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지는 것이 숭례문 뿐이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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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지는 것이 숭례문 뿐이랴
                                        – 문화유산에서 역사를 빼버린다면 –

하일식(고대사분과)

   답사를 다니면서, 내가 가장 자주 가는 곳은 경주이다.  공부와 관련해서도 그렇고, 최근 발굴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곳이기도 하고…
오래만에 경주읍성을 찾았다가 느낀 아쉬움. 복원, 정비 공사를 해놓았는데, 조선시대 성벽을 완전히 해체하고 새로 쌓고 있었다. 바로 이게 문제인데, 어디 사진을 보면서 이야기해보자.  그리고 다른 사례 몇 개도 아울러 살펴보자.

  <역사>를 빼버린 <경주읍성>

아래 사진이 최근 수년간 복원, 정비를 추진하고 있는 경주읍성의 동벽. 일단 깨끗해 보인다.

▲ 복원, 정비한 경주읍성 동벽. 지금은 북벽까지 복원을 염두에 둔 발굴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런데 성벽 바깥 쪽에 많은 석재들을 늘어놓았다. 가서 보면, 건축의 기단돌부터 시작해서, 석탑의 몸돌, 난간석 등등 갖가지 석재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다. 모두 읍성 성벽에 있는 것들을 빼낸 것이다. 그리고 새 돌을 써서 완전히 새로 쌓았다. 덕분에 성벽 일부는 미석(眉石)까지 갖춘 번듯한 모양이 되었는데…

  ▲ 성벽 밖에 빼놓은 각종 석재들. 대부분 신라 때의 것들이다.

바로 이런 모습이 되어 있다. 내 기억으로는 이런 모습이 된 것이 거의 5년도 좀 넘은 것같다.(이 사진은 2008년 2월 27일에 찍은 것)

▲ 조선시대 <경주읍성> 성벽으로서 갖고 있던 특징은 사라져버렸다. 거의 여느 동네 돌담 수준이다.

문제는, 현재의 이런 모습은 경주읍성에서 역사를 탈색시켰다는 점이다.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겠지만, 내 생각은 그렇다. 옛날 사진을 보자. (1997년 2월 사진 – 슬라이드 사진을 디지탈로 바꿀 기계가 없어서 옛날 내 책에 썼던 것을 스캔하였음)

▲ 1997년 2월의 경주 읍성. 신라시대 건축물에서 가져온 석재들이 잔뜩 끼어 있다.

신라시대 건축 부재들이 잔뜩 끼어 있는 성벽. 이것이야말로 경주읍성이기 때문에, 경주의 역사를 품고 있는 모습이었다. 옛날 내 책에서 이렇게 설명했었다.
“성벽을 보면 신라 때의 탑재(塔材)를 비롯하여 여러 가지 석재들을 모아 쌓은 흔적을 찾을 수 있는데, 지금보다 흔적이 많이 남아 있던 20세기 초에는 불상의 머리도 눈에 띄었다고 한다. 이는 불교를 억압하던 조선시대에 성곽을 보수하면서 주변의 절터에서 돌을 가져다 사용했기 때문인데, 불교밖에 모르던 신라시대 사람들이라면 엄두도 내지 못할 행동이었을 것이다. 사회 분위기가 서로 다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마음의 차이가 읍성의 성벽에 뚜렷이 나타나 있는 것이다.” (하일식, 2000, 『경주역사기행』(보정판), ibook.store, 41~42쪽)

그러나, 이제는 학생들을 데리고 가서도, 이런 설명을 하기 전에 “예전에는 ~”라는 설명을 다시 하나 더 추가해야 한다.  바보 같은 동어반복이지만, 경주읍성이 경주읍성인 까닭은 <경주>의 <읍성>이기 때문이다.

