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이야기] 도깨비시장, 돗떼기시장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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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이야기28 – 도깨비시장, 돗떼기시장 (2)

전우용(근대사 2분과)


남대문 밖의 칠패(七牌) – 현재의 봉래동 칠패길로 조선 후기 훈련도감 7패가 맡은 순라구역이었다 – 와 동대문 안쪽의 이현(梨峴) – 우리 말로 배오개(ㅣ모음 뒤의 ㄱ탈락), 서울 사투리로 배우개(ㅗ가 ㅜ로 바뀌는 현상 ; 삼촌 → 삼춘, 돈 → 둔 등)라 하는데 이 고개 이름의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문자 그대로 이 야트막한 고개 초입에 배(梨)나무가 많아 배고개가 되었다는 설, 이 고개에 식인 호랑이가 살아 100명이 모이기 전에는 넘을 수 없었기에 백(百)고개가 되었다는 설, 한강에서부터 중랑천을 거쳐 청계천까지 거슬러 올라 오는 뱃길의 종점이 이 언저리였기에 배(舟)고개가 되었다는 설 등이다.

  두번째 얘기는 산세(山勢)로 보아 허황되고, 세번째 얘기는 정조대 이 언저리에 주교사(舟橋司)가 만들어진 이후의 사적(事蹟)이 와전된 것이다 – 이 난장판이 된 것은 18세기부터였다. 19세기에는 서소문 밖에도 난장판이 하나 더 생겼다.

  이 무렵에는 본래 시전가였던 종루(鐘樓) 앞 거리에 이현(梨峴), 칠패(七牌)를 더하여 ‘도성삼대시(都城三大市)’라 하였는데(“경도잡지(京都雜誌)”), 그 탓에 18-19세기 서울에는 세 개의 시장만 있었던 것으로 취급하는 경우가 많으나, 대시(大市)라는 말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소시(小市)나 중시(中市)가 있고 나서야 대시(大市)가 있는 법이니, 이들 말고도 분명 여러 시장(市場)이 있었을 터이다.


사진 1) 1902년경의 창내장. 창내장이 서울의 중앙시장으로 확고한 지위를 차지하게 된 데에는 1901년의 흉작이 ‘기여’한 바 컸다. 쌀값이 뛰고 기근의 조짐이 보이자 내장원은 급급히 안남미 – 베트남 쌀 – 을 수입하여 이 시장을 통해 시중에 풀었다. 그 덕에 시장 상인들은 대목을 보았고, 도성민의 일상에서 시장이 점하는 비중도 커졌다.

  칠패든 배우개든 서소문 밖이든, 새로 만들어진 난장(亂場)은 모두 성문 주변에 있었다. 성문은 사람 뿐 아니라 물화(物貨)도 드나드는 곳이니 그 주변에 장(場)이 만들어진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여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남대문 옆에는 훈련도감이 있었고 동대문 옆에는 어영청이 있었다. 훈련도감 군병과 그 가족들은 남대문 주변, 지금의 봉래동이나 후암동, 갈월동, 남영동 일대에 모여 살았다.

  18세기 중엽의 어영청 주변은 개천(開川)이 수시로 범람하여 민가(民家)나 상업시설이 들어서기 어려운 곳이었기 때문에 영조대 준천(濬川)이 시행된 다음에야 택지로 조성되었다. 정조대 이 동네의 이름은 장용영계(壯勇營契)였는데, 이름으로 알 수 있듯이 주로 장용영 군병(軍兵)과 그 식솔들이 거주했다.

  광희문 주변, 지금의 광희동에서 왕십리에 이르는 지역도 역시 군병들의 집거지였다. 후일 경성직뉴회사 – 유명한 경성방직주식회사의 전신 – 가 만들어질 때, 누대에 걸쳐 이 일대에서 댓님이나 띠, 댕기를 만들어 팔던 군병들이 이에 합류했다. 바로 이들, 훈련도감과 어영청, 장용영 등 각 군영의 병졸들과 그 가족들이 부업으로 칠패와 이현 시장을 만들고 지켜내며 키워 왔던 것이다.

