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이야기] “경희궁터”로 남은 경희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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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희궁터”로 남은 경희궁

홍순민(중세사 2분과)

창덕궁 및 창경궁을 “동궐”이라 부르는 데 대해서 “서궐(西闕)”이라 불리던 궁궐이 경희궁(慶熙宮)이다. 경희궁은 서울의 우백호인 인왕산을 기대어 자리잡았었다. 종루에서 운종가를 따라 서쪽으로 나아가다가 돈의문―서대문 못미쳐 오른편에 있었다. 경희궁의 전각들은 지금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정전인 숭정전(崇政殿)만이 근년에 복원되어 있을 뿐이다. 그래서 그곳을 “경희궁”이라고 하지 않고, “경희궁터”라고 부른다. 그만큼 경희궁의 내력은 기구하고 사연도 깊다.

경희궁은 광해군대에 처음 지어졌다. 임진왜란 이후 궁궐을 새로 짓는 일을 주도한 사람은 광해군이다. 광해군은 즉위 초에 창덕궁을 중건하고 이어서 창경궁도 중건하였다. 그 창경궁 중건공사가 한창 진행되고 있던 광해군 8년(1616)년에 인왕산 아래 사직 뒤편에 새로운 궁궐―인경궁(仁慶宮)을 짓는 공사를 또 벌렸다. 창덕궁과 창경궁이 다시 정비되기는 했어도 이궁(離宮)으로 궁궐이 하나 더 필요하다고 볼 수 있었으므로 인경궁을 짓는 일을 당시 사정으로서는 버겁기는 해도 인정할 만한 여지가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인경궁 공사를 하면서 또 다시 돈의문 안 색문동(塞門洞)에 새 궁궐의 짓기로 하였다. 경덕궁(慶德宮)―영조 36년(1760)에 그 이름이 경희궁(慶熙宮)으로 바뀌어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궁궐이다. 그곳에 왕기(旺氣)가 있다는 술사(術士)의 말에 따른 결정이었다. 그곳은 광해군의 이복 동생 정원군(定遠君)의 집이 있었다. 정원군의 아들이 뒤에 광해군을 몰아내고 왕―인조가 되었으니 그 말도 결과적으로는 맞는 말이 된 셈이기는 하다. 그렇지만 광해군이 술사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궁궐을 짓는 것과 같은 중요하고도 어려운 일을 그렇게 쉽게 결정한 것은 도무지 납득하기 어렵다.

광해군의 이러한 납득하기 어려운 처사는 그의 성품이 괴팍해서만이 아니라, 왕으로서 그가 정통성에 한계를 갖고 있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광해군은 후궁 소생이다. 그것도 위로 형인 임해군이 있음에도 전시 상황에서 다소 엉겁결에 왕위 후계자인 세자로 책봉이 되었다. 왕위 후계자로서 정통성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더구나 나중에는 정비인 인목대비에게서 영창대군이 태어나자 더욱 자신의 왕위 승계의 정통성에 위기감을 느끼게 되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그는 여러 대립하는 정치집단 가운데 대북세력과 연결되어 나머지 정치집단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방향으로 치달으며 자신의 왕으로서 정통성에 시비가 되는 문제에 대해서는 아주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던 것이다. 그가 궁궐 건축에 집착하였던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파악해야 한다. 그의 왕으로서의 권위를 과시하는 한편, 큰 토목공사를 추진하는 데서 자신의 권한을 강화하려 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볼 수 있을 듯하다.

광해군이 그렇게 애를 써서 지은 두 궁궐 가운데 인경궁은 인조 연간에 창덕궁과 창경궁을 수리하는 데 쓰임으로써 지금은 흔적조차 찾을 수 없게 되어 버렸다. 이에 비해 경덕궁은 조선후기 내내 동궐에 대해 서궐, 곧 이궁의 지위를 유지하였다. 그러다가 고종 초년에 대원군이 주도하여 경복궁이 다시 중건되자 경복궁이 법궁이 되고 동궐이 이궁이 되었다. 그 결과 경희궁은 왕이 임어하지 않는 빈 궁궐이 되었다.

우리 국운이 일제의 식민지로 굴러 떨어지는 20세기의 초엽, 왕이 사는 궁궐조차도 일제에 의해 왜곡되고 훼손되는 상황에서 왕이 살지 않던 궁궐―경희궁의 말로는 비참할 수 밖에 없었다. 1909년 일제는 경희궁 자리에 일본인 자녀들이 다닐 중학교―조선총독부립중학교를 짓기 시작하였다. 그 바람에 경희궁의 전각들은 대부분 헐려 없어졌고, 몇 남아 있던 건물들도 일제시기에 이리저리 팔려 나가는 수난을 겪었다. 학교는 1915년에 경성중학교로 개칭되었고, 해방 후에는 그 터에 서울고등학교가 들어섰다. 서울고등학교가 강남으로 이전을 하고 그 터는 현대그룹으로 넘어갔다가 다시 서울시에서 사들여 지금 그 자리에 서울시립박물관이 들어서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