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이야기] 광화문의 운명(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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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의 운명(2)

홍순민(중세사 2분과)

현재 광화문은 불구다. 광화문의 불구는 그 편액이 한글로 ‘광화문’이라고 붙어 있는 데 그치지 않는다. 기실은 그 위치도 본래의 자리에서 몇 미터 뒤로 물러 앉아 있다. 더욱 큰 문제는 그 재질에 있다. 정상대로라면 기둥과, 서까래, 기둥과 서까래를 연결시켜주는 들보나 도리, 공포( 包) 등은 당연히 나무라야 한다. 그러나 지금 그것들은 나무가 아닌 철근 콘크리이트로 되어 있다.

나무는 나무의 질감이 있고 철근 콘크리이트는 그것의 질감이 있다. 나무는 아무리 다듬어도 그 굵기가 조금씩 서로 다르고, 또 약간의 휘게 마련이며 따라서 그 느낌은 자연스럽고 부드럽다. 그런데 지금 광화문의 기둥이나 서까래 등은 너무 반듯반듯하며 너무 질서 정연하다. 단청을 칠했지만 아무래도 거칠거칠하고 퍽퍽하다. 철근 콘크리이트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좋게 보아도 지금 광화문은 해방 이후 콘크리이트 문화의 산물이다. 여러모로 모조품일 따름이다. 복원물도 되지 못한다. 진품과는 어림도 없이 거리가 멀다. 그래서 불구다.

불구이나마 광화문은 일반인들이 쉽게 다가 가서 차분히 바라보기가 매우 어렵게 되어 있다. 바깥에서 접근하기가 그렇게 어려울 뿐만 아니라, 안으로 들어가도 광화문에서 경복궁으로 진입하는 동선이 끊겨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광화문을 경복궁의 정문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국립중앙박물관, 조선총독부의 정문으로 생각한다.

본래는 광화문을 들어서면 다시 행각(行閣)이 있고 그곳에 홍례문(弘禮門)이라는 문이 있었다. 홍례문을 들어서면 서쪽에서 동쪽으로 인공 개울이 흐르고 그 개울을 건너는 다리가 놓여 있었다. 그 개울은 금천(禁川)이라고 불렸던 것으로 궁궐의 바깥 부분과 중심 부분을 나누어 주는 기능과 함께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조건을 갖추어 주는 명당수(明堂水)의 의미도 띠고 있었다. 일상적으로는 배수로의 기능을 담당하였을 것이고, 화재와 같은 비상시에는 그곳의 물을 소방용수로 썼음은 물론이다. 그 금천에 놓인 다리를 일반적으로는 금천교(禁川橋)라 부르는데 경복궁 금천교의 이름은 영제교(永濟橋)이다. 그 금천교를 건너면 근정문이 나오고, 근정문을 들어서면 경복궁의 법전(法殿)인 근정전을 만나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조선총독부 청사―요즈음 헐리고 있는 국립중앙박물관 건물이 바로 홍례문과 영제교를 뭉개고 들어 앉아 있다. 일제가 조선총독부 청사를 지으면서 홍례문을 헐어 없애 버렸고, 영제교는 뜯어 옮겨 버렸다. 그래서 그 영제교는 근정전의 동쪽, 물도 없는 개울에 걸쳐 있다. 오늘날 영제교를 건너기 위해서는 현재 경복궁의 정문처럼 쓰이고 있는 동문 건춘문(建春門)을 들어오든지, 광화문을 들어 와 박물관 건물 동쪽으로 돌아 들어가게 되어 있다. 수많은 내외국인이 그 다리를 건너 다니고 있지만, 그것이 경복궁의 금천교라는 생각을 거의 하지 못한 채 무심히 지나친다. 그렇게 금천교의 의미를 잃어 버린 영제교를 건너 근정전의 월랑 한 귀퉁이 벽을 뚫어 낸 문을 지나 근정문을 만난다. 그러니 근정전을 정식으로 정면에서 만나게 되지 않고 엉뚱하게 뒤통수 모서리부터 보게 되는 셈이다. 그럴 때 근정전, 더 나아가 경복궁의 첫인상을 제대로 받을 리가 없다. 첫인상을 옳게 받지 못하면 그 다음 관계도 정상적으로 가꾸어 가기가 어렵지 않을 수 없다.

국립중앙박물관―조선총독부 청사를 허는 공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동안 이 문제를 놓고 여러 의견이 엇갈렸다. 그 의견들은 모두 나름대로 일리가 있다. 하지만 이제 그 건물을 헐기 시작했고, 경복궁을 복원하기로 한 마당에 그 문제 자체에 이런저런 이견을 다는 것은 생산적이지 못하다. 다만 이왕 조선총독부 청사를 헐어내고 경복궁을 복원하기로 했으면, 제대로 해야 할 것이다.

이런저런 의견도 그 제대로 하는 것을 돕는 방향에서 제기되어야 할 것이다. 첫 작업은 광화문을 바로 잡는 것, 그 안팎의 동선을 살려내는 것부터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이는 기구했던 광화문의 운명, 우리 근현대사의 뒤틀림을 바로 잡는 일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