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이야기] 도깨비시장, 돗떼기시장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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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이야기 27 – 도깨비시장, 돗떼기시장 (1)

전우용(근대사 2분과)

  도저히 그럴 여유가 없이 사는 사람들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나는 가끔 토요일에 늦잠을 즐길 수 있다. 그렇지만 한낮이 다 되도록 침대에서 뒹굴지는 못한다. 꼭 일어나야 할 다른 일이 있어서가 아니라 더 자도록 놓아두지 않는 고약한 소음 때문이다.

  동네마다 단지마다 조금씩 다르기는 하겠지만, 아파트라는 주거공간은 위층에서 나는 발 구르는 소리나 아래 길에서 나는 자동차 달리는 소리 말고는 ‘다른 사람의 소리’를 잘 용납하지 않는다. 그러나 늦게까지 집 안에 있을 수 있는 토요일 아침에는 꼭 다른 사람의 소리가 들린다. 아마도 전업주부들은 매일 듣는 소리이겠지만, 어쨌든 나는 가끔씩 토요일 아침에만 듣는다.

  “세~탁, 세~탁”하는 세탁소 주인의 목소리를. 아주 드물게, “찹쌀~떡, 메밀~묵”하는 소리가 들리는 겨울철 늦은 밤도 있다. 이런 소리가 내 단잠을 깨우거나 방해하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별로 짜증스럽지 않다. 오히려 이 소리들은 내게 현대 도시 생활 – 더 구체적으로는 아파트 생활 – 로 인한 ‘정서적 삭막함’을 씻어 주는 청량제 구실을 한다. 내게 “세~탁” 소리나 “찹쌀~떡” 소리는 어린 시절부터 귀에 익은 이 도시의 멜로디가 아직 남아 있음을, 그래서 도시도 향수(鄕愁)의 대상이 될 수 있음을 깨우쳐 주는 소리이다.


(사진 1) 대한제국 시대의 짚신행상. 지게 한 가득 짐을 올려 놓았으니 서 있기조차 벅찼을 텐데도 고래고래 짚신이 왔음을 알리며 다녀야 했다. 그런 그들에게 여러말 시키면 그게 바로 역적이다.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다. 아주 옛날부터 이런 일을 하는 사람들은 단말마의 외마디 소리로도 짚신이 왔음을 알릴 수 있는 기법을 개발했고, 그를 전승시켰다. 그 탓에 요즘의 세탁소 주인들 조차 그 리듬을 잊지 않고 있다.

  단독주택에서 정해진 직장 없이 낮에 주로 집에 머물던 시절, 시간을 더 거슬러 올라가 주위에 아파트는 커녕 2층집조차 보기 어려웠던 어린 시절에는 집 안에서도 수시로 다른 사람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골목 끝에 파묻힌 막다른 집에서도 들을 수 있었던 그 ‘소리’들은 흡사 도시가 살아 있고, 움직이고 있음을 알려주는 신호 같았다.

  요즈음에도 채소, 과일, 생선 등을 실은 트럭들은 단독주택가 골목골목에서 자동차 통로를 막고 서서는 확성기에 연결된 녹음기로 거친 목소리를 토해 낸다. “계란이 왔어요, 계란. 싱싱한 계란이 왔어요.” “배추, 무, 시금치, 싱싱한 상추가 있어요.” “고등어, 갈치, 가자미, 새우가 있어요” 등등. 본래가 조금 쉰 목소리에 확성기로 인한 기계적 변성(變聲)이 가해진 이 소리가 듣기 좋을 턱은 없지만, 그래도 이 소리가 나면 골목골목에서 어느새 ‘아주머니들’이 모습을 나타내곤 한다.


(사진 2) 행상과 좌고, 우측의 방물장수는 행상이고 좌측의 고무신 장수는 좌고다. 돌아다니며 파느냐 한 자리에 앉아서 파느냐의 차이는 있지만, 그 차이는 소지한 상품의 차이일 뿐, 가난하고 팍팍하기는 매일반이었다.

  1970년대까지, 이런 소리는 요즈음보다 다양했지만 확성기 없이 순전히 육성(肉聲)으로만 내는 소리였기에 그 음절수는 훨씬 적었다. 당시 장사꾼들이 질러대는 소리는 대개 3음절로 구성되어 있었다. “칼갈~어”, “새우~젖”, “베갯~속”, “배추~사” 등.