  여기에 도성 밖에서 채소를 재배하는 농민, 한강에서 물고기 잡는 어민들까지 합류하여 새벽녘에 왁자하게 난장(亂場) = 도깨비시장을 벌이고는 해 뜰 무렵 각자 제 일터로 돌아갔다. 점잖은 공식 기록은 이들 시장을 아침에만 열리는 시장이라 하여 조시(朝市)로 표현했다.


사진 2) 1920년대 창내장 안의 도자기 좌판. 창내장이 서울의 일용품 시장으로서 지위를 굳혀간 시기는 서울 주민 사이의 신분적 관계가 대대적으로 변동하는 시기와 맞물려 있었다. 예전같으면 노비나 겸종을 시켜 물건을 사 오게 했던 마나님들 중 일부가, 그리고 장 구경이라고는 할 수조차 없었던 아낙네들 다수가 부득이하게 시장에 나와서 물건을 팔거나 사야 했다. 이 때까지만 해도 시장에서 여성은 소수였지만 이윽고 시장 전체가 ‘여성의 공간’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남대문 바로 안쪽, 지금의 남대문시장 자리에도 도깨비 시장이 하나 있었다. 개항 이후 일본인들의 기록에는 남대문 조시(朝市)로 나오는데, 1900년경을 기점으로 그 역사가 300년이 되었다고 하니 여기에 도깨비시장이 생긴 것은 17세기 초의 일이었을 게다.

  이 자리에는 본래 상평창(常平倉)이 있었는데, 다 알다시피 상평창이란 곡가를 조절하기 위해 곡식을 사들이고 내다파는 일을 전문으로 하는 기관이다. 그러니 그 앞에서 공적인 상업거래가 이루어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 때의 상업거래는 곡물(穀物)에 국한된 것이었고 그 목적도 물가조절에 있었기 때문에 그 앞이 난장(亂場)이 되지는 않았다.

  1608년, 경기도에 대동법(大同法)이 실시되면서 상평창은 선혜청(宣惠廳) 창고로 바뀌었고, 그 앞에서 거래되는 물건의 종류도 많아졌다. 이때부터 선혜청 창고 앞이 도깨비시장으로 변한 것이다. 오늘날 남창동, 북창동의 지명은 이 창고에서 유래했다.

  대동법이 전국으로 확대 시행되고, 선혜청의 재정규모가 확대되면서 이 시장의 거래규모도 갈수록 커졌다. 이 시장은 칠패 시장과 연속해 있었지만 성 안에 있었기 때문에, 1882년 이후 서울이 개시장(開市場) – 항구에 있으면 개항장이고 내륙에 있으면 개시장이다. 성남 모란시장 같은 ‘개 파는 시장’이 아니다 – 이 되자 한 번 더 확장될 기회를 얻었다. 중국인과 일본인들이 이 시장의 새로운 상인이자 고객으로 추가되었기 때문이다.

  1880년대 말경에는 이른 새벽, 성문이 열리면 한밤중부터 기다리던 사람들과 우마(牛馬)떼가 노도(怒濤)와 같은 기세로 몰려 들어가 이 시장에 짐을 푸는 정경이 매일같이 연출되었다.


사진 3) 1930년대의 창내장. 일명 신창리 시장이라고도 했다. 도자기, 그릇, 항아리, 요강 등이 장바닥에 널려 있다. 장사꾼과 고객이 잘 구분되지는 않지만 어쨌든 대다수가 여성이다.

  1894년 갑오개혁의 일환으로 조세제도(租稅制度)가 완전히 바뀌었다. 현물 납세는 사라지고 모든 세금을 돈으로 내게 되었다. 세금으로 현물을 받아 저장하던 선혜청 창고는 쓸모를 잃었다. 그 앞의 도깨비시장이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아무래도 조금은 썰렁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 퇴세(頹勢)를 일거에 만회할 수 있도록 해 준 것이 누차 얘기한 바 1896년 이후의 서울 도시개조 사업 = 황도(皇都) 건설사업이었다.


사진 4) 1910년대의 창내장. 수많은 인파가 몰려 들어 말 그대로 ‘돗떼기 시장’의 진수를 보여 주고 있다.

