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림천택: 封禁과 與民共之 ② 사람과 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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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진(중세사2분과)

5. 사람과 숲, 경작지·가용산림·원시림

  모든 생물들은 숲의 형태를 특징짓는데 일정하게 기여하지만, 사람이야말로 숲에 의지해 살면서 숲의 모습을 바꾸는 결정적 생명체이다.

한반도의 숲이 가장 극적으로, 되돌려질 수 없게 바뀌게 된 것은 철기 사용이 보편화한 고대사회부터였다. 청동기 시대 사람들은 정착 농경을 하다가 토지가 척박해지면 새로운 농경지를 찾아 이주하였다. 그러나 철기 시대 이후 개간된 농경지와 촌락은 이후 만들어지고 개간된 농경지의 출발점이 되었다.

따라서 철기 시대 이후 한반도의 숲은 지속적으로 경작지·가용산림·원시림으로 나뉘어 사용되었다. 그 결과 원시림 아래에서 대부분을 차지하던 활엽수림, 특히 참나무 숲은 점차 소나무 숲과 관목림이 되었다.

그렇다면, 15~19세기 한반도에서 경작지, 가용산림, 원시림의 비율은 어떻게 바뀌었을까?   <그림 1>은 15~19세기에 한반도에서 진행된 숲의 변화를 살피기 위해 8세기~20세기 초의 자료를 이용하여 산림천택의 상태 변화를 추산하여 그래프화한 것이다.


[그림 1] 한반도 산림천택의 상태 변화 추정


신라 촌락문서, 이제현의 문집, 유형원의 반계수록은 고대사회에서 조선시대에 이르는 시기에 한반도의 산림이 어떻게 변화하였는지 가늠할 수 있는 자료가 있다. 여기에 일제 총독부의 통계 자료와 라흐텐자흐의 분석을 비교하면 15~19세기에 진행된 한반도 숲의 변화를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다.

<그림 1>는 15~19세기에 한반도에서 인간의 간섭이 배제된 원시림은 급감하고, 산림천택의 대부분이 경작지나 가용산림으로 전환한 결정적 시기임을 보여준다. 각각의 자료에 나타난 구체적인 모습을 조금 더 살펴보자.

먼저 8세기의 현황은 신라 촌락문서 및 이후 자료를 통해 추산할 수 있다. 신라 촌락문서에 나타난 4개 촌락의 농경지는 촌역 중 4.1% 가량이었다. 촌역 중 농경지가 아닌 곳은 시초 채취지로 사용하면서, 필요할 경우 개간하여 농경지를 마련할 수 있는 땅이었다. 나머지 촌락과 촌락 사이에 널리 펼쳐진 산림천택은 원시림 상태에 있었을 것으로 보이고, 14세기 중엽의 상황에 비추어 이러한 곳이 한반도 전역에서 90% 이상을 차지했을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에 경작지와 가용공간에 포함된 산림, 그리고 사람의 간섭이 거의 없는 원시림은 어느 정도였을까? 고려 말 탁월한 성리학자였던 이제현(李齊賢, 1287~1367)과 정도전(鄭道傳, 1342~98)의 언급에서 그 단서를 찾을 수 있다.

성리학자인 이제현은 14세기 중엽까지 활약하고, 특히 1351년 공민왕의 즉위와 함께 국정을 총괄하며 정치 개혁을 추진한 바 있다. 그는 원과의 외교적 교섭 과정에서 “우리나라는 땅이 천리에 지나지 않고, 산림천수[山林川藪]라서 쓸 수 없는 땅이 7/10입니다.”라고 하였다.1)

여기서 ‘산림천수’란 이후 산림천택(山林川澤), 산림수택(山林藪澤)으로도 쓰여졌고, 이곳은 대체로 원시림 지역을 가리켰다. 17세기 중엽 유형원에게 산림천택이란 “유민이 역을 피해 도망하는 곳”, “재목을 기르고, 금수가 자라는 곳”2)이었다. 국가의 지배력이 한정적으로 미치는 산림천택은 17세기 중엽까지도 여전히 원시림이었다.

그렇다면 가용공간 3/10 가운데 농경지는 어느 정도였을까? 정도전은 『삼봉집』에서 우리나라의 땅은 “산과 바다 사이에 있어 구릉수택 등 경작할 수 없는 땅이 10에 8~9에 이른다.”고 하였다. 경작한 곳을 전국토의 15% 가량으로 본 것이다.