  개중에는 3음절을 살짝 넘는 경우에도 억지로 3음절에 맞추어 소리를 지르는 경우도 있었다. “구두~딱(또는 구두 닦으어~)”, “아스껙(또는 아이스 케~키)”. 거리의 장사꾼들이 내는 소리는 가사는 다르지만 리듬과 멜로디는 모두 같은 짧은 ‘노래’였다. 그래서 아이스케키 장수가 온 줄 알고 반색하며 나갔다가 베갯속 장수와 마주치고는 실망해서 되돌아서는 경우도 가끔 있었다.

  물론 예외는 언제나 있는 법이어서 “고장난 솥이나 냄비 고쳐요~” “단지나 항아리 때워요~” 처럼 여러 음절을 가진 소리도 있었고, “똥~퍼”처럼 묵직한 두 음절도 있었으며 “뻔~(뻔데기)”처럼 달랑 한 음절만 외치거나 아예 가위 소리(엿장수)나 종소리(두부장수)로 말소리를 대신하는 경우도 있었다.


(사진 3) 1960년대의 칼장수 겸 칼갈이. “칼 갈~어” – 그 리듬과 멜로디는 요즘도 메밀~묵, 찹쌀~떡 소리에 그대로 남아 있다 – 라고 구성지게 소리 지르며 골목골목을 누비다가 칼 갈아달라는 사람이 있으면 즉석에서 갈아 주곤 했다. 들고 다니는 칼은 팔기 위한 상품이지만, 사는 사람은 적었고 날이 무디어진 칼을 갈아달라는 사람이 더 많았다.

  집 안에서 듣는 소리가 ‘친숙한 삼음절’이었던 데 반해 번잡한 거리로 나가면 두 귀를 쫑긋 세우지 않고서는 알아들을 수 없는 엄청나게 빠른 템포로 수많은 ‘정보’를 쏟아 내는 ‘목소리들’이 곳곳에서 들리곤 했다.

  “인천 앞바다에 사이다가 떠도 곱뿌가 없으면 마시지를 못하고~”로 시작하는 약장수, “자~ 자~ 왔어요 왔어. 애들은 가라, 가! 이것이 무엇이냐~”까지 듣고는 손사레와 눈총에 어쩔 수 없이 그 앞에서 물러나야 했던 뱀장수, 신나게 박수를 치면서 “골라~ 골라~ 싸구려~ 싸구려~”를 외치던 옷장수 등.


(사진 4) 1930년대의 엿장수. 목판과 가위는 아주 오래전부터 엿장수의 필수품이자 상징물이었다. 엿장수 가위질 소리는 다른 행상들의 노랫소리보다는 작았지만, 변변한 먹을거리가 없던 시절의 아이들에게는 귀가 번쩍 뜨이는 소리였다. 이들이 목판과 가위 외에 저울과 바구니를 함께 들고 다니기 시작한 것은 – 고물상 겸업을 위해서이다 – 일제 강점 이후의 일이다.

  늦은 템포의, 주로 삼음절로 구성된 아주 큰소리의 노래는 행상(行商)들의 것이고, 빠른 템포의, 긴 가사를 가진 조금 큰 소리의 노래는 좌고(坐賈)들의 것이다. 행상은 집 안에 있는 고객을 찾아 골목골목을 ‘돌아다니는’ 장사꾼이요, 좌고는 도로 한 구석을 ‘차지하고 앉아’ 지나다니는 행인을 고객으로 유인하는 장사꾼이다. 앉은 장사꾼이라 해도 자기 스스로, 또는 소나 말 한마리가 감당할 수 있는 무게와 부피의 짐만을 들고 다녔기 때문에 좌고도 조금 넓은 의미에서는 행상이라 할 수 있다.


(사진 5) 1900년경 길가의 엿장수. ‘아기를 업은 아기’가 엿장수 옆에서 목판 위에 코를 빠트리고 있다. 엿장수는 골목골목을 돌기도 했지만, 적당한 장소가 나타나면 그 자리에서 바로 좌고로 변신하곤 했다. 1960-70년대에는 그 자리를 대개 뻔데기장수들이 차지했다.