  고종이 당시의 재정형편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의 인력과 물력을 쏟아 부어 이 사업을 추진한 것은, 한편으로 서울에 근대 문명국가의 ‘수도(首都)’다운 면모를 부여함으로써 대한제국을 ‘문명국들로만 구성된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끌어 올리기 위함이었고, 다른 한편으로 이 도시 위에 황제의 신성한 권위를 한껏 드러냄으로써 백성들의 무한한 충성심을 불러 일으키기 위함이었다.

  이밖에도 한 가지 중요한 이유가 더 있었다. 서울 도시개조사업이 시작되기 반년쯤 전, 1895년 말에 ‘단발령(斷髮令)’이 공포되었다. 전국의 숱한 유림(儒林)이 떨쳐 일어나고, 머리카락 잘릴 것을 걱정한 성밖 농민과 상인들이 성 안으로 들어오지 않아 서울 물가가 폭등하는 사태가 빚어졌지만, 당시 정부는 문명한 ‘위생(衛生)’의 이름으로 이를 강행했다.

  19세기 중반부터 이 땅에 침입하기 시작한 콜레라는 곧 염병(染病)으로부터 ‘역병(疫病)의 왕좌(王座)’를 빼앗고는 매년 수많은 인명을 앗아갔다. 1895년 여름의 콜레라는 특히 심하여 전국적으로 수만명, 서울에서만 만 명 가까운 사망자를 냈다.

  이 역병은 깨끗한 물, 깨끗한 몸은 단순한 ‘문명의 상징’이 아니라 ‘생명의 전제’라는 사실을 명료하게 – 비록 일부 개명된 사람들에 국한되는 것이었지만 – 가르쳐 주었다. 단발령은 이 새로운 위생관을 무기로 하여 수천년 묵은 관습을 타파하려 한 것이었다. 마찬가지로 1896년 도로 수치(修治) 사업의 배후에도 ‘근대적 위생관’이 은밀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사진 5) 1910년경의 창내장. 창내장 고사(庫舍)는 애초 선혜청 창고 건물을 그대로 썼으나 건물이 퇴락하거나 소실되는 경우가 생겨 그 때마다 재건축되었다. 사진의 이층 상점은 1900년경에 신축된 것으로 보이는데, 현재에도 남대문 옆에는 이 때 지어진 2층 건물 두 채가 외벽에 타일만 붙인 채 남아 있다. 그런데 소문에 따르면 그 건물들이 곧 헐릴 것이라고 한다. 하기야 내가 끌고 다닌 답사생 중에도 그 낡은 건물을 빨리 헐어야 ‘창피하지 않다’고 하는 사람이 있었으니, 이 도시 문화행정가들의 단견과 천박성을 마냥 탓할 수만은 없다.

  이 때부터 시작된 도로 수치(修治) 및 신설 사업은 종로 남대문로 등 시내 간선도로 좌우에 늘어서 있던 가가(假家)를 철거하고 노폭(路幅)을 넓히는 데 머물지 않았다. 간선도로 좌우의 배수로를 정비하여 하수처리 기능을 확충하는 일도 병행되었다. 쓸 데 없게 된 선혜청 창고 자리를 서울 최초의 ‘도시상설시장’으로 개조하는 일도 그 일환이었다.

  1896년말, 가가 철거로 인해 갈 곳을 잃은 종로와 남대문로의 행상과 좌고(坐賈)들을 선혜청 창고 자리로 몰아넣고 이곳을 도시상설시장으로 만드는 방안이 마련되었다. 노점상들이 구석에 치우친 창고 자리로 들어가지 않으려 한 것은 근래 청계천 주변 노점상들이 동대문운동장에 들어가기를 거부했던 사례에 비추어 충분히 이해가 간다. 결국 순검을 시켜 이들을 억지로 밀어 넣는 수밖에 없었다.

  다음해인 1897년 1월, 이 나라 최초의 도시 상설시장이자 ‘중앙시장’이 이 자리에서 문을 열었다. 오늘날 서울 재래시장의 원조이자 대표격인 남대문시장이 첫 출범한 것이다. 17세기 유럽 각도시에서 ‘새로운 위생관’의 직접적 영향 하에 ‘중앙시장’이 출현한 데 비추어 보면 2세기 이상 늦은 것이지만, 그 시차(時差)를 곧바로 ‘문명의 격차’로 생각할 필요까지는 없다.