개간 가능한 토지끼지 조사된 것으로 보이는 『세종실록』 지리지는 전국 결부수를 150~170여 만 결로 파악하였다. 정도전 사후 태종에서 세종대에 방대한 토지가 개간되었고, 이 중 상당수가 양안에 등재되었다. 또한 결부 계산에서 경무법을 사용할 때 였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이 시기 실제 경작지는 50~80만ha, 가용산림은 600만ha 가량이었다.

조선 건국 이후 산림천택 여민공지를 표방하고, 농본정책을 통해 농지개간을 장려했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천방이 개간되었고, 17세기에 이르러 화전 개발이 본격화하였다. 따라서 농경지와 가용 공간의 확장은 지속되었을 것이다. 왜란과 호란에도 불구하고, 경작지의 실질적인 감소는 매우 일시적이고, 한정적이었다. 이는 17세기 중엽의 현황에 대한 유형원의 주장에서 확인할 수 있다.

17세기 중엽 유형원은 『반계수록』에서 17세기 중엽 한반도, 산림천택과 경작지 면적을 추산할 수 있는 방법과 사례를 제시하였다.3) 유형원은 당시 산림천택, 도로, 원장(園塲)와 불모의 땅, 성읍과 마을[城邑閭里] 등이 8/10이고, 실제 경작지[實田]가 약 2,880,000경이라고 하였다. 8/10에 가용공간[마을, 도로, 가용산림]이 포함되어 있고, 유형원의 주장이 실제 한반도의 면적과 큰 오차가 있다. 이를 18~19세기의 개간과 산림의 이용, 20세기 초의 산림 상황을 고려하여 개략적으로 고려하여 보정하면, 경작지 등 가용공간·가용산림·원시림의 비율을 각각 20%, 35%, 45% 가량으로 추정할 수 있다.

20세기 한반도의 산림천택에 대한 체계적인 조사는 총독부가 실행한 것이었다. 총독부는 1913년 산림의 현황을 숲이 무성한 성림지(23.3%), 어린 나무가 자라는 치수발생지(30.1%), 나무가 없는 무임목지(18.7%)로 나누어 파악하였다. 성림지가 아닌 곳은 땔감의 채취나 벌목이 일상적으로 이루어지는 가용공간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기준을 따르면 1913년 시점에서 도시와 촌락, 도로, 경작지 등은 616만ha, 이를 포함한 가용공간은 76.7%, 가용산림만은 48.7%. 원시림에 근접한 숲은 23.3%로 볼 수 있다.  이로부터 25년이 경과한 1938년에 조선을 방문한 헤르만 라흐텐자흐는 일제강점기에 진행된 산림의 변화를 엿볼 수 있는 산림에 대한 통계 자료를 제시하고 있다. 라흐텐자흐는 당시 한반도의 산림 면적이 전국토의 73%였고, 숲이 전국토의 1/3인 33.3%라고 하였다. 이를 통해 당시 사람들의 경제활동이 활발히 이루어지는 가용공간은 산림 중 숲이 사라진 40% 가량과 경작지 27%로, 전국토의 67%로 추산할 수 있다. 화전 금지, 식림사업 등에도 불구하고 일제 강점기에 임목축적량은 크게 감소하였고, 넓은 숲이 훼손되었다.
6. 15~16세기 : 무너미의 숲(藪)

  고려 말 조선 초 숲의 상태를 가리키는 표현에는 ‘산장수량(山場水梁)’, ‘산장초지(山場草枝)’, ‘산림천택(山林川澤)’, ‘산림천수(山林川藪)’, ‘산림수택(山林藪澤)’, ‘산수(山水)’, ‘임천(林泉)’, ‘수목(樹木)’, ‘수(藪)’, ‘림(林)’4) 등이 있다.  ‘숩’, ‘숳’은 1459년에 간행된 월인석보에서 찾을 수 있는 숲의 우리 말 표현이다.

한자의 표현으로 림(林)과 수(藪)는 주제(周制)에서 그 정의를 찾을 수 있다. 주제에 따르면 산록지대에서 자라는 숲을 ‘임(林)’이라 하였고, 물이 고여 택(澤)이 될 수 있는 곳에 형성된 숲에서 물이 없어진 상태를 ‘수(藪)’라고 하였다. ‘수’는 조수(鳥獸)가 서식·번식하는 장소이며, 땔감을 얻었다. ‘수’는 ‘임’보다 초목이 훨씬 우거졌다.5)

이러한 ‘수’가 가장 널리 분포하는 곳은 무너미의 땅이었고, ‘수’의 숲은 15~16세기에 천방과 보를 만들어 논을 만드는 과정에서 우선적으로 제거되었다. 그리고 ‘수’의 숲 가운데 일부는 홍수 예방, 가로수, 풍수 비보 등의 목적으로 남겨졌다.

