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이야기] 광희문, 수구문, 시구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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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희문, 수구문, 시구문(?)

홍순민(중세사 2분과)

흥인문에서부터 도성은 청계 고가도로, 동대문 운동장, 야구장 등등이 함부로 들어서서 성 돌 하나, 주춧돌 하나 흔적조차 살필 수가 없다. 그 부근에서는 대강 어디로 지나갔겠거니 짐작을 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저 어림짐작으로 따라가다 보면 지하철 2호선과 4호선이 만나는 동대문운동장 역이 나온다. 그 어름, 을지로와 퇴계로가 끝나고, 그 두 길이 합쳐서 왕십리길이 시작되는 지점, 한양공고 정문 부근에서 두리번거리다 보면 저만큼 남쪽으로 웬 문 하나가 길 한 옆으로 비켜서 있는 것이 보인다. 광희문(光熙門)이다.

광희문 역시 다른 도성문들과 마찬가지로 1396년(태조 5)에 도성이 완성될 당시 그 동남문(東南門)으로 건립되었다. 그 위치가 청계천이 도성과 만나는 부근이었기 때문에 광희문은 수구문(水口門)으로 부르기도 하였다. 광희문과는 별개의 문으로 목멱산 기슭, 지금의 장충단에서 국립극장 앞을 지나 한남동으로 나가는 고개 마루에 남소문(南小門)이 있었다. 이 문은 경복궁을 기준으로 보아 불길한 방향에 있다 하여 폐문하였었는데 16세기 중엽부터 여러 차례 이 문을 다시 열자는 논의가 있었다. 그러나 이 문은 끝내 도성문으로 활용되지 못하고 광희문이 도성의 동남문으로 계속 쓰였다.

광희문은 숙종 연간에 도성을 다시 고쳐 쌓을 때 그 석축을 고치고 나중 언젠가는 문루도 지어 문으로 온전한 모양을 갖추어 내려 왔다. 그 광희문은 일제초기에 들어와 문루는 없어지고 홍예문이 뚫린 석축만 남게 되었다. 그것을 1966년에 문 북쪽의 성곽을 헐고 도로를 확장하면서 그나마 문으로서 기능을 잃었다. 1975년에는 도성을 복원하는 과정에서 광희문을 남쪽으로 한 15m 옮겨 복원하면서 없어진 문루를 다시 지음으로써 오늘날과 같은 모습을 띄게 되었다.

광희문은 또 시구문(屍口門)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조선시대에는 도성에서 장례가 나갈 때 도성의 여덟 문 가운데 소의문―서소문과 이 광희문으로 나가는 것이 원칙이었던 듯하다. 광희문 바로 바깥의 신당동 일대는 지형이 나즈막한 야산인데 그곳은 얼마전까지만 해도 공동묘지가 있었다고 한다. 이렇게 장례 행렬이 많이 나가다보면 미처 문을 나가지 못한 상태에서 인정(人定)―통행금지 시간에 걸려 밤새 시신을 그곳에 모셔 놓을 수 밖에 없는 경우도 적지 않았을 것이요, 전염병이나 전란으로 사람들이 많이 죽는 시절에는 주인없는 시신이 이 문 근방에 내다 버려진 경우도 있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시구문이라는 이름으로 불렀는지 모르겠으나,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한 공식 기록에는 시구문이라는 이름은 쉽게 찾아지지 않는다. 시구문이라는 이름은 그야말로 속칭이요, 그것도 일제시기 이후에 가서야 그런 이름이 널리 쓰인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더구나 ‘이 문에는 늘 시신이 쌓여 있었다’고 말하는 것은 아무래도 사실로 믿어지지 않는다. 일본인들의 악의적인 설명이 아닌가 생각된다.

지금 광희문은 문이라고 하기가 어렵다. 그 옆으로 대로가 지나가니 굳이 그 문으로 통행할 필요가 없다. 한 번 지나가 보려고 해도 철문이 늘 굳게 닫혀 있다. 문 안, 광희동 쪽에는 나무가 잔뜩 심어져 있다. 광희문은 그저 동네 노인들의 소일처가 되어 있다. 이왕 그럴 바에는 문도 열어 놓고 나무도 치워서 좀더 넓직하고 시원한 휴식 공간으로 꾸며도 좋을 듯하다. 이런 형편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광희문이 거기 서 있는 것이 참 고맙다. 그것조차 없었다면 너무나 바뀌어 버린 이 일대의 옛 모습을 무엇으로 헤아려 볼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