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이야기] “興利”의 현장, 역사의 증인 : 흥인지문(興仁之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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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興利”의 현장, 역사의 증인 : 흥인지문(興仁之門)

홍순민(중세사 2분과)

도성은 타락산을 잘 타고 내려 오다가 그 산자락 마지막 장면에서 끊어져 버렸다. 이화여대 부속병원과 동대문 교회가 도성을 타고 앉아 버렸기 때문이다. 그렇게 도성이 끊어진 아래 길 가운데 흥인문―동대문이 종로, 왕산로, 율곡로, 흥인문로 네 길을 깔고 앉아 네거리 한 가운데 덩그라니 들어 앉아 있다.

동대문의 제 이름은 흥인문(興仁門)이다. 좀더 정확하게 현판을 따라 말하자면 흥인지문(興仁之門)이다. 흥인문이라고 하지 않고 흥인지문이라고 한 까닭은 그 좌우의 지세가 낮기 때문에 이를 보완하기 위해서 산줄기 모양의 갈 지(之) 자를 하나 더 넣은 것이라고 한다. 인(仁)은 어짐, 사랑, 보살핌, 양육 등의 뜻을 함축하고 있는 유교의 중심 개념이다. 오행 사상에서 동쪽이 木이요, 계절로는 春이요, 오상(五常)으로는 인에 해당하기 때문에 인자를 붙인 것이다. 그 인을 흥왕시키는 문, 흥인문은 오늘날에는 그러나 인보다는 이(利)에 눌려 있다. 동대문 시장을 비롯해 우리나라 최대의 시장에 둘러싸여 밤낮을 가리지 않고 드나드는 엄청난 상품들, 그것을 싣고 오가는 차량들에 치여 흥인문은 잘 보이지도 않는다. 누가 관심을 갖고 한 바퀴 휘 돌면서 둘러보려고 한다면 상당히 수고를 할 각오를 해야 한다. 사방이 길로 잘려 있다보니 지하도를 몇 개 오르내려야 하는데 그러다 보면 방향 감각을 잃어 흥인문이 어디 있는지 한참을 찾아야 할 지경이다. 그렇지만 그렇게라도 흥인문을 한 바퀴 둘러보는 것은 뜻없는 일은 아니다.

흥인문은 다른 문들과는 달리 옹성(甕城)이 있다. 옹성이란 문을 둘러싸고 본래의 성에 덧대어 바깥 쪽으로 둘러 쌓은 반원형의 성벽을 가리킨다. 문이 고개 마루턱 높은 지형에 있으면 굳이 옹성을 쌓지 않아도 되지만, 낮은 지형에 자리잡고 있어 적의 공격에 노출되어 있을 경우에는 이를 보완하기 위하여 옹성을 쌓는다. 옹성은 흥인문을 다른 문들과 구별짓는 등록상표가 되었다.

옹성은 가로 세로 30∼50Cm의 돌로 반듯반듯하게 성벽을 쌓은 위에 납작하고 반듯한 벽돌로 여장(女墻)을 쌓았다.(여장이란 성벽 위에다 다시 쌓은, 밖을 감시하고 총을 쏠 수 있도록 총구멍을 뚫어 놓은 낮은 담장을 말한다.) 그런데 옹성의 남남동쪽 그러니까 신설동 쪽으로 나가는 왕산로와 청계천, 동대문 운동장을 지나 장충단 쪽으로 나가는 흥인문로 사이 방향의 옹성은 다른 부위와는 그 쌓은 돌 모양이 다르다. 한 3∼4m 폭은 밑부분 성벽을 쌓은 돌도 다른 부위보다 더 작고 동글동글하며, 여장도 납작하고 반듯한 벽돌이 아니라 작은 화강암이다. 마치 땜질하여 놓은 것같은 모양이다. 그 부분에서 남쪽으로 성벽에 가 닿은 부분은 또 밑의 성벽이나 여장이 화강암으로 되어 있는데 돌의 크기가 좀 더 크고 번듯하다.

왜 그렇게 되었는지, 어느 쪽이 본래의 것이고 어느 쪽이 나중 것인지 정확한 내력이야 더 조사해 보아야겠지만, 짐작컨대 이것은 6.25나 아니면 그 이전 어느 난리 통에 허물어진 것을 복원하다보니 이렇게 된 듯하다. 이렇게 보니 흥인문은 그저 길 한가운데 들어 앉아 교통 흐름을 방해나 하는 천덕꾸러기가 아니라 산전수전을 다 겪은 우리 역사의 증인으로 새삼 다가온다. 보물 제1호가 허울만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