홍수 때에 물에 잠기는 ‘수’의 특성은 예안의 조산수(造山藪)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조산수(造山藪)는 “부진(浮津) 남쪽 언덕에 있다.”라고 하였다.6) 태백의 황지에서 발원한 낙동강이 봉화 지역을 흐를 때 이를 ‘나화석천’ 혹은 ‘매토천’이라고 하였고, 안동부에 이르는 곳에서 ‘요촌탄’이라 하였다.7)

『계암일록』에 따르면 인조 2년(1624) 7월 무렵 예안 현감이 어량을 대규모로 수축하였는 바 김령은 부포에 있는 조산수가 잠길 것을 크게 염려하고 있었다.8) 이는 선조 38년(1605) 7월 20일 홍수로 조산 숲(藪)이 모두 누런 물결에 휩싸였고, 이틀 뒤에 김령이 조산수를 찾았을 때 본 것은 큰 나무들이 뿌리 채 뽑혀 나간 후에 풀싹 하나 없었다고 한다. 아득한 백사장 곳곳에 진흙이 몇 길씩 쌓였다.9)



[그림 2] 예안현의 조산수(造山藪), 1917 한국근세지도 부포리(상),  다음지도(하)

  홍수가 비록 간헐적인 것이라 해도 그 피해는 사람들이 감내할 수 없을 정도로 가혹한 것이었다. 따라서 홍수지역이야 말로 가장 오랫 동안 사람들이 남겨둔 가장 넓은 빈 땅으로 만들었다. 덕분에 홍수가 닥치기 전까지 나무와 풀이 자라고, 많은 짐승들이 편안히 깃들어 살 수 있었다.

넓고 빈 땅이라는 특성을 갖춘 ‘수(藪)’는 전투를 치르는 요지가 되었다. 나말여초의 공산동수(公山桐藪)가 바로 그러한 곳이었다. 고려 태조 왕권이 신라의 구원에 나섰다가 견훤을 맞아 크게 싸운 곳이  공산(公山, 팔공산)의 동수(桐藪, 현 대구시 북구 지묘동, 금호강 지류)였다. 이곳에서 왕건은 대장(大將) 신숭겸(申崇謙)과 김락(金樂)을 잃고 겨우 목숨을 구할 정도로 대패하였다.10) 동수(桐藪)는 왕건이 이끈 5000의 군대와 견훤이 이끈 이보다 많은 수의 군대가 서로 맞서 싸울 수 있는 넓고 평탄한 땅이었다.




[그림 3]
대구의 공산동수(公山桐藪), 1917 한국근세지도(상),  다음지도(하)

공산동수(公山桐藪)는 일제강점기 『조선의 임수』에서 상세히 조사하였다. 숲의 위치를 “금호강에서 갈라져 나온 문암천 변에 해당하는 하반평탄지이다.”라고 했다. 숲이 있던 자리의 모습은 “미입목(未立木) 취락 및 경작지”로 조사되었다. 1917년 당시 냇가를 중심으로 약간의 나무가 있었지만, 대부분은 10세기와 달리 이곳에 마을이 들어섰고, 나머지 땅 대부분은 오랫 동안 경작지로 사용되었다. 2016년 현재는 이곳에 아파트를 중심으로 도시화되었고, 주변에 신도시가 들어서고 있다.

임천의 가림수(嘉林藪) 역시 평지 숲의 전형을 보여주며, 숲이 어떻게 개간되었는지 그 결과를 살필 수 있다. 일찍이 15세기 후반에 작성된 『동국여지승람』에서 임천군 동쪽 1리에 있는 것으로 기록된 가림수는 『조선의 임수』에서 20세기 초에 조사된 내역을 기록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임천의 옛 읍에서 남쪽으로 0.4km에 평탄지가 펼쳐져 있고, 이곳에 논산-서천을 잇는 도로상에 남북 방향으로 400m에 걸쳐 숲이 조성되어 있고, 수림의 주변은 모두 논이었다고 한다. 저습지에 형성된 왕버들 숲의 대부분이 농경지로 개간된 이후 일부가 남아 있게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당시 이곳의 왕버들 나무는 흉고 직경 최대 80cm이고, 평균 60cm 가량이었다. 길가를 따라 심어진 왕버들은 모두 35그루이었다. 이 당시 도로의 가로수로 보호·금양되고 있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조선시대에는 성흥산성과 연계되어 군사적 목적으로 보호되었다는 기록을 볼 수 있다.