  1970년대까지 이 도시에 생기(生氣)를 불어 넣었던 ‘돌아다니는 장사꾼’들의 노래는 마치 브람스나 김대현의 자장가를 모르는 이 땅의 할머니들이 수백년, 어쩌면 수천년 동안 흥얼거렸을 자장가 – 아기 옹알이 소리와 같은 리듬과 멜로디의 – 소리처럼 천편일률적이었지만 그런 만큼 모두에게 친숙했다. 그리고 아마도 장사꾼들의 노래 – 원조 CM송 – 역시 옛 자장가만큼이나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행상은 먼 거리에서, 담벼락을 사이에 둔 사람들에게도 들릴 수 있게 하자니 자연 큰 소리를 낼 수밖에 없었고, 큰 소리를 내자니 많은 말을 할 수도 없었다. 좌고는 잰 걸음을 옮기는 사람들을 붙잡기 위해 관심을 끌만한 만담(漫談)이나 기담(奇談)을 섞어야 했고, 혹시라도 관심을 끊을까 보아 말을 중단할 수도 없었다.


(사진 6) 좌고. 길가 아무곳에나 물건을 늘어놓고 행인을 붙잡고 흥정을 붙였다. 사진에 보이는 사람처럼 고객이 물건을 고를 때까지 점잖게 앉아 기다리는 사람도 있었지만, ‘정신 차리고’ 고를 수 없도록 별별 소리를 다 떠들어 대는 사람들이 훨씬 많았다. 사진의 좌고는 1896년 이후 새로 정비된 배수로 판자 위에 앉아 있다. 도로변에 이같은 하수도가 정비됨으로써 수인성 전염병을 예방하는 데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는데, 이는 서울 중앙에 도시상설시장이 생겨난 것과 같은 맥락에서, 즉 ‘근대적 위생관’과 ‘질병관’이 확산됨에 따라 이루어진 일이었다.

  이런 사정이 행상과 좌고로 하여금 각각 다른 CM송을 사용하게 한 것이다. 나는 움직이는 동안은 행상이고 머무는 동안에는 좌고가 되는 오늘날의 이동형 트럭을 가능케 한 것은 차도 차이지만 ‘녹음기’와 ‘확성기’의 도움이 컸다고 본다.

  도시에서 행상이나 좌고는 아주 오래 전부터 있었다. 조선왕조 개창 직후에도 서울에는 각처에 ‘여항소시(閭巷小市)’ – 동네마다 있는 작은 시장 – 가 있었고, 지게에 물건을 얹고 골목골목을 돌아다니는 행상과 돌다리 위에 물건을 늘어놓고 행인을 기다리는 좌고들이 이 시장에 드나들었다. 이들은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상품유통구조가 겪은 엄청난 변화에도 불구하고 꿋꿋이 자기 자리를 지켜 왔다.

  백화점, 대형 할인점 등 초현대식의 초대형 유통기구가 대다수 상품의 유통과정을 지배하고 있는 오늘날에도 행상과 좌고는 대형 유통기구가 포섭하지 못하는 틈새를 뚫고 자신의 영역을 만들어내고 지켜내며 변화시키고 있다.


(사진 7) 1904년경의 종로 시전. 별 볼품은 없지만, 이 정도 규모의 시전은 오늘날 대형 할인점이나 백화점 정도의 영향력을 행사했다.

  도시 한 구석에 정연하게 정비된 상업구역 – 도시가 만들어질 때 같이 만들어지기도 하고, 도시의 발전에 따라 추가로 조성되기도 한다 – 을 시(市)라 하고, 행상이 몰려들어 교역하고 물러가는 곳을 장(場)이라 한다 – “行商所聚 交易而退者 謂之場(萬機要覽)” -. 조선 전기 서울에 있었다는 ‘여항소시(閭巷小市)’도 엄밀한 의미에서는 장(場)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시장(市場)이란 상설점포가 밀집해 있으면서 동시에 행상과 좌고가 시끌벅적하게 몰려 드는 – 매일이든 며칠 간격이든 – 특정 공간을 말한다. 오늘날 도시 재래시장은 시(市)와 장(場)이 결합해 있으되 장(場) 보다는 시(市)의 특징이 지배적인 것들이다.

  이런 곳에서는 장바닥에 물건을 늘어놓고 파는 좌고들도 많지만, 그보다는 건물 내부를 한 두칸 정도의 작은 규모로 분할해 놓고 그 안에 ‘들어 앉아’ 물건을 파는 사람들이 더 많다. 그래서 이름이 ‘시장(市場)’이다.

  반면 농촌에서 열리는 정기시(定期市)에 대해서는 시장(市場)이라는 이름보다는 장시(場市)라는 이름이 더 자주, 일반적으로 쓰인다. 5일 간격으로 정기시(定期市)가 열리는 날을 ‘장날’이라 하며, 장(場)이 열리는 공간을 ‘장터’라 하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에서이다.

