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이야기] 경운궁과 덕수궁

0
160

경운궁과 덕수궁

홍순민(중세사 2분과)

서울에 있는 조선왕조의 다섯 궁궐들 가운데 오늘날 가장 널리 알려진 궁궐이 덕수궁(德壽宮)이라 할 수 있다. 덕수궁은 서울시청과 태평로를 사이에 두고 바로 보고 있기 때문에 지하철 시청역에서 내리면 바로 그 정문으로 쓰이는 대한문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이렇게 가장 널리 알려져 있는 궁궐이지만 덕수궁은 조선왕조에서는 정식 궁궐이 아닌 임시 궁궐―행궁(行宮)에 지나지 않았다. 행궁이 된 사연에는 임진왜란으로 겪은 우리 민족사의 아픔이 배어 있다.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왜군에 의해 200년간 영건되어 온 서울의 궁궐들은 완전히 파괴되어 버렸다. 1593년(선조 26) 10월 서울을 떠난지 1년 반 만에 선조 임금과 조정 신료들이 서울로 돌아 왔으나, 기거할 궁궐이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정릉동에 있는 그전에 성종 임금의 형이었던 월산대군(月山大君)이 살던 집과 그 주위의 민가 몇을 개조하여 임시 거처로 삼았으니 이것이 “정릉동 행궁 (貞陵洞 行宮)”이다.

선조는 정릉동 행궁에 임어하면서 궁궐을 다시 지으려 무진 애를 썼지만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그곳에서 승하하였다. 궁궐을 다시 지은 이는 광해군이다. 광해군은 경복궁을 버려 두고 창덕궁과 창경궁을 새로 다시 지었다. 광해군은 창덕궁과 창경궁을 거의 지은 단계에서도 정작 새로 지은 궁궐로 옮기는 것만큼은 극히 꺼려하였다. 그러다가 1611년(광해군 3) 10월에 광해군은 창덕궁으로 이어하였고, 정릉동 행궁에는 경운궁(慶運宮)이라는 이름을 지었다. 그러나 광해군은 창덕궁으로 이어한지 보름 쯤 지난 11월에는 인목대비를 모시고 다시 경운궁으로 돌아갔다가 광해군 7년(1615) 4월 창덕궁으로 이어할 때까지 무려 거의 3년 반이라는 기간을 더 그곳에서 머물렀다.

광해군이 창덕궁으로 이어한 다음에는 경운궁은 인목대비가 유폐된 서궁으로 남게 되었다.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을 몰아내고 왕이 된 인조는 당시 인목대비가 유폐되어 있던 서궁―경운궁에 와서 즉위식을 거행하였다. 그 이후 경운궁은 또 다시 빈 궁궐터로 남게 되었다.

그러던 경운궁이 다시 역사의 중심 무대로 등장한 것은 1896년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겨가 있던 고종 임금이 그 이듬해인 1897년 그 인접 지역인 경운궁을 대대적으로 수리하고 옮겨 오면서부터이다. 고종 임금이 왕으로서 경운궁에 임어하던 기간은 1897년부터 1907년 (광무 11년, 융희 원년) 7월 19일, 일본이 헤이그 밀사 사건을 트집잡아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킬 때까지 10년 5개월이 된다. 이 10년은 연호가 건양에서 광무(光武)로 바뀌어 다시 융희(隆熙)로 바뀌기 직전까지의 광무 연간이고, 왕이 아닌 황제의 나라 대한제국기이다.

1907년 고종은 일본이 우리나라를 강제로 집어삼키려는 야욕을 당시 네델란드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서 세계 여러 나라에 알리고자 하여 이상설, 이위종, 이준을 특사로 파견하였다. 그러나 이 일은 실패로 돌아갔고, 오히려 일본은 이를 트집잡아 고종을 강제로 왕위에서 끌어 내리려 온갖 압력을 가하였다. 고종은 이에 황태자에게 대리청정―다음 왕이 될 세자가 왕을 대신하여 정무를 보살피는 관행―을 명하였으나 일본은 이를 왕위를 물려주는 선양(禪讓)으로 둔갑시켜 순종을 황제로 만들고 고종은 태황제(太皇帝) ―상왕으로 물러나게 하였다. 그렇게 물러난 고종의 궁호(宮號)―상왕에게 그가 사는 궁궐의 칭호로서 붙이는 이름이 “덕수(德壽)”였다.

그러므로 엄밀히 말하자면 덕수는 궁궐 자체의 이름이라기 보다는 그 궁궐에 사는 고종에게 붙여진 이름이다. 그것도 일본의 압력에 의해 타의적으로 붙여진 이름이니 우리로서는 결코 흔쾌한 이름이 되지 못한다. 그런데도 지금 경운궁이라고 하면 알아 들을 이가 몇이나 되실까. 덕수궁에는 평일, 휴일 할 것없이 드레스에 야회복에 한복에 궁중복까지 갈아 입어가며 “웨딩 포토” 찍는 신랑 신부들만 들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