다양한 이유로 이곳의 왕버들이 보호된 까닭을 찾을 수 있지만, 이곳에서 왕버들이 잘 자랄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특성은 저습지라는 점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주변 지역이 모두 논으로 개간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림 4] 임천의 가림수(嘉林藪) ⓒ 다음로드뷰(1), 다음블로그:http://blog.daum.net/bakje123/498 (2), 1917 한국근세지도(3), 다음지도(4)

  침수가 발생하고, 물에서 가까운 평탄지[무너미의 땅]에 자리잡은 ‘수(藪)’의 땅은 당연히 논으로 개발되기에 가장 적합했다. 15세기 천방의 개간이 본격화하면서 ‘수’는 벌목된 후 개간되었다.

세종 10년(1428)에 여산군 송거신(宋居信)은 “전라도에는 묵은 황무지가 많더니, 강원도로부터 유민(流民)들이 옮겨 와 살게 된 뒤부터는 호수와 인구가 매우 번성하고, ‘산림수택(山林藪澤)’이 전부 개간 경작되고 있습니다.”라고 하여 평지의 숲이 개간되었다는 점을 언급하고 있다.11) 명종 21년(1566)에 이르면 수백년에 걸쳐 전해오던 ‘수택(藪澤)’이 사점하려는 자들이 거짓으로 모두 절수하여 모두 사문(私門)에 돌아갔다고 하였다.12)

무너미의 땅에서 천방과 보를 설치하면서 많은 ‘수’가 농경지로 개간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은 이문건(李文楗, 1494~1567)의 『묵재일기(默齋日記)』에서 찾을 수 있다.

16세기 중엽 성주목에서 율수(栗藪)와 천수(泉藪)는 목사 및 지역민들에게 매우 중요한 장소였다. 여행자에게는 여독을 푸는 휴식의 공간이었고,13) 지역민들에게는 만남의 놀이와 공간이었으며,14) 수령과 군사들에게는 사냥터였다.15) 특히 ‘천수’에서 여러 차례 사냥이 이루어졌는데, 이문건이 언덕배기에서 살펴본 사냥에서 멧돼지나 꿩16)을 사냥하면서 복사 등 지역의 유력자들과 술자리를 벌이며 연회를 즐겼다.

그러나 일반 백성들의 삶에서 ‘수’는 가장 쉽게 농경지로 전환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중요했고, 16세기 중엽 성주목에서는 ‘율수’가 바로 그러한 곳이었다. 1553년 이전부터 ‘율수’의 터는 이미 백성들이 경작하고 있었는데, 이곳이 절수 대상으로 논의되었다.17) 이문건 역시 1563년에 “율수 윗편에 논 여러 두락을 만들었다[作栗藪上畓數斗落].”18)

1563년에는 이곳에서 벼 4석을 미리 떼어 받을 수 있게 되었다.19) 아마도 이곳에 만들어진 논을 이문건 ‘사방답(沙防畓)’ 혹은 ‘사방답(沙方畓)’으로 썼다. 하천의 본류에서 가까운 곳은 홍수로 물이 넘칠 때 가까운 곳에서 멀리 가면서 호박돌-자갈-모래-진흙 등의 순으로 퇴적시키며 무너미의 땅을 만들어가기 마련이었다. 오랫 동안 밤나무를 키우는데 쓰던 이곳 숲이 냇가 가까이 모래 많은 땅이었고, 천방 등으로 물을 막은 후에 논으로 사용될 수 있었기에 ‘모래 막은 논[沙防畓]’으로 썼던 것이다.

이문건은 이곳의 수확량이 벼 전 6석, 120속 가량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곳에서 이문건이 거두어들인 벼가 전 4석이고, 이를 ‘拮[길, 심하게 핍박하다]’이라고 하였다. 이는 ‘수(藪)’를 개간한 땅이 얼마나 비옥했는지 알려준다.20)

  따라서 ‘수’의 개간된 비옥한 새 땅을 둘러싸고 일반 백성, 유력자, 성주목 사이에 권리관계를 다시 설정하였다. 이전부터 사용되었던 사패, 그리고 16세기에 일반화된 입안과 함께 이곳에서 이문건이 언급한 ‘절수(折受)’ 역시 16세기 이래 보편화되는 토지에 대한 권리 획득의 방식이었다. 이것은 그들이 알았든, 그렇지 않든 간에 16세기 중엽에 성주 지방에서 근대적 소유권을 3자가 경합하며 탄생시키는 역동적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림 5] 성주목의 밤나무 숲(栗藪) ⓒ 1917 한국근세지도(상), 다음지도(하)
  16세기 중엽 밤나무가 있어 ‘율수(栗藪)’로 불리던 숲에는 오늘날 왕버들 나무가 55그루(수령 300~500년) 자라고 있다. 16세기까지 유지되던 밤나무 숲은 18세기 중엽 왕버들 나무로 교체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성주목에서도 이곳에서 생산된 밤을 공물로 바쳤는데, 영조 21년(1745) 봉상시에서 구례에 율목봉산을 조성하고, 영조 45년(1769) 조계산과 백운산에 율목봉산을 지정하면서  하삼도 각 고을의 밤에 대한 공물이 혁파된 바 있다.21)  이는 개간의 압력에 노출된 ‘율수’의 개간을 촉진하고, 이후 개간으로 좁아진 하천의 폭으로 인해 빈번해진 홍수에 더 잘 견딜 수 있는 왕버들로 교체하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7. 17~18세기 : 화전이 된 숲(林)