  그 곳과 이 곳은 도시 환경 자체가 달랐으니까. 다만 한 가지, 도시 곳곳에서 잠깐씩 섰다 사라졌다 하는 도깨비시장들 보다는 하루 종일 한 곳에 버티고 있는 ‘상설시장’이 ‘위생상’에는 분명 효과적이었다. 공문서에 선혜청 창내장(倉內場) – 창고 안에 마련된 장 – 으로 기록된 이 시장에는 개설 직후부터 소제부(掃除夫)가 배치되었다.


사진 6) 1920년대의 광장시장. 광장시장은 1905년, 개항 직후부터 서울 상계(商界)를 좌지우지해 왔던 거물 김종한(金宗漢)과 경무사 신태휴(申泰休)가 주도하고 여기에 박승직(朴承稷) 등 유력상인이 참가하여 설립한 광장회사가 경영한 시장이다. 처음에는 친위대 영문 옆, 현재 어영청터라는 표석이 있는 자리에 몇 개의 고사(庫舍)를 짓고 영업을 시작하였으나 그 자리를 일본군이 접수함에 따라 동별영 터로 이전하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많은 사람들이 – 이런 걸 궁금해 하는 사람도 거의 없지만 – 이 땅 최초의 도시 상설시장은 ‘광장시장’이라고 알고 있다. 광장시장주식회사가 그렇게 주장하는 것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남대문시장 상인들조차 거개는 자기들 시장이 ‘가장 역사가 오랜’ 시장임을 모르고 있다. 남대문시장은 그 흔한 100주년 축제 한 번 못하고 1997년 1월 – 이 때만 해도 대다수 한국인들은 IMF가 뭔지 모르고 있었다 – 을 보내 버렸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남대문시장이 주인 없는 시장이라 그런 면도 있었을 터이지만, 때로는 역사학자의 실수가 역사 자체를 뒤바꾸는 일도 있다. 그런 점에서 남대문시장은 역사학자의 쥐꼬리만한 자존심 – 드문 경우지만 나도 때로는 중요하다! – 과도 관계가 있다.

  사회경제사학계의 원로인 고승제 교수는 오래전 남대문시장에 대해 쓰면서, 노인들의 증언을 토대로 이 시장의 옛 이름이 ‘신창안장’이었음을 밝혔다. 그리고 그 뒤에 불필요한 ‘해석’을 덧붙였다. 이름에 ‘신(新)’자가 있는 것으로 보아 광장시장보다 나중에, ‘새로’ 만들어진 것임이 분명하다고.

  그런데 세종 때 옮겨진 서대문은 그 이후로 지금까지 쭉 ‘새문’이어서 신문로(新門路)라는 이름이나 새문안교회라는 이름이 모두 여기에서 나왔다. 새 것은 이렇게 ‘금방 만든 것’만이 아니라 옛날에 만들어졌어도 그 때 ‘새로’ 만들어지고 뒤에 다른 것으로 대체되지 않은 것을 지칭하기도 한다. 새 것이 금방 헌 것으로 바뀌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때로는 새 것인 채로 수백년을 버티는 경우도 있는 법이다.

  신창(新倉)이라는 이름은 아마도 상평창이 선혜창으로 바뀔 때 붙었던 모양이어서 선혜창을 별칭하는 용어로 사용되어 왔는데, 고승제 교수는 미처 그 점까지는 몰랐던가 보다. 그 탓에 선혜청 창내장은 서울 안 최초의 도시상설시장이라는 ‘영예(榮譽)’를 속절 없이 광장시장에 빼앗기고 말았다.


사진 7) 1900년경의 남대문정거장. 1925년 경성역 – 현재의 서울역 – 이 만들어지기 전까지, 남대문정거장은 경운궁 뒤의 경성역에 비해 초라했고, 주변은 황량한 느낌조차 주었다. 러일전쟁 기간 중 경부 경의철도가 속성공사로 부설되고, 일본인들이 자신들의 거류지 – 충무로 일대 – 에서 가까운 이 역을 중앙역으로 택하면서 역세(驛勢)가 비약적으로 신장되었다. 더불어 그 역에 가까운 창내장의 상권도 확장되었는데, 일본인들은 이 점을 못마땅하게 여겨 창내장을 다른 곳으로 옮기도록 압력을 가했다.