  우리나라에서 농촌 전역을 아우르는 촘촘한 장시망(場市網)이 만들어진 것은 17세기 이후의 일이었다. 그 무렵부터, 서울 성곽 주변에도 장시(場市)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는데 이후로 오랫동안, 농촌은 물론 도시에서조차 지배적인 상업공간은 시(市)가 아니라 장(場)이었다. 심지어 서울 종로의 시전가 앞에도 가가(假家)들이 즐비하게 늘어서서 장(場)의 풍경을 연출하였다.


(사진 8) 1920년경의 지전(紙廛)

  국초(國初)에 만들어진 시전(市廛) 행랑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따로 장(場)이 만들어진 데에는 몇가지 이유가 있었다. 앞의 “등 따숩고 배 부른 삶”에서 이미 이야기했지만, 여기에서 한번 쯤 되풀이해도 나쁘지는 않을 듯 싶다.

  우선은 인구가 크게 늘어났다. 사람수가 늘면서 그 사람들이 소비하는 재화(財貨)의 양(量)이 늘어났으니, 그 재화를 거래하기 위한 상업공간도 늘어나야 했다. 그러나 성 안에는 이미 집들이 빼곡이 들어차 있었을 뿐 아니라 새로 들어온 사람들을 수용하기 위해 이미 있는 집도 쪼개야 할 판이었다.

  실제로 국초(國初)에 왕족과 고관들에게 널찍하게 나누어준 집터는 17-18세기에 한 번, 20세기 초에 한 번, 다시 20세기 후반에 한 번씩 여러채로 쪼개지는 경험을 겪었다. 오늘날에는 그 쪼개졌던 대지(垈地)들을 다시 합치고 그 위에 초고층 빌딩을 짓고 있지만 – 이른바 ‘도심재개발사업’이라는 명목의 이 택지 재결합은 서울 공간 위에 남아 있는 역사의 ‘흔적’을 지우는 작업이기도 하다 -, 17-18세기에는 건물의 입체화가 불가능했기 때문에 평면 공간을 나누거나 ‘빈 터’에 집을 짓는 것 말고는 주택문제를 해결할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그 과정에서 아마도 여항소시(閭巷小市)가 열리던 공지(空地)들도 하나둘씩 택지(宅地)로 바뀌었던 듯 하다. 당연히 새로운 시장터, 서울 전역에 흩어져 있던 여러개의 여항소시 터를 모두 합친 것보다 더 넓은 시장터가 필요하게 되었다.

  두번째는 군인들, 특히 상비병(常備兵)들이 문제였다.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일본의 조총병을 상대할 목적으로 훈련도감(訓鍊都監)이 신설되었고, 인조반정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는 어영청(御營廳)과 금위영(禁衛營)이 또 설치되었다.

  이들을 도성삼군문(都城三軍門)이라 하거니와 여기에 도성 외곽의 북한산성과 남한산성에도 각각 총융청(摠戎廳)과 수어청(守禦廳)이 만들어져 도성 내외에 5개의 대규모 부대가 상주하게 되었다.

  이들 중 훈련도감(訓鍊都監) 군인만이 상비병(常備兵)이었고 나머지 군문은 농촌에서 번갈아 올라오는 번상병(番上兵)을 주축으로 하면서 일부 직업적 표하군(標下軍) – 요즘도 남대문이나 각 궁궐 주변에서 주말마다 벌어지는 ‘수문장 교대식’이라는 희한한 퍼레이드에는 ‘공익요원’들이 병사로 분장하여 깃발을 들고 다닌다. 표하군(標下軍)이란 총칼 대신에 깃발을 들고 부대의 위세를 돋우는 ‘직업군인’들을 말한다 – 을 끼워 넣어 구성되어 있었다.


(사진 9) 덕수궁 앞 수문장교대식. 조선시대 수문장 교대식은 이 과시적인 이벤트처럼 화려하지 않았다. 독립신문은 “궁궐을 지키는 병정이 새끼줄로 허리띠를 하고 있는” 낯뜨거운 꼬라지를 한탄하곤 했다. 병졸들은 자신의 차비를 스스로 마련해야 했지만 대개는 허리띠 하나 장만하기 어려울만큼 가난했다. 서울에 세거(世居)하는 표하군(標下軍)들도 대다수가 빈민들이었다. 조선 후기 그런 사람들이 가난을 조금이라도 덜어 보고자 장사길에 나서면서 난전 문제가 불거졌다.

