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이야기] 건물들의 지위 : ‘전당합각재헌루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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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들의 지위 : ‘전당합각재헌루정’

홍순민(중세사 2분과)

궁궐에는 수많은 건물들이 있다. 아니 있었다. 경복궁의 경우 지금은 남아 있는 건물이 최근 복원한 것까지 합해도 불과 십 수 채 정도밖에 되지 않지만, 19 세기 후반 한참 때는 건물 수의 합계가 800을 넘었고, 고유한 이름을 갖고 있는 독립 건물만 해도 170채 내외가 되었다. 그러한 건물 이름들은 모두 좋은 뜻의 한자로 되어 있어 한자에 익숙치 못한 오늘날 우리들이 보기에는 그게 그것 같기만 할 뿐, 도무지 어떤 질서를 찾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한자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면서, 사람 이름에도 항렬자를 쓰던 조선시대 당대의 문화 행태로 볼 때 궁궐 건물들의 이름을 아무렇게나 지었을 리는 없다.

궁궐에는 왕과 왕비로부터 왕실 가족, 대소 관원, 군인, 내시, 궁녀, 무수리, 노복에 이르기까지 여러 계층의 수많은 사람들이 기거하고, 활동하였다. 그 여러 사람들의 활동공간으로서 각각 걸맞는 건물들이 할당되었고, 그 건물들에는 그 주인의 신분에 따라 이름도 달리 붙여졌다. 그러한 건물들, 좀더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건물 주인의 신분에 따라 건물 이름에 붙는 끝글자들의 서열을 정리해 보면 대체로 ‘전당합각재헌루정(殿堂閤閣齋軒樓亭)’이 된다.

‘전(殿)’은 왕과 왕비, 혹은 전 왕비, 곧 왕의 어머니나 할머니가 공식적인 활동공간으로 쓰는 건물에만 붙었다. ‘당(堂)’은 전에 비해서 규모는 떨어지지 않으나, 격은 한 단계 낮은 건물이다. 왕과 왕비 등이 당에 기거할 수는 있으나, 그 이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비록 세자나 영의정이라 할지라도, 전에는 기거하지 못하였다. ‘합(閤)’이나 ‘각(閣)’은 지위 면에는 물론 규모 면에서도 전이나 당보다는 떨어진다. 전이나 당의 부속 건물일 수도 있고 독립된 건물일 수도 있다. 이층 건물일 경우 이층을 누(樓)라 하는 데 대해서 일층을 각이라 한다.

‘재(齋)’는 숙식 등 평상 주거용으로 쓰거나, 혹은 주요 인물이 조용하게 지낼 목적으로 지은 건물이다. ‘헌(軒)’은 대청 마루나, 대청 마루가 발달되어 있는 집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 헌은 공무적 기능을 가졌거나 아니면 일상적 주거 공간으로 주로 쓰였다. ‘누(樓)’는 지면에서 사람 키 높이 정도 떨어져 바닥이 마루로 되어 있는 집이다. 누는 주요 건물의 일부로서 누마루방 형태이거나, 이층 건물의 이층, 혹은 정자처럼 작은 독립 건물로 되어 있다. ‘정(亭)’은 흔히 정자라고 하는 것으로, 경관이 좋은 곳에 있어 휴식이나 연회 공간으로 사용하는 작은 집이다.

이렇듯 ‘전당합각재헌루정’은 엄격한 것은 아니지만 대체적으로 규모가 큰 것으로부터 작은 것으로 가는 순서요, 공식 행사를 치르는 것으로부터 일상 주거용으로, 다시 비일상적이며 특별한 용도로, 휴식공간으로 이어지는 순이다. 종합해서 이야기하자면 ‘전당합각재헌루정’은 그 순서가 건물들의 품격 순이며, 위계 질서라고 할 수 있다.

이 질서는 비단 궁궐에서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사찰이나 성균관 및 향교, 또는 일반 민가에서도 관철된다. 이를테면 사찰에서 부처님을 모신 건물들은 ‘전’자가 붙는 데 비해 조사당(祖師堂)처럼 사람을 모신 건물에는 대체로 ‘당’자가 붙는다. 성균관이나 향교에서도 공자의 위패를 모신 건물은 대성전(大成殿)이요, 유생들이 모여서 강학하는 건물은 명륜당(明倫堂)이다. 사가에서는 절대로 건물 이름에 ‘전’자를 붙일 수 없다. 아무리 높아도 ‘당’이다. 이런 질서를 알면 건물의 지위가 보인다. 궁궐을 둘러보고자 할 때는 우선 이런 기초 정보를 몇가지 지니고 들어가는 것이 쓸모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