수(藪)가 무너미의 땅에 형성된 평지 숲이라면, 임(林)은 산록에 형성된 숲이었다. 화전 개발이 본격화한 17~18세기에는 산록에 자리한 ‘임(林)’의 개발이 본격화하였고, 불길은 빠른 시간에 넓은 숲을 훼손하고 화전을 만들어냈다.

이러한 역사적 과정을 정조 20년(1796) 순릉 직장(順陵直長) 소수중(蘇洙中, 1753~1802)은

우리나라는 본래 산에 의지해 세운 나라입니다. 돌아보건대 지금은 온 산이 모두 화전(火田)으로 일구어져 벌거숭이가 되어 전혀 산의 형세가 없습니다.22)

라고 하였다. 숲의 조선은 화전 개간을 통해 벌거숭이의 조선으로 변모하게 되었던 것이다.

18세기에서 19세기 초반에 서울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무명자(無名子) 윤기(尹愭, 1741~1826)는

화전[火田]23)

산골 백성 화전에서 이익을 구하니    :: 峽氓利火田
여러 산 꼭대기까지 모두 개간되고    :: 闢盡衆山巓
절벽마저 남겨진  땅이 없어라        :: 絶壁無遺土
연이은 봉우리 밤새 연기 일어나고    :: 連峯起宿煙
단지 등성이 나무 약간 남겨졌고      :: 只餘循脊樹
그나마 바위와 시냇물로 그치네       :: 猶限掛巖川
밭 가는 이들 모두 넘어질 듯         :: 耕者渾將倒
멀리 봐도 오싹한 것 느껴져라        :: 遙看覺凜然

라고 읊으며, 그 시대를 그리고 있었다.

그렇다면 화전 개발이 한반도의 울창한 산림을 제거로 이어진 까닭은 무엇인가?

‘요원의 불길’은 무너미의 땅에서 일어난 화재의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시초채취지요 사냥터였던 무너미의 땅에 발달했던 숲(藪)은, 15~16세기에 천방을 설치하는 과정을 거치며 대부분 농경지로 변모하였다. 사람의 활동이 집중된 무너미의 땅에서 일어난 불길은 당시대인들의 주요한 레토릭이었다.

산록에서 화전 개발이 기밸이 집중된 17~18세기 무렵 불길은 경사진 산록에 발달한 삼림(森林)에서 빈번히 발생하였다. 17세기 초 안동부사 민성징(閔聖徵, 1582~1648)이 말하듯 화전이란 “산골 백성들이 높은 산 비탈진 곳에 나무를 베고 불을 질러 일군 것”24) 이었다. 불지르기를 동반하는 화전은 주변의 숲에 화재를 불러오곤 하였다. 이러한 산불은 짧은 시간에 많은 산림을 훼손하였고, 화전의 증가에 상응하여 산림의 훼손도 증가하였다.

효종 4년(1653) 이시방은 화전을 ‘산을 벌거숭이로 만드는 것’이라고 하였으며, 현종 4년 헌납 이민서는 아무리 깊은 산이라도 화전이 없는 곳이 없었으며 “높은 산의 울창한 숲을 못대로 불질러 태우는 바람에 100년 동안 기른 것들이 한 번에 소진되고, 산은 벌거숭이가 된다.”라고 하였다. 현종 1년(1660) “크고 작은 산골짜기 중 70~80%는 화전이 되었다.”25) 고 보고할 정도로 화전개발은 국가적 관심사였다.