  어찌 되었든 선혜청 창내장은 문을 열자마자 옛 종로와 남대문로 가가(假家)의 상인들, 남대문 조시(朝市)에 출입하던 상인들, 인근 칠패 시장의 상인들 일부까지 끌어 모으면서 일거에 장안의 중앙시장으로 떠올랐다.

  창내장은 쌀과 잡곡, 채소, 과일, 어물, 과자 등 일상 식료품을 위주로 한 – 상대적으로 부패하기 쉽고, 그래서 위생상 더욱 주의가 필요한 – 시장이었다. 시장 안 옛 창고 건물 = 고사(庫舍)는 돈 많은 객주(客主)들의 차지였고, 넓은 앞마당은 행상과 좌고(坐賈)들의 차지였다. 행상들은 가지고 온 물건을 지게채로, 또는 수레채로 객주에게 팔아 넘겼고, 객주들은 또 객주들대로 시골에서 올라온 상인들에게 돗자리채로 팔았다.

  선혜청 창내장은 소매시장인 동시에 속칭 ‘돗떼기 시장’, 즉 돗자리채로 물건을 떼어 가는 도매시장이기도 했다. 번잡하고 시끄러워서 정신을 차릴 수 없는 곳을 돗떼기시장 같다고 하는데, 상품이 돗자리채로 사고 팔리다 보니 조금이라도 좋은 가격에 빨리 사고 팔려는 사람들로 북적대었기에 나온 말이다.

  요즘도 홈쇼핑 방송에서 가장 자주 들리는 멘트는 “이제 몇 분밖에 안 남았습니다” 나 “매진 임박” 같은 말이다. 돗자리 위에 있던 물건이 다 팔리면 그 위에 같은 물건이 다시 쌓일 것을 뻔히 알면서도 당장은 그걸 전부로 생각하는 것이 사람 심리다.

  창내장이 생긴 이후 서울 주민들이 물건을 사 들이는 방식에도 조금씩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하나마나 한 얘기이지만 조선시대에는 여자가 장바닥에서 물건을 사고 파는 것은 심각한 흉거리였다. 일제 강점 초기까지도 여자가 장바닥에 얼굴을 내 보이면 자식 여의기도 어렵다는 것이 통념이었다.

  그런데 낮에도 여는 ‘일용 식료품시장’이 생기고 장에 심부름 보낼 노비(奴婢)들이 사라지면서 ‘어쩔 수 없는’ 여성들, 싸고 비싼 것에 대한 관념을 배워야 했던 여성들이 한 둘씩 이 시장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이 변화는 이후 한 세기도 안되어 ‘장보기’는 여성의 일이라는 ‘관행에 대한 보편적 믿음’ – 요즈음에는 다시 깨지고 있지만 – 으로 확대될 것이었다.


사진 8) 1900년의 동별영. 이 자리 일부가 지금의 광장시장이 되었다.

  창내장이 생기고 8년이 지난 1905년, 러일전쟁에서 이겨 한국에 대한 지배권을 획득한 일본인들은 진고개의 일본인 상권 –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얘기하겠다 – 을 가로막고 있을 뿐 아니라 엄청난 규모로 새롭게 확장된 경부철도 남대문정거장 바로 옆에 버티고 있는 창내장을 눈엣가시로 보았다. 일본인들은 황실과 정부에 압력을 넣어 이 시장을 다른 곳으로 옮기고자 했다.

  이 정보를 재빨리 입수한 일부 고관(高官)과 장사꾼들은 개천(開川)의 일부 구간을 복개하여 그곳에 별도의 상설시장을 설치할 계획을 세웠다. 그들이 생각한 곳은 개천의 중심부, 광교(廣橋) – 너른 다리 – 에서 장교(長橋) – 긴 다리 – 에 이르는 구간이었다.

  이 구간 위를 판자로 덮으면 원 선혜청 창내장보다 훨씬 넓은 공지(空地)가 생긴다. 그 위에 고사(庫舍)를 짓고 행상과 좌고를 불러 모으면 그럴싸한 시장이 될 터이고, 위치상으로 보아 남촌과 북촌 주민들이 모두 쉽게 드나들 수 있는 곳이니 장사도 더 잘될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그들은 곧 광장회사(廣長會社) – 광교의 ‘광’과 장교의 ‘장’을 딴 것이다 – 를 설립하고 자본을 모아 공사에 착수했다.