   경주가 어떤 곳인가? 오랜 기간 신라의 수도였고, 고려~조선을 거치며 쉼없이 많은 사람들이 살아온 곳 아니던가. 그래서 시대에 따라 고을 풍경이 바뀌고, 사람들의 정신세계도 달라지고… 그런 역사가 누적되어 읍성에 스며 들어가 있는 것이 당연한 것. 물론, 고창읍성에 가도 성벽에 탑재(塔材)와 주춧돌들이 끼어 있는 것을 더러 찾을 수 있으나, 경주만 하랴 ~
<경주>에 만들어진 <읍성>이었기 때문에 그러했던 것이며, 이야말로 문화유산에 들어 있는 [시간성], [역사성]이 아닌가. 그래서 <역사성을 간직한 경주읍성>이어야 한다는 데 누가 이의를 제기할 수 있을까?
그런데, 경주읍성에서 역사성을 고스란히 탈색시켜버리고, 전국의 어느 읍성 성벽이나 마찬가지로 만들어버렸다면, 비난받아 마땅한 일이 아닌가 ! – 물론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도 없지는 않으리라 여기지만, 현재 내 생각은 이렇다.

   관계자에게 “왜 이런 꼴을 만들어놓았는지” 물으면 돌아올 대답이 뻔히 예상된다. “옛날 돌들을 그대로 두고 덧쌓으면 붕괴 위험이 있고, 안전사고도 걱정되고…” 얼핏 맞는 얘기 같지만, 건축 전공자들도 다 납득하지 못한다. 특히나 옛날 성벽 그대로 수백년을 버텨온 것인데, 새삼 뭐가 새로 무너지고…?
혹시 성돌을 빼내는 과정에서 신라시대 비석이라도 하나 나올까봐 그랬을까? 그래도 그렇지… 원래 모습을 생각한다면 이럴 수는 없을 것이다.

복원하는 사람의 <생각>이 부족해서 그렇다. 경주 부근에서 이런 복원과 정비를 할 때, 조선시대 전공자가 자문하는 경우가 거의 없어서 그럴 것이다. 고대 고고학 관계자들 만으로 형식적 자문이 이루어지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면 무리일까? (추측일 뿐이며, 고고학 관계자를 비난할 생각은 없다 )
어쨌든 결과적으로 <경주읍성>으로부터 역사성을 탈색시킨 꼴이 되었다.
임진왜란 때 함락되고 수복하는 전투가 제법 치열했던 곳. 수복하는 전투에서 성 안의 왜군에게 비격진천뢰를 처음 사용했던 곳. 그 당시 아군의 지휘관이었던 사람을 기념하는 비석이 지금도 황성공원 한 켠에 서 있다(너무 길어질 것같아서 생략). 경주는 신라만의 경주가 아닌 것이다.

  국적 불명, 시대 불명의 김취려 묘

2007년 2월, 학부 학생 셋을 데리고 갔을 때 찍은 사진을 보자. 여기는 초행길이었다. 해가 이미 저물어서 컴컴할 때였지만, 그래도 지나칠 수 없어서 산길을 꽤나 올라갔었다.(저녁 무렵이라 사진이 썩 좋지 않아서 최대한 밝게 손질한 것)

 ▲ 김취려 장군의 묘 (울산 광역시 울주군 언양읍)

김취려는 고려 고종 때 활약한 장수이다. 그는 동북 국경을 수비하는 데 활약했는데, 약탈자가 된 거란군을 격퇴하는 데 공을 세웠다. 이때 몽골군, 동진군과 협력하여 거란군을 몰아내기도 했다. 그의 본관이 이곳 언양이어서, 무덤 조금 아래쪽에는 그의 태지(胎址) 유허비(遺墟碑)와 비각도 있다.
 
그의 묘는 지정문화재가 아니다. 따라서 관리도 문중에서 하고 있는 듯한데, 무덤 떼를 새로 입이고, 단장을 한 지가 얼마 안되는 듯하다. 안내판도 깨끗히… 여기까지는 좋다. 문제는 최근에 정비해놓은 모습이 국적 불명, 시대 불명의 무덤이 되어 있다는 것.

▲ 묘 앞의 국적 불명의 동자상(?-뭔지는 나도 모르겠음), 그리고 새로 세운 석상들 

위의 오른쪽 사진은 묘 앞에 새로 배치한 무인상과 문인상이다. 석상의 생긴 모양이나 옷차림 등등에 대한 언급은 생략한다. 애초에 있어서는 안될 석상들을 갖다 놓았으니, 모양을 논란한다는 것도 넌센스이다. 또 내가 자세히 언급할 소양이 없기도 하고…
이렇게 새로운 석상들을 세운 뒤에, 원래 무덤 앞에 서 있던 주인들을 아무렇게나 팽개쳐 놓았다. 형체를 알아보기 어렵지만, 자세히 보면 보인다. 아래 사진의 오른쪽과 짝을 이루던 원래의 석상들이다. 여기 팽개쳐 놓은 것들은 좀 손상된 것들이라서 이런 대접을 받은 것 아닌가 싶다.