숙종 4년(1678) 무렵에는 지리산과 같은 나라에서 ‘이름 있는 산[名山] ’조차 화전의 손길이 산허리 이상으로 올라가 벌거숭이를 만들고 있었고, “몰래 일군 화전으로 명산이라고 한 곳까지 장차 씻겨나가는 것을 면할 수 없게 될 것이다.”26) 라고 하였다. 드디어 정조 22년에는 “이름 있는 산(名山) 대부분이 화전으로 일구어졌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숙종 6년에는 국방의 요지로서 보호되는 동선(洞仙)과 여러 산 마저 화전이 산꼭대기까지 꽉 차 있어서 민둥산이 되었다고 하였다. 이는 18세기 초에 이르러 강원도의 깊은 산이 모두 개간되는 것을 넘어 오대산 사각(史閣)의 금표 구역에 화전이 침범하였고, 평안도 강변 지역이나 철령·함관령·마운령·마천령 등 국방의 요지마저 화전으로 산에 나무가 자랄 수 없게 되었다고 하였다.

17세기 말 죽령의 상황에 대해

10여년 전 수목이 하늘을 가릴 정도로 빽빽했는데, 지금은 나무 한 그루도 남아 있지 않다. 모두가 화전이란 것이 그것들을 태워버린 것이다. 27)

라고 하였다. 화전을 만드는 일은 그 자체로서 엄청남 산림을 훼손하였다.

18세기에도 화전은 더욱 확대되었고, 이로 인해 더 넓은 숲이 불태워졌다. 영조 21년(1745)에 부제학 원경하는 강원도의 화전이 처음에는 산중턱까지 개간하였던 것이, 지금은 산꼭대기까지 미치고 있다고 하였다. 이러한 추이는 계속되어 정조 23년(1799) 창원부사는

근래 산골에 사는 백성들은 …… 반드시 외진 곳을 찾아가서 화전 농사를 지으니 산꼭대기까지 농기구가 미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산중의 수목은 한번 기르려면 거의 100년이 걸리므로 곳곳이 벌거숭이가 되어 모래와 돌이 쓸려 내리고 있습니다.28)

라고 하였다. 화전의 개발이 경사지인 산록을 넘어 정상부에 남아 있던 숲을 불태워 모든 산을 벌거숭이로 만들었다.

화전이 늘어나고, 숲이 줄어드는 만큼 종다양성은 훼손되었다. 산림이 씻겨 내려가면서 새와 짐승들이 몸을 숨길 곳이 없어졌고, 강원도에서 많이 나던 인삼이 더 이상 생산되지 않았다.

이를 목도한 국왕 정조는 『홍재전서(弘齋全書)』에서 “근래에 개간한 화전이 푸르던 산을 온통 덮었다.”라거나, “요즈음 산중턱 이상은 모든 화전으로 쓰여 1,000년 된 나무가 없는데, 하물며 인삼이 있겠는가?”라고 원시림과 인삼이 소멸하였음을 기정사실화하였다.

8. 19~20세기, 남산 위에 저 소나무 ~~

  20세기 한반도 야산은 나무는 드물었고, 곳곳이 헐벗었다. <그림 6>과 같은 황량한 산은 일상의 풍경이었다. 서울을 포함한 마을 곳곳에 있는 남산 위에 단지 몇 그루의 소나무가 우뚝하니 서있는 것은 일상의 풍경이었다.

그러기에 한국인들은 애국가 2절에서 “남산 위의 저 소나무~~”라고 부름으로써 서로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었다. 소나무처럼 우뚝하니 서 있어야 겠다는 결연한 의지는 일상에서 바라보는 경관에서 가져온 것이었다. 그러나 한 세기가 지난 오늘날 소나무는 병들어 가고 있고, 줄어들고 있다. 한 세대 전만해도 누구나 볼 수 있었던 저 우뚝한 소나무는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갔는가?



[그림 6] 나무가 거의 없는 20세기 중엽의 야산 咸興市, 1956/Photographer Unidentified(상),春川市, 1959/ Photographer Jim Hofstetter(하)
  한반도 숲은 1950~60년대의 극단적 고갈 상태에 놓여졌고, 197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회복 국면으로 전화되었다. 따라서 1960년대까지 전국 곳곳에 나무 없는 산들이 많았고, 그러한 산들에 간혹 몇 그루의 소나무가 있었기에 그 소나무들은 우뚝하게 보일 수 있었다.

19~20세기 한반도 숲에서 나타난 변화는 『매천야록(梅泉野錄)』, 조선총독부의 산림통계, 라우텐자흐의 기록에서 엿볼 수 있다.

황현의 『매천야록』에 따르면 19세기 후반 한반도의 숲은 지역에 따른 편차가 상당하였다. 기호지방의 수백 리에는 한 아름되는 소나무가 해를 가리는 곳이 곳곳에 있었지만, 영남과 호남에서는 소나무가 거의 없었다. 영남과 호남에서는 흉년에 소나무 껍질을 벗겨 주린 배를 채우는 일이 많았고, 이는 숲의 고갈을 가져왔다. 이는 기호지방과 달리 명문거벌(名門巨閥) 혹은 경재(京宰)와 읍신(邑紳)으로 불리는 세력있는 가문이 상대적으로 적어 숲을 적절히 보호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29)

  일제강점기에는 조선총독부에서 작성한 자료를 통해 통계적으로 그 의미를 탐색할 수 있다.

