정문인 흥화문이다. 흥화문은 원래 경희궁의 동남 모퉁이에서 운종가를 맞으면서 동쪽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그러던 것이 1915년 오늘날의 광화문 네거리에서 돈의문―서대문까지 신문로를 뚫으면서 그 도로를 바라보며 남향으로 돌아 앉았다가 1932년에 남산 자락인 춘무산(春畝山)의 박문사(博文寺)의 절문으로 팔려 갔다. 박문사란 이등박문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서 지은 절이다. 해방 후에는 그 박문사 터에 영빈관이 들어서고, 그것이 다시 신라호텔로 바뀌고 하면서 그 정문으로 남아 있었다. 그러던 흥화문이 1988년 드디어 다시 경희궁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돌아오기는 왔으나 제 자리는 이미 도로가 나고, 구세군 빌딩이 들어서고 하여 서쪽으로 자리를 바꾸어 서울시립미술관―옛 서울고등학교 본관으로 들어가는 자리에 남쪽을 바라보고 앉아 있다. 끝까지 편치 않은 흥화문의 처지가 애처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