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이야기] 노인의 풍모 자경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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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의 풍모 자경전

홍순민(중세사 2분과)

경복궁 동궁의 북쪽, 교태전의 동북편, 현재 민속박물관의 서남편에 보면 담장으로 둘러쳐진 안에 옛 건물이 들어앉아 있다. 경복궁 뒷편의 향원정 연못 일대를 구경하고 싶은 욕심에 발걸음을 바삐 옮기다보면 자칫 그냥 지나치기 쉽다. 설사 웬 건물인가 하여 민속박물관쪽에서 동쪽 일각문을 들어서거나, 교태전을 보고나서 서쪽 담장문을 들어서더라도 별 볼 것 없다는 인상을 받고 되돌아 나오기 십상이다. 지금은 그저 꺼칠하기만 한 그 건물은 그러나 결코 범상치 않다. 차분히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산전수전을 다 겪었으면서도 기품과 무게를 잃지 않은 노인의 풍모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자경전은 임진왜란으로 경복궁이 불타 없어지기 이전에는 없던 건물이다. 애초에 “자경”이란 이름은 정조 임금이 즉위하면서 그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위해 창경궁에 커다랗게 집을 짓고 자경당(慈慶堂)이라 이름을 붙인 데서 비롯되었다. 자경이란 자친(慈親), 곧 왕이 어머니나 할머니 등 왕실의 웃어른이 되는 여성에게 경사(慶事)가 임하기를 바란다는 뜻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겠다.

고종 4년에 자경전이란 건물을 새로 지으면서 비로소 경복궁에 자경전이 자리를 잡았다. 당초 자경전이 완공될 무렵에는 고종이 정무를 보는 건물 ―편전(便殿)으로 사용되었다. 승지들이 공무를 가지고 입시하기도 하였고, 진강(進講)―왕이 관인 학자들과 학문을 토론하기도 하였고, 소견(召見) ―고위 신료들을 불러들여 정사를 의논하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고종 10년에 12월에 큰 불이 나서 그 일대 건물들과 함께 불타 없어졌다. 이 화재 직후 곧 다시 지었으나, 1년 반쯤 뒤인 고종 13년 11월에 또 불이 나서 타버렸다. 이때 고종이 창덕궁으로 옮겨간 뒤에 자경전을 다시 지었다. 그 자경전이 조금씩 변하면서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이다.

지금 남아 있는 건물의 이름을 흔히 자경전이라 한다. 자경전이라 부르면서 대개는 단지 한 채의 건물로 보아 넘긴다. 그러나 실은 한 채가 아니라 자경전에 청연루(淸연樓)라고 하는 누마루집과 협경당(協慶堂)이라고 하는 건물 세 채가 잇닿아 있는 것이다. 현재는 그 앞으로 남쪽의 행각(行閣)만이 남아 있으나, 경복궁에 건물이 꽉 들어차 있을 때는 동, 서, 북에도 각각 행각이 둘러싸고 있었다. 그 행각에는 ‘당(堂)’자 붙은 방들이 여럿 들어 있었다. 자경전은 그 자체 40간이 넘는 규모를 지니고 있고, 이렇듯 주위 일군의 건물들을 거느린 당당한 풍모를 지닌 건물이었다. 지금 주위 건물들은 없어지고, 단청도 퇴색하고, 온갖 치장도 사라져 버리기는 했으나 그 풍모의 골간은 남아 있다.

고종 13년 이후 자경전에 왕이 정식으로 임어한 적은 없던 듯하다. 대신 당시 대왕대비인 신정왕후(神貞王后)―고종의 양모가 주로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 신정왕후도 1897년에 죽었다. 그가 죽은 뒤에는 이 건물에 누가 살았었는지는 좀더 면밀히 조사를 해 보아야 알겠다. 우리는 어느 건물에 누가 살았다 하면 그것을 고정시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건물의 주인은 죽거나 교체되면서 끊임없이 바뀌어 간다. 그러므로 어느 건물에 누가 살았었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는 변화를 생각해야 한다. 자경전도 마찬가지다. 고종도 살았었고, 대왕대비 신정왕후도 살았었고, 또 다른 사람도 살았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살다간 이 건물은 그 긴 세월 갖은 풍파를 겪으며 살아 남아 지금 저 모습으로 남아 있다. 저 모습 속에는 그 세월, 그 사람들의 애환과 체취가 담겨 있는 것이다. 자경전을 유심히 들여다 보면 그러한 흔적을 찾아낼 수 있다. 특히 왕실의 웃어른이 되는 여성이 살던 그윽한 분위기가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