1910년 조선총독부연보에는 1909년에 조사된 안면도 산림의 현황에 대한 기록이 실려 있다. 당시 안면도의 숲은 국가 소유였고, 주요 수종은 소나무였다. 국가가 필요로 하는 건축 및 선박용 목재를 공급하는 봉산의 하나였다.

18세기 말에 수원 화성을 짓는 과정에서 대형건축물에 쓰일 대부등 344개가 모두 안면도에서 공급되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그럼에도 20세기 초 안면도의 산림면적 7,156ha 중에서 나무가 자라는 임목지가 4,864ha(68%)였고, 나무가 없는 무임목지도 2,292ha(32%)나 있었다.30) 비교적 국가의 신중한 감독과 관리에도 불구하고, 나무가 없는 곳이 매우 넓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국유림마저 이처럼 황폐해진 까닭은 무엇일까? 『매천야록』에는 일제가 국권 강탈을 전후하여 실시한 산림측량에서 조선인들이 방관하는 틈에 곳곳의 일본인들이 산림과 하천을 사적으로 측량하여 자신의 소유로 만들었다고 한다.31) 산림을 수탈하기 위한 조처였다.

이후 조선 총독부는 더욱 체계적으로 전국의 숲을 조사하였다. 산림 현황은 무성한 성림지, 어린 나무가 자라는 치수 발생지, 나무가 없는 무임목지로 나뉘어 조사하였다. 그 결과가 다음 <그림 7>이다.



[그림 7] 1913년 지역별 산림의 현황(단위: ha) ⓒ KOSIS 광복이전 통계의 임야면적, 1913

전국의 성림지는 32.3%였고, 치수발생지가 41.8%에 달했고, 무임목지가 25.9%에 달했다. 이에 비추어 성림지가 많은 곳은 함경남도, 함경북도, 전라북도의 순이었고, 치수 발생지가 많은 곳은 황해도, 전라남도, 평안남도의 순이었다. 무임목지의 비율은 함경북도, 평안북도, 경기도, 충청남·북도, 경상남도이 전국 평균보다 높았고, 전라남·북도, 경상북도, 강원도, 황해도, 평안남도와 함경남도에서 낮았다.

성림지가 넓은 곳에서 상대적으로 치수발생지가 좁고, 성림지가 적은 곳에서 대체로 무임목지와 치수발생지가 넓게 나타난다. 이는 무임목지와 치수발생지가 사람에 의해 훼손된 곳으로, 상대적으로 인구와 토지가 적은 곳에서 원시림이 넓게 남아 있을 수 있었음을 보여준다.

사람에 의한 산림의 훼손은 일제 강점기에 더욱 진전되었다. 1938년 라흐텐자흐의 보고에는 당시 경작지가 27%인데, 실질적 산림은 33.3%였다고 하였다. 1938년 한반도의 산림 면적은 161,670㎢으로 국토의 73%가량이었지만, 실제 숲이 있는 곳은 그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당시 산림이 남아 있는 곳은 사람들의 접근이 용이하지 않은 큰 산맥이나 사찰이 보호하는 숲 정도였다고 한다.32)


[그림 8]  1943년 한반도의 활엽수와 침엽수 분포

  20세기 중엽 한반도의 숲의 수종은 어떠했을까? 침엽수와 활엽수의 비율로 살펴보기로 하자. 1943년 일제 총독부가 작성한 통계에 따르면 전체 숲 가운데 침엽수는 64.2%가량이었고, 활엽수는 35.8%에 지나지 않았다.

나무에 대한 전문적 지식이 없는 다수는 기온이 상대적으로 낮은 북부 지방이 남부 지방보다 침엽수가 더 많았다고 주장하곤 한다. 그러나 1943년의 통계는 이러한 견해가 사실이 아님을 보여준다.
침엽수의 비율은 전라남도에서 가장 높았고, 활엽수의 비율은 평안북도에서 가장 높았기 때문이다. 이는 15~19세기에 나무의 종류를 변화시킨 요인이 기후가 아닐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오히려 인구가 집중 적으로 분포한 많은 평지 지역에서 침엽수가 많았고, 상대적으로 인구가 적은 산지 지역에서 활엽수가 더 많았다. 이는 인구의 분포가 산림의 나무 종류를 가름하였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19~20세기 무렵 사람이 사는 인근의 야산에서 자라는 나무는 대부분 침엽수였고, 그 침엽수의 대부분이 소나무였으므로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신의 집 앞에 우뚝하니 서 있는 소나무를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이는 일제강점기의 암울한 시기에 애국가를 만들 당시, 소나무를 소재로 삼음으로써 다수의 한국인들이 애국가를 우리의 노래로 받아들이는 친화력을 발휘하는 매개체가 되었으리라는 점을 상상하는 것이 어렵지 않다.

