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이야기] 광화문의 운명(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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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의 운명(1)

홍순민(중세사 2분과)

지금 광화문 네거리에서 광화문은 매우 멀다. 광화문 네거리 ‘비전(碑殿)’―비각에서 북쪽을 보면 빤히 바라다 보이는 위치에 광화문이 있다. 직선 거리로는 몇 백 미터 되지 않는다. 하지만 비전에서 광화문까지 걸어 가려면 세종로 동쪽 인도를 따라 올라 가다가 동쪽으로 꺾어 율곡로를 따라 얼마를 가서 지하도를 건너 다시 서쪽으로 걸어 와야 한다. ‘비전’에서 광화문 지하도를 건너 세종로 서쪽 인도를 따라 올라가도 마찬가지다. 세종문화회관을 지나 정부종합청사 앞에서 바로 광화문으로 건너 갈 수가 없다.

서쪽으로 지하철 3호선 경복궁 어간에서 횡단보도를 북으로 동으로 두 번 건너 다시 경복궁을 끼고 동으로 얼마를 걸어와야 광화문을 만날 수 있다. 이 부근 길을 잘 알지 않으면 그리 쉽지 않은 경로이다. 그런데 미안하게도 그렇게 어렵게 광화문 앞에 당도해 보면 광화문은 잘 보이지 않는다. 이번에는 너무 갑자기 가까이 다가서게 되었기 때문이다. 광화문 편액이라도 좀 자세히 보려고 주춤주춤 뒤로 물러서다가는 노란 금을 넘어 차도로 들어서게 되어서 매우 위험하다. 그렇게 광화문은 우리 시야에서 ‘멀다.’

그런데 이리저리 애를 써서 광화문의 전체 모습과 편액을 확인해 본들 그리 즐겁지 않다. 즐거움보다는 의문이 더 커진다. 우선 그 편액이 조선시대에 만든 제것이라면 ‘門化光’으로 되어 있어야 정상이다. 한문은 한 행에서는 종서(從書)―위에서 아래로 쓰고, 행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바꾸어 쓰는 것이 원칙이다. 그러므로 한 행에 한 자씩 쓸 때도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가면서 쓰게 마련이다. 그런데 현재는 ‘광화문’으로 되어 있다. 순서만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글자도 한자가 아닌 한글로 되어 있다. 여러모로 이상하다. 그런 이상이 생긴 연유에는 광화문이 겪은 풍파, 우리 근현대사의 곡절이 서려 있다.

광화문은 애초에는 1395년(태조 4) 경복궁을 창건할 당시에 그 정문으로 지어졌다. 그것이 1592년 임진왜란으로 불타 없어져서 270여년을 내려 오다가 1865년(고종 2)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다시 태어났다. 그러나 1896년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겨 가시면서 경복궁은 빈 궁궐이 되었고, 광화문도 그저 빈 궁궐의 정문으로만 남게 되었다. 그나마 그 때까지는 제 자리에서 제 모습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1915년 일제가 경복궁에서 이른바 ‘시정오년기념조선물산공진회(始政五年紀念朝鮮物産共進會)’, 곧 일제가 조선을 침략하여 다스린 지 5년이 되는 것을 기념하는 대규모 박람회를 열면서 사정이 달라졌다. 이 공진회를 계기로 경복궁이 크게 파괴되었는데, 일제는 그 공진회가 끝나자 경복궁의 법전(法殿)인 근정전과 정문인 광화문 사이에 커다란 석조 건물로 총독부 청사를 짓기 시작하였다. 총독부 청사는 10년만에 완공되었는데, 일제로서는 총독부 청사의 정문으로 광화문을 그대로 둘 수 없는 노릇이었다. 이에 광화문을 헐어 없애려 하였다.

“광화문이여, 광화문이여, 너의 목숨이 이제 경각에 달려 있다. 네가 일찌기 이 세상에 있었다는 기억이 차가운 망각 속에 묻혀 버리려 하고 있다. 어쩌면 좋다 말이냐. 내 마음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 무자비한 끌과 매정한 망치가 너의 몸을 조금씩 파괴하기 시작할 날이 이제는 멀지 않게 되었다.” 당시 이렇게 헐려 없어질 광화문을 위해서 애통해 하면서 일제에 반대를 하고 나선 사람이 柳宗悅―일본의 민예 운동가 야나기 무네요시였다. 야나기 무네요시가 불러 일으킨 반대 여론 덕분에 광화문은 헐려 없어지는 운명은 간신히 면하여 경복궁의 동북쪽 담장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그렇게 모질게 목숨을 유지하던 광화문은 6·25의 와중에 폭격을 맞아 위의 문루(門樓) 부분은 없어져 버리고 아래 석축 부분만 남게 되었다. 그런 광화문을 다시 제 자리에 복원한 때가 1968년, 지금 우리가 보는 모습으로 부활하였다. 그러면서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친필로 편액을 써 단 것이 오늘날의 저 ‘광화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