  그러나 그들로서는 안타깝게도 그 해 여름의 큰비로 천변에 쌓아 두었던 자재가 몽땅 유실되어 버렸다. 당시의 토목기술은 그들의 참신한 아이디어를 뒷받침해 주지 못했다. 그러나 어찌 되었든 이 시도는 개천을 복개하려 한 최초의 시도로서 기억해 둘 가치가 있다.


사진 9) 광장시장. 해방 후 광장시장을 기점으로 하여 그 주변에 중부시장, 방산시장, 평화시장(신평화 청평화 동평화), 동대문시장 등이 계속 생겨나면서 광장시장은 일용품시장의 기능을 대부분 내 버리고 의류 원부자재 전문시장으로 바뀌었다. 사실 광장시장 포목점은 일제 강점기에도 규모가 큰 편이어서 1914년 당시 이 시장 최대의 포목상이던 호근호(扈根浩)는 광장주식회사 전체 자본보다 더 많은 자금을 굴리고 있었다.

  개천을 복개하여 그 위에 시장을 만들려는 계획이 수포로 돌아간데다가 창내장을 폐지하려는 시도도 송병준(宋秉畯)의 적극적인 로비 – 송병준이 창내장 상인이 불쌍해서 로비를 한 것은 아니다. 그는 일진회의 두목으로서 이권이 있는 곳이면 어디에나 달려갔고, 일진회원들이 만든 조선농업주식회사 명의로 창내장을 인수(引受)했다 – 로 유야무야되었지만, 광장회사 사원들 – 참고로 당시의 사원은 오늘날의 임원에 해당한다 – 은 계획을 포기하지 않고 이번에는 칠패와 더불어 조선 후기 양대 조시(朝市)를 이루었던 배우개로 눈길을 돌렸다.

  옛 어영청 옆, 당시에는 친위대 옆이었고 지금 광장시장의 서북편 길 건너에 있던 빈 터를 얻어 고사(庫舍)를 짓고 새 상설시장을 만들었다. 광장시장(廣長市場)이라는 이름은 한글 발음은 그대로 둔 채 뜻만 바꾸어 널리 모아 간직한다는 뜻의 광장시장(廣藏市場)으로 했다. 이렇게 해서 서울의 두번째 도시 상설시장, 광장시장이 만들어졌다. 오늘날 동대문시장에서 평화시장으로 이어지는 거대한 시장의 원조(元祖)는 이렇게 탄생했다.


사진 10) 한국전쟁 직후의 남대문시장. 시장 시설이 전쟁으로 폐허가 되어 버린 뒤에도 천막으로 얼기설기 엮은 상점들이 곧바로 시장터를 메웠다. 시장 상인들은 외환위기 이후 지금까지 ‘빈사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우는 소리들을 하지만, 그렇다고 이 시장이 조만간에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야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 나는 이 시장을 서울 근현대사 그 자체로 본다.

  남대문시장과 동대문시장은 지난 한세기 동안 서울 안 행상과 좌고들의 근거지였다. 그들은 이 곳에서 물건을 떼어다 골목골목 돌아다니며 팔거나, 이곳에 모여 들어 지나가는 행인들을 불러 모았다.

  이 두 곳을 기점으로 시내 각처로 이어지는 길목은 행상과 좌고들이 외치는 소리로 언제나 시끌벅적했다. 그로부터 100년이 지난 뒤, 서울시는 청계천을 복원하면서 천변 노점상들을 동대문운동장 안으로 몰아 넣었다. 다시 최근에는 동대문운동장을 다른 용도로 쓰기 위해 그 안에 모여 있는 노점상들을 다른 곳으로 내보내는 작업이 진행중이다.

  선혜청 창내장이 만들어졌을 때, 또 그것이 없어진다는 소문이 돌았을 때 이미 겪었던 일들이다. 데쟈뷰 Deja Vu!! 역사에서 컨텍스트가 반복되는 법은 없지만, 텍스트는 이렇듯 자주 반복된다. 역사는 되풀이된다는 대중의 오래된 믿음을 뒷받침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