  그러나 상비군이든 번상병이든 정부 재정이나 봉족(奉足) – 중세판 ‘병역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서울에 올라온 ‘농민’들이 서울에서 ‘군복무’하는 동안 지출해야 할 여비, 숙식비와 그가 집을 비움으로써 남은 가족들이 겪어야 할 경제적 곤란에 대한 ‘보상비’를 담당하는 이웃 농민들 – 이 내는 군포(軍布)만으로 필요한 군비(軍備)를 다 충당할 수는 없었다.

  물론 그 사이에는 ‘걷을 때는 넉넉히, 내줄 때는 짜게’라는 오래된 ‘관행’이 자리 잡고 있었을 터이지만. 왕조 정부가 도성에서 근무하는 군병(軍兵)들의 쪼들리는 살림을 조금이라도 펴 주기 위해 짜낸 묘안은 그들에게 ‘장사길’을 열어 주는 것이었다.

  군인들은 국가의 배려 덕분에 보수로 받은 군포(軍布) – 당시 훈련도감 군인들이 받은 군포(軍布)는 최상급 품질을 자랑했다 – 를 바로 내다 팔거나 처자(妻子)를 시켜 띠, 대님, 댕기 등으로 가공하게 해서는 내다 팔았다.

  무슨 일이든 하다 보면 익숙해지고, 익숙해지면 또 비슷한 일을 찾아 문어발처럼 뻗어나가는 법. 이윽고 군인(軍人)들은 돈이 될만한 것은 ‘무엇이든’ 취급하면서 본격적인 장사꾼으로 나서게 되었다. 이 무렵 서울의 군제(軍制)는 병농일치제(兵農一致制)가 아니라 병상일치제(兵商一致制)에 입각하여 작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진 10) 대한제국기의 남대문 조시(朝市). 조선 후기 난장(亂場)의 대표였던 칠패시장과 연속되어 있었고 서울 개시 이후에는 그 규모에서 칠패시장을 압도했다. 이 조시(朝市)는 선혜청 창고 자리에 도시상설시장이 생기면서 그에 흡수되었다.

  조선 후기 난전(亂廛) 문제는 이들 병졸 장사치들로부터 발단했지만, 곧 다른 사람들이 난전(亂廛) 대열에 합류했다. 시전(市廛) 상인들이 병졸 장사치들을 함부로 대할 수 없었던 것은 그들의 배후에 막강한 군문(軍門)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힘 있는 기관이 군문(軍門)만 있었던 것은 아니고 병졸(兵卒)들의 봉록(俸祿)만 적었던 것도 아니다. 여러 관서의 일꾼들 – 각사하예(各司下隸) – 과 각 궁방(宮房)의 겸종(傔從)과 노복(奴僕)들이 슬금슬금 장사길에 발을 딛기 시작했다. 덩달아 이들이 취급하는 물종(物終)도 갈수록 늘어나 필경에는 ‘없는 것 빼고는 다 있는’ 지경이 되었다.

  여기저기에서, 이 물건 저 물건을 들고 지고, 자기 것이 최고라고 외치는 장사꾼들 틈에서 누가 병졸(兵卒)이고 누가 하예(下隸)인지를 알아볼 도리는 없었다. 그런 마당에야 훈련도감군이 아니면 어떻고 사복시나 내수사 하예가 아니면 어떠하며 모모궁 노복(奴僕)이 아니면 또 어떠한가. 필경에는 아무런 ‘줄’도 ‘빽’도 없는 사람들도 이 판에 끼어들었다. 물론 잘못 걸리면 가진 물건 몽땅 빼앗기고 그것도 모자라 치도곤을 맞았지만, 그런걸 겁낼 양이면 애초에 서울 깍정이가 되지 말았어야 했다.


(사진 11) 서소문 밖 난장(亂場). 19세기초에 만들어졌는데, 이 난장에는 특히 소매치기나 야바위꾼들이 많았다고 한다.

  인가받은 장사꾼과 무면허 장사꾼들 – 언제나 그렇듯이, 이들을 정확히 구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 은 시전(市廛)에는 눈엣가시였다. 시전 상인들은 정부에 호소하여 금난전권(禁難廛權)을 얻어냈지만, 수십년 동안 엄청난 송사(訟事) 거리를 남기고 힘 없고 빽 없는 불쌍한 장사꾼들만 거덜냈을 뿐, 난전(亂廛)을 뿌리뽑지는 못했다.