▲ 팽개쳐놓은 원래의 석물(왼쪽)과 겨우 남겨둔 것(오른쪽)

김취려 장군의 묘에서 보고 싶었던 것은 위의 오른쪽 사진과 같은 원래의 석물이었다.
조선왕릉에 가면 볼 수 있는 석상들과, 고려 말기 이전의 석상들은 생긴 모습이 다르다. 그중 전남 진도의 승화후(承化侯) 온(溫)의 무덤이라 전해오는 곳에서 위의 오른쪽 사진과 같은 모습을 한 석상을 볼 수 있다
(이곳도 정확히 무덤 주인공을 확정할 수 있는 곳은 아니다. 그렇게 전해질 뿐이다. 다만, 앞의 석물로 보아 조선시대 무덤은 분명 아니니… 현지에서 전해오는 이야기에 무게를 실을 수 있는 것이다)

위의 오른쪽 석상은, 석장승을 방불케 하는 눈매, 단순한 얼굴, 그리고 환조(環彫)라기보다는 앞 면만 선각(線刻)한 듯 간단히 처리한 윤곽 등등… 승화후 온의 묘로 전해오는 무덤 앞에 서 있는 석상과 통하는 구석이 있다.
용케 남았다고 하지만, 사실 이것도 제자리인지, 아니면 뒤로 좀 물리거나 앞으로 당겨놓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만약 그랬다면 공간배치의 원형에 손을 댄 셈이 되는 것이다. 어쨌든 전체적으로 좀 ‘황당하다’고 할까? 뭔가 뒤죽박죽이 되어 있었다.
통일신라 왕릉도 아닌데 왠 돌사자가 있질 않나, 그것도 상대석, 중대석, 하대석으로 이루어진 연화대좌(蓮花臺座)에 국적 불명의 모습을 한 돌사자.. 김취려가 살던 고려시대를 생각하면 더더욱 말이다.

정비를 하려면 제대로 해야 한다. 무덤 앞에 바닥돌을 깔았는데, 원래 서 있던 비석과 각도를 맞추지 못해서 아래 사진과 같은 꼴이 되었다. 인부들이 ‘선(線)’을 맞추기 위해 붉은 색 스프레이까지 뿌렸다. 그랬으면 제대로 선을 맞추어야지 왜 비뚤어 놓았느냐 말이지. 거 참~

▲ 원래의 묘비와 새로 깔아높은 바닥돌의 부조화

어쩌면, 원래 비석을 세울 때는 정남향을 고집하지 않았는데, 최근에 문중에서 상석을 놓고 바닥돌을 깔면서 정남향을 고집하다보니 빚어진 결과가 아닐까… 추측할 뿐.

소양의 부족을 탓해야 하나, 뭐라고 해야 할까…
이름난 조상의 묘를 번듯이 꾸미고 싶은 마음이야, 한 켠으로는 이해가 안가는 바도 아니지만, 방향이 잘못 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내 개인적 취향일 뿐일까?
그러나 어쨌든 현재 김취려 장군의 묘는 국적 불명, 시대 불명의 무덤이 되어 버렸다는 것은 분명하다. 되돌릴 수 없을까? 최소한 원래 상태 그대로 놓아두고, 주변 환경만 가꾸었어도, 고려시대의 분위기에 맞는 좋은 유적이 될 수도 있었을텐데 말이다.

비슷한 사례가 하나 더 있다. 몇 년 전, 근 20년만에 전봉준의 묘단(墓壇)을 찾았을 때 느낌이다. 그는 처형된 뒤에 시신도 찾을 수 없어서 한 참 뒤에야 묘단이나마 만들어서, 찾는 이들이 생겨나곤 했는데… 몇 년 전에 가 보니, 어엿한 고관대작의 무덤 형색을 갖추고 있었다. (내 취향이 좀 고집스러워 혼자서 거부감을 느끼는 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이 글은 내 느낌을 적는 곳이니까… )
아래 사진과 같다.

 ▲ 1980년대에 이곳을 찾았던 기억을 가진 이라면, 왠지 모를 거부감을 느낄 것이다.