 


1)『高麗史』 卷110, 列傳 卷23, 諸臣, 李齊賢.
2)
『磻溪隨錄』 卷1 田制 上 分田定稅節目.
3)『磻溪隨錄』 卷2 田制 下, 打量出軍出稅式.
4) 한정수, 「조선 태조~세종 대 숲 개발과 중송정책의 성립」,『사학연구』 111, 한국사학회, 2013, 44.
5) 장미아 외,『역주 조선의 임수』, 지오북, 2007, 10~11.
6)『新增東國輿地勝覽』 卷25, 慶尙道 禮安縣.
7)
『宣城誌』, 山川;『輿地圖書』 下, 慶尙道, 禮安, 山川. 오늘날 예안면 부포리에 있는바, 현재는 안동댐에 수몰된 지역이지만 홍수시를 제외하고는 안동댐의 수위가 내려가 넓은 벌판으로 노출되곤 하는 지역이다.
8)
『溪巖日錄』 四, 甲子 722.
9)『溪巖日錄』 一, 乙巳 720;『溪巖日錄』 一, 乙巳 722.
10)
『高麗史』 卷1, 世家, 太祖 109;『高麗史』 卷92, 列傳 諸臣, 洪儒 ·申崇謙.
11)
『世宗實錄』 卷40, 世宗 10年 閏4月 壬辰.
12)
『明宗實錄』 卷32, 明宗211月 辛酉.
13)
『默齋日記』 1551. 2. 9; 1552. 7. 5
14)
『默齋日記』 1552. 6. 6; 1552. 7. 21
15)
『默齋日記』 1552. 7. 29
16)
『默齋日記』 1555. 11. 23; 1557. 1. 9; 1557. 11. 16; 1561. 12. 8
17)
『默齋日記』 1553. 9. 9
18)
『默齋日記』 1563. 2. 18
19)
『默齋日記』 1566. 4. 23
20)
『默齋日記』 1563. 8. 12; 1564. 7. 18; 1564. 7. 22; 1565. 8. 24; 1565. 9. 7
21)
『英祖實錄』 卷62, 英祖 2111月 戊子;『英祖實錄』 卷113, 英祖 458月 壬子.
22)
『日省錄』 正祖 2037日 癸丑.
23)
『無名子集』 2, , 火田.
24)
『仁祖實錄』 卷20, 仁祖 7229日 乙卯.
25)
『承政院日記』 9, 顯宗 11011日 癸巳.
26)
『承政院日記』 14, 肅宗 41122日 己未.
27)
『承政院日記』 19, 肅宗 231213日 己未.
28)
『正祖實錄』 卷51, 正祖 23224日 壬子.
29)
『梅泉野錄』 卷1,  甲午以前 上 ⑮ 松皮의 救荒.
30)
『朝鮮總督府年譜』, 1910, 임업급수렵.
31)
『梅泉野錄』 卷6, 隆熙四年庚戌 ②  山林强奪.
32)
헤르만 라우텐자흐(김종규 외 역), 코레아 I 답사와 문헌에 기초한 1930년대의 한국 지리,지지, 지형, 민음사, 1993(1945), 217.


 

참고문헌

KOSIS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고전번역원 한국고전종합 DB
한국근세지도
Design Party 사진자료

『高麗史』, 『高麗史節要』, 『朝鮮王朝實錄』, 『承政院日記』, 『備邊司謄錄』, 『日省錄』, 『三峯集』,『默齋日記』, 『鷄巖日錄』, 『磻溪隨錄』, 『無名子集』, 『梅泉野錄』, 『世宗實錄』 地理志, 『新增東國輿地勝覽』, 『宣城誌』, 『輿地圖書』, 『朝鮮總督府年譜』

장미아 외, 『조선의 임수』, 지오북, 2007.
헤르만 라우텐자흐(김종규 외 역), 『코레아 I 답사와 문헌에 기초한 1930년대의 한국 지리·지지·지형』, 민음사, 1993(원 1945).

한정수, 「조선 태조~세종 대 숲 개발과 중송정책의 성립」, 『사학연구』 111, 한국사학회,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