  그러나 무면허 장사꾼들이 뒤 보아주는 사람만 믿고 버젓이 시전가(市廛街) 한복판에서 사고 팔 만큼 후안무치(厚顔無恥)하지도 않았다. 병졸들이야 신분 자체가 국역(國役)을 지는 사람들이었으니 시전 상인과 같은 처지라고 주장할 수 있었지만, 나머지는 그 빽이나 연줄이 어찌 되었든 뒤가 구린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종로의 시전 자리에서 멀찌감치 떨어진 곳, 성벽 바로 바깥이나 안쪽에 난전(亂廛)을 벌였다. 난전(亂廛)이 모인 곳이 곧 난장(亂場)이니 ‘난장판’이 생겨난 것이다.

  요즈음은 실체(實體)가 사라져 버려 그 말조차 거의 쓰이지 않지만, 한 때 널리 쓰이던 말로 ‘도깨비시장’이라는 것이 있었다. 내가 어렸을 적 살던 서울 변두리 동네에도 언덕 꼭대기에 도깨비시장이 있었는데, 나는 그 시장을 왜 그렇게 부르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세월이 한참 지나서, 그 시장이 완전히 사라진 다음에야 도깨비시장이 ‘무허가시장’으로서, 단속반이 ‘뜨면’ 씻은 듯 자취를 감추었다가 단속반이 지나가면 다시 생기는 시장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사진 12) 개장 직후의 선혜청 창내장. 선혜청 창고 건물을 객주들에게 임대해 주고 임대료를 받았다. 우리나라 최초의 시장 경영 기업이 생겨난 것인데, 이 기업의 경영자는 최초 농상공부였다가 곧바로 내장원으로 바뀌었다. 무슨 개장 기념 이벤트니 할인행사니 하는 것이 있을 수 없었던 시절이라 개장 직후에는 시장 자체가 썰렁했다. 사진에서도 사람은 안보이고 물건만 보여 ‘파리 날리는’ 상황이었음을 알 수 있다.

옛 기록을 살펴 보면 도깨비는 독각귀(獨脚鬼)로 표기되기도 하고 ‘독갑(獨甲)이’로 표기되기도 한다. 독갑이란 도깨비를 억지로 한자화(漢字化)한 것이니 다시 생각할 여지도 없지만, 빗자루가 도깨비로 변신한다는 이야기에 비추어 보면 독각귀(獨脚鬼)는 나름 그럴싸해 보인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그럴싸해 보일 뿐이다. 우리 말에 ‘개비’라는 것이 있다. 가늘게 쪼갠 나무토막을 말하는데 거기에서 성냥개비가 나오고 담배개비 – 사람의 성정이 강퍅해지면 말도 세진다. 경음화, 격음화 현상이라는 것인데 그 탓에 요즈음에는 개비가 아니라 ‘개피’가 되어 버렸다 – 가 나왔다.

  빗자루나 삽자루, 괭이 자루처럼 나무로 만든 자루 역시 개비다. 이 개비 위에 다른 사물이 덧씌워 보이면 덧개비가 되고 아무 것도 없는데 마치 있는 것처럼 보이면 헛개비가 된다. 시장이 아니었다가 시장이 되었다가 또 시장이 아닌 곳으로 무상(無常)하게 변하는 곳이 바로 도깨비시장이고, 좀 고풍스러운 말로는 난장(亂場)인 것이다.

  1914년 일제는 ‘시장규칙’을 제정하여 도시와 농촌을 막론하고 모든 시장은 관(官)의 허가를 받도록 했는데, 이 ‘근대적 규칙’이 제정되기 전에도 난장(亂場)은 시전(市廛)의 단속대상이었다.

  도깨비시장이 생겼다 사라졌다 한 것은 일차적으로 이 ‘단속’ 때문이었지만, 정말로 ‘무상(無常)’해서야 소비자가 무슨 수로 장이 열리는지 알고 찾아올 수 있겠는가. 사실은 새벽녘 어스름에 열렸다가 날이 밝으면 씻은 듯 사라지는 시장 – 그 하는 짓이 도깨비와 똑같은 시장 – 은 이들 시장의 주역이 요즘으로 치면 ‘Two Job족’들이었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