19세기 말의 전봉준, 그가 처했던 시대환경, 그와 뜻을 함께 한 사람들이 꾸었던 꿈들… 그리고 실패한 혁명가와 그 후손들이 겪어야 했던 고난… 이런 것들이 고스란히 우리 20세기 역사가 아니었던가.
그러나 평가가 달라졌다고 해서, 이제 와서 그의 묘단조차 별안간 고관대작의 무덤으로 꾸며놓으면? 의견이 다를 수는 있겠지만, 나는 납득하기 어렵다.

 

 ‘때려주고 싶은’ 새 효자비

  정말 꼴불견(?) 하나를 더 소개해보자. 경남 산청의 문익점 목화 시배지(始培地)에 있는 효자비이다.
문익점이 원(元)나라에서 몰래 가져온 목화 씨앗을 그 장인과 함께 재배했던 곳이라고 해서, 제법 꾸며 놓은 곳이다.  전시관이 만들어져 있는 곳을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야 한다. 입장료가 그다지 비싸지는 않았던 기억.
각설하고, 다음을 보자.


 ▲ 효자비각 (2007년 늦봄에 찍은 사진)

   겉으로 보아서는 매우 멀쩡한 비각이다. 안내판도 새 단장을 한 지가 몇 년 안되는 듯, 비교적 깨끗한 편이고. 그러나 속을 들여다보고, 입을 딱 벌릴 수밖에 없었다. 누구든 나와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이 비석은 문익점의 효행을 기려서 세운 것이다. 안내판 설명에 따르면, 고려 말 왜구 침입 때, 모친상으로 시묘(侍墓 )하던 문익점이 피난도 가지 않고 묘를 지키는 모습을 본 왜구들이 “효자를 해치지 말라”는 나무 표지를 세워서 주변이 무사했다고 하고, 1383년(우왕 9)에 정려를 내리고 마을을 효자리라 불렀다고 한다. 원래 비석은 1923년에 후손들이 세운 것인데… (그러나 기록에 근거하여 1383년 당시의 안렴사와 차사 명단까지 새겨놓았다)


         ▲ 원래 서 있던 비석 앞에 점판암으로 새 비석을 세웠다.

 

   1923년에 세운 비석에 금이 가 있는 상태라서, 복각(復刻)하여 새로 세우는 것까지는 그렇다고 치자.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 바로 코 앞에다가 말이지, 원래 비석을 가리면서까지 좁은 비각 안에 쑤셔박아 넣어야 했을까? 원 참 ~!
겨우 100년이 채 안되는 것이긴 하지만, 그래도 이게 원조 아닌가 말이다. 그나마 가치를 따지자면 뒤에 가려진 원래의 비석이 먼저 아니겠는가. 금이 갔지만, 서 있지 못할 상태는 아니다. 또 금이 간 것을 처리하는 다른 방법도 있다. 그러나 좁은 비각 안에다 이 모양을 해놓았다. 요즘 학생들 표현으로 ‘허걱’이다.
1923년에 후손들이 비를 세웠다면, 그 당시에 새삼 비를 세우게 된 배경과 분위기가 있기 마련이고, 이것들을 짚어보는 것이 나중에 역사 공부하는 사람들의 임무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분명, 새로 비석을 만들어놓은 사람들이, 자신의 행동을 내세우기 위해 이런 꼴을 해놓았으리라. 자신이 번듯한 새 비석을 만들었다는 것은 내세우고 싶으면서도, 뒤의 원래 비석이 갖는 가치를 너무 가벼이 생각한 듯하다. 뭐가 더 중요한지를 모르고서니, 아무 행동이나 저지르고 본 결과가 이 모양이다.

누가 이랬을까? 후손 종친회일까, 아니면 현지 공무원일까, 합작품일까? – 나도 모르겠다.
빗대서 이야기하자면 이런 느낌일지도 모른다. TV에 김태희가 출연하여 얘기하는 중에, 개그맨 ○○○가 계속 카메라 앞을 가리고 엉뚱한 짓을 해대면 때려주고 싶지 않을까?
비각 안의 이 두 비석을 바라보면서, 나 역시 그런 충동을 느꼈다면….

  숭례문 때문에 말들이 많지만, 문화유산을 둘러싼 황당한 장면들을 보는 것이 어제 오늘… 한두 건인가 말이다.

연세대 교수